개인 간 내전을 벌이는 사회… 미국 따라가는 한국 [뉴스] 지난 10월 13일, 인천 구월동의 대형 상업시설에서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흉기 난동 사건이 발생했다. 피의자는 양손에 흉기를 테이프로 고정한 채 건물 안을 이동하며 일면식도 없는 시민들을 공격했다. 사건 초기 보도만으로 범행 동기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의 공간이 순식간에 생명을 위협받는 장소로 바뀌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사건은 우리 사회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최근 학계에서는 피해자와의 관계나 범행 동기가 쉽게 설명되지 않는 범죄를 흔히 ‘이상동기 범죄’로 명명한다. 하지만 동기가 명확하지 않다는 사실이 곧 동기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불특정 다수를 공격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가해자가 동일한 심리 상태에 있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그러나 범행의 동기나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살인을 저지르는 범죄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불가능한 심리, 뒤집어 말하자면 인간을 증오하거나 혐오하는 심리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증오 혹은 인간혐오 범죄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내가 말하는 ‘인간증오’ 또는 ‘인간혐오’는 개별 범죄자의 심리를 확정하는 진단명은 아니다. 타인을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거나 제거할 대상으로 취급하는 폭력적 성격을 가리키는 비평적 표현이다.
미국은 무차별 총기 살인 사건의 지옥
미국은 인간증오 심리가 만연한 사회의 끝이 어떠할지를 잘 보여준다.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총기 사망 문제가 가장 심각한 나라 중 하나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2023년 통계에 의하면 연간 총기 사망자가 4만 6728명(전체 총기 사망 중 자살이 약 58%)이고, 하루 평균 사망자가 약 128명으로 인구 10만 명당 사망자가 13.7명에 달한다. 2024년에 미국의 총기 사망자는 4만 4447명(총기 자살 2만 7593명으로 62.1%, 총기 살인 1만 5364명으로 34.6%, 사고·기타 1490명으로 3.4%)으로 약간 감소했지만, 총기 자살은 오히려 증가했다. 미국의 총기 사망은 2024년 기준으로도 매일 약 122명, 약 12분마다 1명이 사망하는 정도로 심각하다.
미국의 한 총기 판매소 내부, 연합뉴스 자료사진
2000년 이후 미국에서는 학교, 극장, 콘서트장, 쇼핑센터, 종교시설 등 일상의 공간에서 대규모 총기 살인 사건이 거듭 발생했다. 다음은 그 대표적인 사례들이다. 사망자 수는 가해자를 제외한 피해자 기준이며, 일부 사건은 후속 사망이나 집계 범위에 따라 수치가 달라질 수 있다.
- 2007년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 : 32명 사망
- 2012년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 교내에서 26명 사망. 범행 전 자택에서 살해된 가해자의 어머니까지 포함하면 피해자는 27명이다.
- 2012년 오로라 영화관 총기 난사 사건 : 12명 사망
- 2015년 샌버너디노 총기 난사 사건 : 14명 사망
- 2016년 올랜도 펄스 나이트클럽 총기 난사 사건 : 49명 사망
- 2017년 라스베이거스 음악축제 총기 난사 사건 : 후속 사망을 포함해 60명 사망
- 2017년 서덜랜드스프링스 교회 총기 난사 사건 : 태아 1명을 포함한 통상 집계로 26명 사망
- 2018년 파크랜드 고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 17명 사망
- 2018년 피츠버그 유대교 회당 총기 난사 사건 : 11명 사망
- 2019년 엘패소 월마트 총기 난사 사건 : 후속 사망을 포함해 23명 사망
- 2022년 버펄로 슈퍼마켓 총기 난사 사건 : 10명 사망
- 2022년 유밸디 초등학교 총기 난사 사건 : 21명 사망
- 2023년 루이스턴 총기 난사 사건 : 18명 사망
2018년 2월 15일 총기 난사 사건이 벌어진 미국 플로리다 파크랜드 스톤맨 더글러스 고교 사건 현장을 경찰이 경비하고 있다. 2018 2 15 EPA=연합뉴스
‘무차별’을 꿰는 하나의 코드 ‘인간증오’ 혹은 ‘인간혐오’
이 사건들을 모두 ‘무차별 범죄’로 묶는 것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특정 인종이나 종교 집단을 겨냥한 공격도 있고, 특정한 장소나 관계를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도 있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고 해서 공격 대상의 선택까지 무작위였던 것은 아니다. 범행 동기와 배경 역시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다. 인종적 증오나 극단주의 이념이 확인된 사건이 있는가 하면, 원한과 위기 경험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거나 동기가 충분히 밝혀지지 않은 사건도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점들을 인정하더라도 이 사건들은 인간, 타인의 생명을 가해자의 분노와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했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이것은 이 사건들이 인간증오 혹은 인간혐오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총기 사망 규모는 베트남전쟁의 미군 사망자 수와 비교하면 더욱 선명해진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이 제시한 베트남전쟁 관련 미군 사망 기록은 5만 8220명이며, 이 가운데 적대행위로 인한 사망은 4만 7434명이다. 2024년 미국의 연간 총기 사망자 4만 4447명을 기준으로 단순 환산하면, 약 1.31년, 곧 약 1년 4개월 동안 발생하는 총기 사망이 베트남전쟁 관련 미군 전체 사망자 5만 8220명과 맞먹는다. 다만 여기에는 총기 자살과 사고 등도 포함되어 있다.
총기 살인만으로 비교해보면, 연간 1만 5364명이라는 2024년 수치를 기준으로 할 때, 베트남전쟁 관련 미군 전체 사망자 5만 8220명에 해당하는 규모에 이르는 데에 약 3.79년이 걸린다. 비교 대상을 적대행위 사망자인 4만 7434명으로 좁히면 약 3.09년이다. 즉 전체 사망자와 비교하면 약 3년 9개월, 적대행위 사망자와 비교하면 약 3년 1개월이다. 2000년부터 2024년까지 미국의 누적 총기 사망자는 약 90만 명에 이른다. 베트남전쟁 관련 미군 전체 사망자 수의 약 15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규모다.(살인만이 아니라 자살과 사고 등을 포함한 수치) 이런 수치는 미국의 총기 사망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충격적인 총기살인 숫자를 두고 미국이 개인 간 내전 상태에 있다고 진단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은 무장집단 사이의 전쟁을 뜻하는 정치학적 정의가 아니라, 적대적 인간관계와 인간증오 심리로 인한 심리적 내전 상황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미국 부모 69% 자녀 학교에서 총격 사건 일어날까” 걱정
지난 미국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카멀라 해리스는 2024년 9월 4일 한 대선 유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부모들이 매일 자녀를 학교에 보내면서, 아이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걱정해야 한다는 사실은 정말 분노할 일입니다.”
해리스의 발언이 보여주듯, 무차별 총기 난사 사건이 끊이지 않는 미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녀나 자신이 총에 맞을까 봐 늘 불안해하며 살아가고 있다. 퓨리서치센터의 2022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 부모의 무려 69%가 자녀의 학교에서 총격 사건이 발생할 가능성을 어느 정도 이상 걱정한다고 응답했다.
총만 안 들었지…” 미국의 뒤따라가는 한국
과연 한국은 미국과 다를까? 한국에서도 미국처럼 총기를 쉽게 구할 수 있다면 총기 난사 사건이 빈발할까?”라고 물으면, 놀랍게도 상당수가 그럴 것 같다”고 대답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도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살인 사건이 여러 차례 발생했다. 다만 총기를 구하기 어려운 한국에서는 미국과 달리 칼과 같은 흉기, 방화, 차량 돌진 등이 주요 범행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2000년 이후 발생한 대표적인 사건과 범행 수단은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사망자 수다.
- 2003년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192명) : 방화
- 2008년 논현동 고시원 사건(6명) : 방화·흉기
- 2016년 강남역 화장실 살인 사건(1명) : 흉기
- 2019년 진주 아파트 방화·살인 사건(5명) : 방화·흉기
- 2023년 신림역 흉기 난동 사건(1명) : 흉기
- 2023년 서현역 흉기 난동 사건(2명) : 차량·흉기
경찰이 대구 지하철 참사로 200여명의 참사를 빚은 전동차를 경비하고 있다. 2003. 2. 19 연합뉴스
총기는 무차별 살인범죄를 시도하고 실행하기 쉽게 만든다. 흉기로 다수의 사람을 살상하려면 범죄자의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칼로 사람을 죽이는 데에는 큰 심리적 장벽도 따른다. 반면 총기가 있다면 체력이 약해도 범행이 가능하고, 사람을 죽이는 데 따르는 심리적 장벽도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서도 무차별 살인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역시 이미 미국과 같은 개인 간 내전 사회가 되었거나, 적어도 그 길로 나아가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처벌 강화는 진단도 제대로 못한채 내리는 사후약방문일 뿐
무차별 흉기난동과 같은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한국 사회는 대체로 범죄의 원인을 범죄적 성향이나 정신질환 등 범죄자 개인에게서 찾고, 그 해결책으로 처벌 강화를 제시해왔다. 그러나 다수의 연구는 사형이나 형량 가중이 추가적인 범죄억제 효과를 낸다는 확실한 증거가 부족하다고 보고한다. 한마디로 처벌을 강화해도 강력범죄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차별 살인이나 인간증오 범죄에서는 강한 처벌의 효과가 더욱 제한적이다. 무차별 총기 난사나 인간증오 범죄의 범인들은 범행 후 자살하거나 경찰에 의해 사살될 것을 예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범행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생존이나 처벌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다. 따라서 사형이나 무기징역의 위협도 일반적인 범죄자에게보다 효과가 작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 사회가 던져야 할 진정으로 중요한 질문은 무차별 살인자의 개인적 성향이나 심리에 관한 것이 아니다. 왜 인간증오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는가?”, 인간증오 심리를 강화하는 개인 간 내전 사회를 어떤 사회로,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가 그 질문이어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인류에게 끼친 가장 큰 해악은 무엇보다 개인 간 경쟁을 강요함으로써 인간관계를 파탄 내고 공동체를 파괴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웃과 타인을 경계하거나 적대시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 결과 인간증오 심리가 강화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개인 간 서열경쟁 과정에서 이웃과 타인을 공격하고 짓밟거나 그들로부터 공격당하거나 짓밟힌다. 서열경쟁에서의 승리를 뜻하는 내가 더 잘났어”, 내가 더 잘나가”를 확인하거나 과시하기 위해, 사람들은 타인에게 너는 나보다 못났어”, 곧 너는 나보다 서열이 낮아”라는 메시지를 보내며 그들의 인간적 존엄을 깔아뭉갠다. 이러한 서열경쟁 속에서 사람들은 거듭 상처를 주고받으며 인간증오 심리를 키워간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23주기인 18일 대구시 동구 용수동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에서 열린 추모식에서 한 유족이 헌화를 하다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고 있다. 2026.2.18
신자유주의 해악 제거하는 근본적 사회개혁이 해법
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치열한 개인 간 경쟁 사회,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오징어 게임’ 사회에서 살아온 사람들 중에는 인간관계에서 기쁨과 행복보다 슬픔과 불행을 경험한 이들이 훨씬 더 많다. 인간관계가 기쁨과 행복 대신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는 사회에서 인간증오 심리의 확산은 불가피하다. 오늘날 한국은 미국처럼 일상에서 생명의 위협을 걱정해야 하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칼에 맞을까 봐 걱정하며 거리를 걷고, 자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원하며 학교에 보내야 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것이다. 근본적인 사회개혁이 절실한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김태형 심리연구소 함께 소장 psythkim@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