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산의 단풍, 고까잎 으로 다듬어 보면 어떨까요 [뉴스] 우리말의 결을 살려 마음을 보듬는 ‘토박이말 결지기’입니다.
지난 스무사흗날(23일)은 서리가 내린다는 철마디(절기), 상강이었습니다. 저희 모임에서 만든 달력에는 ‘서릿날’이라고 먼저 적고 그 옆에 ‘상강’을 나란히 써 놓았답니다. 철마디의 이름을 우리말로 먼저 적어 보니 철의 모습이 한결 가까이 다가오는 듯했습니다.
이레끝(주말)에는 동무들 모임이 있어 원주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사는 진주보다 높아서 그런지 나무마다 벌써 붉고 노란 빛깔이 제법 짙게 들었더군요. 지리산에 첫눈이 내렸다는 기별도 들려왔지만, 눈앞에는 아직 가을이 곱게 남아 있었습니다.
가을 산을 물들이는 저 빛깔을 우리는 흔히 ‘단풍’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주 쓰는 ‘단풍’을 우리말로 다듬어 부를 수는 없을까요? 오늘은 가을 나뭇잎을 바라보며 떠올려 볼 만한 우리말 표현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단풍’이라는 익숙한 이름
‘단풍’은 한자말입니다. 한자로는 ‘붉을 단(丹) , 단풍 풍(楓’) 을 써, 붉은빛과 단풍나무를 가리키는 글자가 어우러져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단풍 은 가을에 나뭇잎이 붉거나 노랗게 물드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한편 ‘단풍’은 나무 이름으로도 쓰이지요.
그렇다면 나뭇잎이 물드는 모습을 나타낼 때 꼭 ‘단풍’이라는 말만 써야 할까요? 붉게 물든 잎, 노랗게 물든 잎, 여러 빛깔이 어우러진 잎을 가만히 바라보면 그 모습에 어울리는 우리말을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고까잎
알록달록한 아이 옷처럼, ‘고까잎’
저는 ‘단풍’을 우리말로 다듬어 보려는 뜻에서 ‘고까잎’이라는 말을 씁니다. 아이들이 알록달록하고 곱게 차려입는 옷을 ‘고까옷’이라고 부르듯, 가을에 여러 빛깔로 곱게 물든 잎을 ‘고까잎’이라고 해 보자는 것입니다.
저도 가을이 되면 이 말을 즐겨 쓰곤 합니다. 나뭇잎이 붉고 노랗게, 때로는 여러 빛깔로 어우러진 모습을 떠올리면 ‘고까잎’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는 분도 많으십니다. ‘단풍’을 우리말로 다듬어 보려는 말이니, 이미 널리 굳어진 낱말이라기보다는 새로운 표현으로 제안해 쓰는 말이라고 보는 것이 알맞겠습니다.
말은 사람들이 함께 쓰며 자리를 잡기도 하지만, 누군가 새로운 이름을 붙여 보는 데서 생각의 싹이 트기도 합니다. ‘고까잎’이라는 말을 만나면 가을 나뭇잎을 그저 ‘단풍’이라고 부르던 때와는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옛배움책에서 만난 ‘고운 잎’
옛날에 어린이들이 배우던 옛배춤책에서 ‘고운 잎’이라는 말을 본 적도 있습니다. 왜 ‘단풍’이라고 하지 않고 ‘고운 잎’이라고 했을까, 저는 그 까닭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마 어린아이들이 배우는 책이어서 어려울 수 있는 한자말 대신, 누구나 쉽게 뜻을 알 수 있는 말을 골랐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책을 만든 이들의 뜻을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니 제 생각일 뿐입니다. 그래도 ‘고운 잎’이라는 표현에는 아이들이 이미 알고 있는 쉬운 말로 자연의 모습을 알아차리게 하려는 마음이 담긴 듯했습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단풍’과 ‘ 고까잎 , 고운 잎’ 가운데 어떤 말이 뜻과 느낌을 더 쉽게 알아차리게 하는지 물어보았습니다. 몇몇 아이들을 빼고는 많은 아이들이 고까잎 , ‘고운 잎’이 더 쉽다고 했습니다. ‘단풍’은 익숙하게 들어 온 이름이지만, 고까잎 , ‘고운 잎’은 그 말만 들어도 무엇을 가리키는지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이런 경험을 하면서 쉬운 말이 지닌 힘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꼭 새로운 낱말을 만들어야만 우리말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말로 풀어 쓰는 것만으로도 뜻이 더 또렷해질 때가 있습니다. ‘고운 잎’과 ‘고까잎’은 서로 다른 길로 ‘단풍’을 우리말로 다듬어 보게 합니다.
‘단풍’을 버리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단풍’이라는 말을 쓰지 말자는 것은 아닙니다. 오랫동안 써 온 말에는 그 나름의 쓰임과 자리가 있습니다. 식물 이름이나 계절의 현상을 정확하게 가리켜야 할 때는 ‘단풍’이라는 말을 쓰면 됩니다.
다만 어린이에게 가을 바람빛(풍경)을 들려주거나 식구들과 가을 길을 걸으며 나뭇잎의 빛깔을 이야기할 때는 ‘고운 잎’이라고 말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 토박이말 이름을 새로 불러 보고 싶다면 ‘고까잎’이라고 불러 볼 수도 있겠지요. ‘단풍’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뜻이 잘 드러나는 우리말 표현을 곁들이는 것입니다.
말을 하나 더 안다는 것은 표현할 수 있는 길이 하나 더 생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단풍’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 ‘고운 잎’과 ‘고까잎’도 함께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가을의 모습을 조금 더 여러 가지 빛깔로 말하고 글로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나뭇잎을 다시 바라보며
가을 메(산)를 붉고 노랗게 물들이는 나뭇잎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늦추고 그 빛깔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러고는 익숙한 ‘단풍’이라는 말에 더해 ‘고운 잎’이라는 이름도 떠올리고, ‘고까잎’이라는 말로 다듬어 불러 보면 어떨까요?
말을 다듬는 일은 익숙한 이름을 밀어내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진 말을 더 넓게 살피고, 누구나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을 함께 찾아가는 일입니다. 가을 나뭇잎을 바라보며 우리말로 다듬어 부를 수 있는 이름도 함께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마음 나누기]
여러분은 가을에 붉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보며 어떤 이름을 떠올리시나요? ‘단풍’을 우리말로 다듬어 ‘고운 잎’이나 ‘고까잎’이라고 불러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한 줄 생각]
익숙한 이름 곁에 우리말 표현을 하나 더 놓으면, 가을을 바라보고 말하는 길도 한결 넓어집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 고까잎
뜻: ‘단풍’을 우리말로 다듬어 본 말
비슷한 표현: 고운 잎
보기: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붉고 노랗게 물든 고까잎이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렸다.”
오늘 한마디: 올가을에는 곱게 물든 고까잎을 바라보며 가을의 빛깔을 느껴 보세요.”
[토박이말 길잡이] 결지기 이창수
이창수 시민기자 maljig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