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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대한민국, 어떻게 전기국가 건설자가 될 수 있나

대한민국, 어떻게 전기국가 건설자가 될 수 있나
[뉴스]
지난번에 를 쓴 뒤로 전기국가에 관한 자세한 글을 한번 더 써야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신문 칼럼이라 분량이 제한된 탓에 몹시 압축해서 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런던의 권위있는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가 아주 맞춤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 내 생각과 아주 비슷한데다 내용도 충실하다. 그래서 보고서도 소개할 겸, 매우 길지만 그만큼 꼼꼼하게 전기국가에 관해 정리했다. 전기국가가 무엇인지, 어떤 것들로 구성돼 있는지, 그래서 우리는 뭘하면 되는지를 담았다. 이 글을 읽고 전기국가에 관한 구체적인 이미지를 갖게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2026년 9월 16일, 런던의 에너지 싱크탱크 엠버(Ember)가 한 편의 보고서를 내놓았다. 제목은 . Power는 전력이면서 동시에 권력이다. 중의적이다. 전기를 가진 자가 힘을 갖는다는 것. 석탄국가, 석유국가에 이어 전기국가의 시대라는 것이다. 엠버는 국제에너지기구(IEA), 유럽연합(EU), 유엔(UN) 산하 기관 등 주요 공공 기구가 전력 전환 추이를 논의할 때 엠버의 통계를 주요 참고 자료로 인용할 만큼, 글로벌 전력 데이터와 에너지 전환 분야에서 높은 공신력을 인정받고 있는 독립 싱크탱크다. 앞의 글에서 쓴 것처럼 전기는 에너지이면서 동시에 정보의 매체다. 에너지는 일을 하고, 정보는 그 일을 지휘한다. 엠버에 따르면 세계의 정보 저장과 통신은 이미 99% 이상이 디지털, 곧 전자 위에서 이루어진다. 정보와 에너지가 같은 전자 위에서 만난다. 엠버는 이것을 전자를 지배하는 경쟁 이라 불렀다. 유효 에너지로 읽어야 한다 석탄, 석유, 가스의 양을 더하면 세계 1차 에너지 공급의 80%는 여전히 화석연료다. 화석연료의 시대는 끄떡없어 보인다. 그런데 발전소와 엔진과 보일러에서 열로 새어나가는 손실을 모두 빼고, 실제로 바퀴를 굴리고 물을 데우고 모터를 돌리는 데 쓰인 에너지만 보면 셈이 달라진다. 이것을 유효 에너지 라고 한다. 유효에너지는 얼마나 될까?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엠버가 계산한 결과는 이러하다. 2023년 인류가 쓴 1차 에너지는 약 590엑사줄(Exajoule)이었지만, 그 가운데 실제로 일을 한 유효 에너지는 209엑사줄, 3분의 1에 불과했다. 3분의2, 약 380엑사줄이 열로 흩어져 사라졌다. (*줄(Joule)은 에너지의 단위다. 1엑사줄은 약 2,778억 킬로와트시(kWh)로 한국 전체가 반년 동안 사용하는 총 전력량과 비슷하다.) 자동차를 보면 이 차이가 선명해진다. 미국 에너지부가 운영하는 연비 정보 사이트에 따르면, 휘발유 자동차는 연료탱크에 넣은 에너지 가운데 12~30%만 바퀴를 굴리는 데 쓴다. 나머지는 엔진의 열, 배기가스, 공회전으로 버려진다. 엔진에서만 64~75%가 손실된다. 휘발유 100을 넣으면 바퀴에 닿는 것은 20 안팎이라는 얘기다. 반면 전기자동차는 전력망에서 받은 전기 에너지의 77% 이상을 바퀴까지 보낸다. 전기 구동계의 손실은 15~20%에 그친다. 브레이크를 밟을 때 버려지던 에너지는 회생제동으로 되살리고, 신호 대기 중에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같은 100을 넣었을 때 바퀴에 닿는 것이 20과 77, 네 배 가까운 차이다. 이것은 기술의 성숙도 문제가 아니라 물리의 문제다. 석유와 가스와 석탄은 분자다. 분자에 담긴 에너지를 꺼내려면 태워야 하는데, 태우면 열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그 열을 다시 움직임으로 바꿔야 한다. 물을 데워 증기를 만들고, 그 증기로 터빈을 돌려야 한다. 그 사이에도 열은 쉬지 않고 사라진다. 전기는 다르다. 전자가 도선을 따라 흐르며 모터를 곧바로 돌린다. 엠버의 계산으로 세계 평균을 내면, 전기는 최종 에너지를 일로 바꿀 때 68%의 효율을 내지만 화석연료는 29%에 그친다. 전기 모터 자체의 효율은 90%를 넘는다. 냉난방에서는 차이가 더 벌어진다. 히트펌프는 전기 1을 넣어 열 3~4를 옮겨온다. 효율이 300~400%다.   서울시내 전기차 충전소 모습. 2026.9.22. 연합뉴스 지금까지는 주로 석유와 석탄, 가스를 돌려 전기를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효율이 비슷해 졌다. 화석연료로 만든 전기로 달리는 전기차의 효율은 그저 휘발유차와 비슷하거나 조금 낫다. 그런데 태양광과 풍력과 수력은 태우지 않고 곧바로 전기를 만든다. 송배전 손실까지 따져도 92%의 효율로 전기를 소비자에게 보낸다. 재생에너지를 쓰면 태양광으로 생산한 전기 100이 바퀴에서 70 안팎이 된다. 휘발유 100이 바퀴에서 20 안팎이 되는 것과 비교하면 세 배가 넘는다. 이 눈으로 다시 보면 풍경이 바뀐다. 소비자에게 전달되는 최종 에너지 기준으로 전기는 아직 4분의 1 정도다. 2023년 기준 전기가 91엑사줄, 태우는 연료가 296엑사줄이었다. 그런데 실제로 일을 한 유효 에너지 기준으로 보면 전기는 약 3분의 1을 차지한다. 엠버의 분석으로는 이미 2007년, 전기가 석유를 제치고 인류에게 가장 많은 유효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이 됐다. 움직임과 동력만 따로 떼면 더 분명하다. 2023년 세계의 유효한 일 가운데 53%를 이미 전기가 했고, 2019년부터 2023년 사이 늘어난 일의 80%를 전기가 맡았다. 석탄과 석유의 시대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물량으로만 세상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유효 에너지로 보면 전기의 시대는 이미 20년 전에 시작됐다. 재생에너지가 전기를 싸게 만들었고, 디지털과 AI가 전기를 똑똑하게 만들었고, 배터리가 전기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다. 전기국가의 시간이다. 같은 부품, 같은 곡선 엠버의 논증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에너지로서의 전기와 데이터의 전달매체로서의 전기가 같은 부품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칩, 배터리, 전력전자, 모터, 센서. 이 다섯 가지가 스마트폰에도, AI 서버에도, 전기차에도, 태양광 발전소에도, 히트펌프에도 들어간다. 그러니 학습곡선은 가속한다. 스마트폰이 배터리를 전기차에 쓸 만큼 싸게 만들면, 전기차가 배터리를 전력망에 쓸 만큼 싸게 만든다. 이 다섯 부품의 합산 비용은 1990년 이후 99% 떨어졌다. 라이트의 법칙이 양쪽에서 동시에, 서로를 밀어주며 작동하고 있다. 둘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AI의 한계는 점점 전기의 문제가 된다. 전력이 부족하고, 계통 연결을 기다려야 하고, 데이터센터가 커질수록 전력망이 감당하지 못한다. 반대로 전기기술의 한계는 점점 더 조율의 문제가 된다. 들쭉날쭉한 태양광과 풍력을 고르게 만들고, 놀고 있는 수요를 옮기고, 활용되지 못하는 전력망을 최적화해야 한다. 이것은 정보기술이 해결할 일이다. AI는 전기를 원하고, 전기는 AI가 필요하다. 최초의 전기국가, 중국 문제는 둘을 다 갖춘 나라가 드물다는 것이다. 미국은 AI에서 앞서지만 전기기술에서 뒤처져 있다. 유럽은 재생에너지에서 앞서지만 전기화가 느리고 AI는 거의 없다. 둘을 동시에 밀어붙이는 거의 유일한 예외가 중국이다. 중국은 2010년 이후 전력 공급을 두 배 이상 늘렸고, 신차 판매에서 전기차 비중을 0에서 60%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며, 세계 최대의 로봇 보유국이자 두 번째로 큰 AI 데이터센터 보유국이 됐다. 지정학도 바뀐다. 석탄의 시대에도, 석유의 시대에도 힘은 땅 밑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발견된 석유와 가스의 73%를 단 10개 나라가 쥐고 있다. 반면 세계 인구의 97%는 태양광과 풍력 잠재량이 현재 전력 수요의 10배가 넘는 곳에서 산다. 에너지의 원천이 더이상 희소하지 않은 것이다. 페트로달러의 황혼은 이 거대한 이동의 한 장면이다. 엠버의 보고서에서는 재생에너지를 짓는 동시에 경제 전체를 전기화하는 나라를 Electrostate builders , 곧 전기국가 건설자라고 부른다. 보고서의 수석 저자 대안 발터(Daan Walter)는 이렇게 말했다. 전자는 이제 행동과 지능 모두의 최전선이다. 두 혁명 중 하나가 아니라 둘을 함께 활용하는 경제가 힘의 시대를 이끌 것이다. 한국이 서 있는 자리 한국은 이 지도에서 특별한 자리에 있다. 엠버는 정보기술 하드웨어 제조의 81%, 전기기술 하드웨어 제조의 76%가 중국, 대만, 한국, 일본이 있는 동아시아에 몰려 있다고 분석한다. 한국은 양쪽의 부품을 모두 만드는 극소수 나라 가운데 하나다. 반도체를 만들고, 배터리를 만들고, 전선과 변압기를 만든다. 그렇다고 저절로 기회가 되지는 않는다. 엠버는 이 시대의 역설을 지적한다. 에너지와 지능의 사용은 수십억 명에게 민주화되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산은 소수의 공장과 소수의 지역에 집중된다. 그래서 엠버는 각국에 두 가지를 권한다. 주권을 지킬 만큼은 전기기술 스택 전체를 확보하라. 그리고 한두 개의 지점에서는 지배적 지위를 노려 협상력을 가져라. 보고서의 공동 저자 킹스밀 본드(Kingsmill Bond)의 말로 하면, 모든 나라는 전기 비용을 낮추고, 사람들이 전기기술과 정보기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정책을 다시 짜고, 새로운 체계 안에서 번성할 수 있는 틈새를 찾아야 한다. 그 길로 어떻게 갈 수 있을지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부품부터. 전기국가는 구체적으로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회전기에서 반도체로 지난 100년 동안 전기는 거대한 쇠붙이가 돌면서 만들어졌다. 석탄을 태우든, 가스를 태우든, 원자를 쪼개든, 물을 떨어뜨리든, 결국 하는 일은 같다. 수백 톤짜리 회전체가 쉬지 않고 돌며 1초에 60번 주기로 방향을 바꾸는 교류를 만들어낸다. 이 거대한 회전체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무겁게 돌고 있기 때문에 바로 멈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관성을 갖는다. 어딘가에서 발전소가 갑자기 멈춰도, 전력망 전체에 매달린 수많은 회전체의 관성이 그 충격을 흡수한다. 전력망의 자연스런 완충장치다. 직류와 교류전기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직류와 교류다. 직류는 한 방향으로 곧게 흐른다. 건전지를 생각하면 된다. 플러스 극에서 나온 전기가 한 방향으로만, 일정한 세기로 흐른다. 배터리가 직류고, 태양광 패널이 만드는 전기도 직류다. 교류는 방향을 계속 바꾸며 흐른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세졌다가 약해진다. 한국의 전기는 이 파도가 1초에 60번 오르내린다. 60헤르츠다. 발전소의 거대한 발전기가 돌면서 만드는 것이 바로 이 파도다. 자석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전기의 방향이 한 번 바뀌었다가 돌아온다. 우리 집 콘센트로 들어오는 전기도 교류다. 왜 교류로 보내는가 전선을 흐르는 전류가 커지면 전선의 저항 때문에 열이 난다. 에너지가 샌다는 얘기다. 전선에서 생기는 열손실은 ‘전류² × 저항’이다. 전류의 제곱에 비례한다. 전류가 두 배면 열손실은 네 배가 된다. 그런데 전력은 전류 × 전압이므로, 같은 크기 전력을 보낼 때 전압을 높이면 전류를 낮춰도 된다. 먼 거리로 전기를 보낼 때 높은 전압을 쓰는 이유다. 전압을 높였다 낮췄다 하는 장치가 변압기다. 교류는 전류의 크기와 방향이 계속 바뀌며 변화하는 자기장을 만들고, 변압기는 그 자기장의 변화를 통해 다른 코일에 전압을 유도한다. 직류는 자기장이 변하지 않으므로 전자기유도를 할 수 없고, 같은 방식으로 전압을 바꿀 순 없다. 19세기 말 에디슨의 직류와 테슬라, 웨스팅하우스의 교류가 맞붙은 전류전쟁 에서 교류가 이긴 이유가 이것이다. 교류는 변압기로 전압을 쉽게 올려 전기를 멀리 보내고, 쓰는 곳 가까이에서 다시 낮출 수 있다. 20세기의 전력망은 그렇게 교류로 만들어졌다. 한국의 발전소에서 나온 전기도 15만 4천 볼트, 34만 5천 볼트, 그리고 2002년부터는 76만 5천 볼트까지 높여져 송전탑을 타고 달린 뒤, 변전소를 거칠 때마다 전압이 낮아져 이윽고 우리 집 콘센트에서 220볼트가 된다. 직류의 귀환 문제는 새로운 전기들이 모두 직류라는 데 있다. 태양광 패널은 돌지 않는다. 햇빛을 받으면 반도체 안에서 전자가 움직이고, 그대로 직류가 나온다. 배터리도 마찬가지다. 직류로 전기를 저장하고 직류로 내놓는다. 이 직류를 교류 전력망에 보내려면 누군가 직류를 교류로 바꿔줘야 한다. 그 번역기가 인버터다. 쓰는 쪽도 마찬가지다.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데이터센터 서버의 전자회로도, LED 조명도 직류를 쓴다. 그래서 반대 방향의 번역기도 필요하다.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컨버터다. 우리는 매일 그것을 쓴다. 휴대폰 충전기가 그것이다. 콘센트의 220볼트 교류를 휴대폰 배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낮은 전압의 직류로 바꿔준다. 전기차 충전기도, 노트북 어댑터도, 데이터센터의 전원장치도 모두 같은 일을 한다. 교류의 전력망과 직류의 기계들 사이, 그 경계마다 번역기가 서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20일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울산 인공지능(AI) 데이터 센터 출범식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기념 세리머니에 참여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최민희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이 대통령, 아마존웹서비스(AWS) 프라사드 칼야나라만 인프라 총괄 대표, 유상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김두겸 울산광역시장. 2025.6.20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연합뉴스 가장 극적인 직류의 섬은 AI 데이터센터다. 데이터센터에서 전기는 어떤 길을 거쳐 칩에 닿을까. 엔비디아의 설명을 들어보자. 전력망에서 데이터센터로 들어오는 전기는 수만 볼트의 교류다. 변압기가 이것을 415볼트 교류로 낮춘다. 다음은 무정전전원장치(UPS)다. 정전에 대비해 배터리를 물려두는 장치인데, 배터리는 직류이므로 대개 교류를 직류로 바꿨다가 다시 교류로 되돌려 내보낸다. 이렇게 나온 교류가 전선을 타고 서버실을 지나 랙까지 간다. 랙 안에서는 전원공급장치가 다시 교류를 54볼트 직류로 바꾸고, 이것을 12볼트로, 마지막에는 칩이 쓰는 1볼트 안팎의 전압으로 한 번 더 낮춘다. 교류에서 직류로, 직류에서 교류로, 다시 직류로. 한 번 바꿀 때마다 몇 퍼센트씩 전기가 열로 새어나가고, 그 열을 식히는 데 또 전기가 든다. 변환 장치 하나하나가 고장 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랙 하나가 수 킬로와트를 먹던 시절에는 이 정도 손실은 감수할 만했다. 이제 사정이 다르다. 구글은 머신러닝용 랙 하나가 2030년 이전에 500킬로와트를 넘을 것으로 보고, 엔비디아는 2027년부터 1메가와트급 랙을 전제로 설계하고 있다. 랙 하나가 작은 공장 하나만큼 전기를 먹는다. 이 규모에서 기존 방식은 세 군데서 벽에 부딪힌다. 엔비디아의 설명은 구체적이다. 첫째는 구리다. 54볼트라는 낮은 전압으로 1메가와트를 보내려면 전류가 엄청나게 커져야 하고, 그만큼 굵은 구리가 필요하다. 엔비디아는 1메가와트 랙 하나에 최대 200kg의 구리 막대가 들어가고, 1기가와트급 데이터센터라면 랙 안의 구리만 최대 200톤에 이른다고 계산한다. 둘째는 공간이다. 지금의 엔비디아 GB200 NVL72 랙에는 전원 장치 선반이 최대 여덟 개 들어간다. 같은 방식으로 메가와트급 랙을 만들면 전원 장치가 랙의 높이를 거의 다 차지해 정작 GPU를 넣을 자리가 없어진다. 셋째는 변환 손실이다. 앞서 본 대로 전기가 칩에 닿기까지 여러 번 모양을 바꾸며 매번 조금씩 새어나간다. 엔비디아의 답은 800볼트 직류다. 데이터센터 입구에서 1만 3,800볼트 교류를 단 한 번에 800볼트 직류로 바꾸고, 그 직류를 서버실을 지나 랙까지 그대로 보낸다. 랙 안에서는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전원공급장치가 사라지고, 직류의 전압을 낮추는 장치만 남는다. 엔비디아가 제시하는 효과는 이렇다. 같은 굵기의 도체로 415볼트 교류보다 85% 더 많은 전력을 보낼 수 있고, 구리는 45% 덜 든다. 교류에만 있는 손실, 전류가 전선 표면으로 몰리는 현상이나 무효전력 손실도 사라진다. 전체 효율은 최대 5% 좋아지고, 고장 나는 전원공급장치가 줄어 유지보수 비용은 최대 70% 줄며, 총소유비용은 최대 30%까지 낮출 수 있다고 엔비디아는 말한다. 5%가 작아 보일 수 있지만 1기가와트 데이터센터라면 50메가와트, 웬만한 발전소 한 기의 일부를 통째로 아끼는 셈이다. 엔비디아는 800볼트 직류 데이터센터의 본격 양산을 2027년 차세대 랙 시스템 카이버(Kyber) 의 출시와 맞춘다는 계획이다. 구글은 조금 다른 길로, 그러나 같은 방향을 가고 있다. 구글은 약 10년 전 랙 안의 전압을 12볼트에서 48볼트로 올리자고 업계를 이끌었고, 그 구조로 랙 하나의 전력을 10킬로와트에서 100킬로와트까지 키웠다. 그리고 2025년 4월, 다음 단계로 ±400볼트 직류를 내놓았다. 플러스 400볼트와 마이너스 400볼트, 두 극 사이의 차이는 800볼트다. 이것으로 랙 하나를 1메가와트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구글은 밝혔다. 구글이 400볼트를 고른 이유가 흥미롭다. 전기차 때문이다. 400볼트는 전기차 배터리가 널리 쓰는 전압이다. 구글은 이 전압을 택하면 전기차 산업이 이미 만들어놓은 공급망을 그대로 쓸 수 있어 규모의 경제와 품질을 함께 얻는다고 설명한다. 스마트폰이 배터리를 전기차에 쓸 만큼 싸게 만들었고, 전기차가 다시 그것을 전력망에 쓸 만큼 싸게 만들었다는 흐름이 여기서 한 번 더 이어진다. 전기차가 AI 데이터센터의 전원 장치를 싸게 만든다. 구글은 이 작업을 경쟁사인 메타,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마운트 디아블로(Mt Diablo) 라는 이름으로 오픈컴퓨트프로젝트에서 표준화하고 있다. 첫 결과물은 전원 장치와 백업 배터리를 서버 랙 밖으로 빼내 옆에 따로 세운 사이드카 전원 랙이다. 교류를 직류로 바꾸는 일을 이 옆 랙이 전담하고, 서버 랙은 온전히 칩으로만 채운다. 구글은 이것만으로 전체 효율이 약 3% 좋아진다고 밝혔고, 장기적으로는 더 높은 전압의 직류를 데이터센터 전체에 직접 배전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025년 10월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체변압기(반도체 스위치로 전압과 전력의 흐름을 제어하는 차세대 변압 시스템)와 저전압 직류를 결합한 구조, 그리고 데이터센터가 배터리와 마이크로그리드를 통해 전력망에서 전기를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전력망에 전기를 공급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두 계획은 결국 하나로 모이고 있다. 엔비디아는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 함께 오픈컴퓨트프로젝트를 통해 공동 백서와 저전압 직류 고체변압기 사양을 공개했고, 80개가 넘는 장비·인프라 기업이 이 사양에 맞춰 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밝혔다. 서로 다른 회사의 장비가 같은 직류 데이터센터 안에서 함께 작동하도록 인터페이스를 맞추는 작업이다. 마지막 대목에 주목하자. 구글이 말한 데이터센터는 더 이상 전기를 먹기만 하는 거대한 부하가 아니다. 배터리를 품고, 직류로 움직이고, 필요할 때 전력망을 거드는 하나의 거대한 직류의 섬이다. 이 섬과 교류의 바다가 만나는 경계에도 역시 전력전자가 서 있다. 그리고 그 전력전자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 실리콘카바이드(SiC)와 질화갈륨(GaN) 같은 차세대 전력반도체다. 그러므로 직류의 시대는 전력반도체의 시대이기도 하다. 직류의 고속도로 초고압직류송전 섬과 섬 사이, 먼 거리를 잇는 길도 직류가 된다. 초고압직류송전, HVDC(High-Voltage Direct Current)다. 앞에서 교류가 전류전쟁에서 이긴 이유를 변압기에서 찾았다. 그런데 교류에는 태생적인 약점이 있다. 1초에 60번씩 방향을 바꾸며 출렁이기 때문에, 전선과 그 주변이 이 출렁임에 반응하며 에너지를 잡아먹는다. 전류가 전선의 표면으로만 몰려 흐르는 현상이 생기고, 실제로 일을 하지 않고 전선 안을 오가기만 하는 무효전력 도 생긴다. 짧은 거리에서는 대수롭지 않지만 거리가 길어질수록 이 손실이 쌓인다. 바다 밑에서는 문제가 훨씬 심각해진다. 해저케이블은 물을 막는 금속 피복과, 닻이나 어망에 견디도록 감은 강철 외장으로 겹겹이 싸여 있다. 게다가 그 바깥은 전기가 통하는 바닷물이다. 이 구조에서 교류는 두 번 손해를 본다. 전기가 통하는 구리와 바깥 금속 사이에 절연체가 끼어 있는 모양은 전기를 잠깐 담아두는 축전기와 똑같다. 교류는 1초에 60번 방향을 바꾸니, 케이블은 이 거대한 축전기를 쉬지 않고 채웠다 비웠다 해야 한다. 케이블이 길수록 여기에 드는 전류가 커지고, 그만큼 보낼 수 있는 전력이 줄어든다. 전류가 흐르면 전선 주위에 자기장이 생기는데, 이 자기장도 1초에 60번씩 출렁이고, 출렁이는 자기장은 근처의 금속에 원치 않는 전류를 일으키다. 변압기가 작동하는 바로 그 원리다. 이 전류가 케이블을 감싼 금속과 바닷물 속에서 열이 되어 바다로 흩어진다. 케이블이 스스로를 충전하느라 용량을 잃고, 스스로를 감싼 금속을 데우느라 에너지를 잃는 것이다. 직류에서는 장이 멈춰 있으니 이런 손실을 피할 수 있다.    제주시 삼양일동 한전 동제주변환소에서 완도-동제주 초고압직류송전(HVDC) 건설사업 준공식이 열린 가운데 주요 인사들이 전력 변환시설을 둘러보고 있다. 2024.12.6. 연합뉴스 게다가 요즘의 HVDC는 전력반도체로 움직인다. 이른바 전압형 HVDC다. 한쪽 끝에서 교류를 직류로 바꾸고, 반대쪽 끝에서 다시 교류로 바꾸는 거대한 변환기가 모두 반도체 스위치로 만들어진다. 앞에서 본 인버터를 수천 배로 키워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반도체로 움직이니 전력이 얼마나, 어느 방향으로 흐를지를 순식간에 조절할 수 있다. 바람과 햇빛에 따라 출렁이는 재생에너지를 전력망에 붙이기에 유리한 이유다. HVDC는 그저 굵은 전선이 아니다. 소프트웨어로 제어되는 전력의 고속도로다. 비싼 톨게이트그렇다면 왜 모든 송전을 직류로 하지 않을까. 양쪽 끝의 변환소가 비싸기 때문이다. 연구 문헌들이 추정하는 대용량 변환소 한 곳의 비용은 2억에서 3억 5천만 유로 수준이다. 우리 돈으로 수천억 원이다. 한쪽 끝에 하나, 반대쪽 끝에 하나, 적어도 두 개가 필요하다. 변환 과정에서 생기는 손실도 있다. 그래서 HVDC는 고속도로의 톨게이트와 비슷하다. 입구와 출구에서 비싼 통행료를 내지만, 일단 올라타면 1킬로미터당 비용은 교류보다 싸다. 거리가 짧으면 톨게이트 비용을 뽑지 못하고, 거리가 길어질수록 직류가 유리해진다. 두 곡선이 만나는 지점, 곧 직류의 경제성이 생기기 시작하는 거리를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렇게 본다. 땅 위의 가공선은 300에서 800킬로미터. 바다 밑이나 땅속의 케이블은 50에서 100킬로미터. 바닷속 케이블의 손익분기 거리가 훨씬 짧은 것은 앞서 말한 사정 때문이다. 바다를 건너는 긴 송전선이 거의 예외 없이 직류인 이유다. 노르웨이와 독일을 잇는 약 600킬로미터의 해저 HVDC 노드링크 가 대표적이다. 여기서 한국의 사정이 흥미로워진다. 한반도는 좁다. 호남에서 수도권까지 땅 위로 송전선을 놓는다면 거리가 짧아 직류의 경제성이 잘 나오지 않는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한국전력이 추진하는 서해안 HVDC 에너지 고속도로 는 525킬로볼트, 2기가와트 규모의 해저 송전선로 네 개를 2030년부터 2038년까지 단계적으로 까는 사업이다. 전체 길이는 1,070킬로미터, 전송 용량은 모두 8기가와트, 사업비는 12조 2천억 원으로 추산된다. 첫 구간은 전북 새만금에서 경기 화성의 서화성까지 약 220킬로미터로, 당초 계획보다 1년 앞당긴 2030년 완공이 목표다. 한전은 2026년 초 경제성과 시공성, 에너지 안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 전력망을 해저로 건설하기로 최종 결정했고, 8개 변환소의 부지 선정도 마쳤다. 220킬로미터의 해저 구간은 케이블의 손익분기 거리를 훌쩍 넘는다. 바다로 가는 순간, 직류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 된다. 바다를 택한 데에는 경제성 말고도 이유가 있다. 한국은 오랫동안 송전선을 놓는 일 자체가 가장 어려운 나라였다. 수백 개의 송전탑이 마을과 산을 가로지를 때마다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고, 한 노선을 놓는 데 10년 넘게 걸리기도 했다. 전기신문은 서해안 HVDC가 주민수용성 문제로 지연돼온 기존 가공 송전망 일부를 해저로 대체하는 사업이라고 설명한다. 바다 밑으로 가면 송전탑이 마을을 지나지 않는다.    22일 서울 양천구 한국방송회관에서 열린 12차 전력수급기본계획 대국민 정책 토론회에서 수요계획소위원회 위원장인 허진 이화여대 교수가 수요전망 종합발표를 하고 있다. 2026.4.22 연합뉴스 왜 전기국가의 필수 조건인가 한국이 전기국가 건설자가 되려면 HVDC가 필수적인 이유는 세 가지다. 첫째, 전기를 만드는 곳과 쓰는 곳이 다르다. 재생에너지를 대규모로 지을 수 있는 햇빛과 바람과 바다는 호남과 서해안에 있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와 인구는 수도권에 몰려 있다. 한국은 재생에너지를 짓는 일과, 경제 전체를 전기화하는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데, 그 둘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둘을 잇는 선이 없으면 호남의 태양광은 출력을 줄여야 하고, 수도권의 공장은 여전히 화석연료 발전소에 기대야 한다. 전선이 병목이다. 둘째, 한국의 전력망은 섬이다. 한국은 이웃 나라와 전력망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유럽처럼 바람이 적은 날 옆 나라에서 전기를 끌어오는 식의 완충이 없다. 흔들리는 재생에너지를 한 나라 안에서 받아내야 한다. 전력의 흐름을 반도체로 정밀하게 조절할 수 있는 전압형 HVDC가 계통을 안정시키는 핵심 수단이 되는 이유다. 셋째, 산업이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에 필요한 설비는 크게 해저케이블과 변환설비다. 케이블은 LS전선과 대한전선 같은 한국 기업들이 이미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고 있다. 문제는 변환설비다. 기가와트급 전압형 HVDC 변환설비는 히타치에너지, 지멘스에너지, GE버노바 같은 소수의 해외 기업이 공급을 주도하고, 공급이 부족해 제때 들여오기도 어렵다. 한전은 새만금–서화성 구간을 국산 대용량 전압형 HVDC 기자재의 첫 실증 무대 삼기로 했다. 교류와 직류를 바꾸는 밸브, 이를 운용하는 제어기, 변환용 변압기가 그 대상이다. 효성중공업은 2024년 국내 최초로 독자 개발한 전압형 HVDC 시스템을 양주변전소에 공급했다. 정부는 2030년까지 대용량 전압형 HVDC 기술 개발과 실증을 마치고, 2030년대에는 수출 산업으로 키워 세계 3위권에 들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HVDC는 한국이 지배적 위치를 노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후보 가운데 하나다. 해상풍력이 늘고, 대륙과 섬과 나라를 잇는 해저 전력망이 늘어날수록 세계는 더 많은 HVDC를 필요로 한다. 국내에서 1,070킬로미터를 깔며 쌓은 기술과 실적은 그대로 수출의 이력서가 된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전기를 나르는 길이면서, 한국 전력산업이 세계로 나가는 길이다. 전력망의 말단신경, 인버터 이제 전력망의 그림이 달라진다. 교류라는 바다가 있고, 그 위에 태양광과 배터리와 전기차와 데이터센터라는 직류의 섬들이 있다. 멀리 떨어진 곳을 HVDC라는 직류의 길이 잇는다. 바다와 섬이 만나는 곳마다 인버터와 컨버터가 서 있고, 바다와 길이 만나는 곳마다 거대한 변환소가 서 있다. 직류의 시간은 곧 전력전자의 시간이다. 인버터는 어떻게 한 방향으로 흐르는 직류를 파도치는 교류로 바꿀까. 비밀은 스위치에 있다. 인버터 안에는 반도체로 만든 아주 빠른 스위치가 있다. 이 스위치가 1초에 수천에서 수만 번 전기를 켰다 껐다 한다. 파도의 꼭대기를 만들어야 할 때는 오래 켜두고, 파도가 낮아지는 곳에서는 잠깐만 켠다. 방향을 바꿔야 할 때는 반대쪽 스위치를 켠다. 이렇게 잘게 썬 전기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멀리서 보면 매끄러운 교류의 파도가 된다. 사람이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도체칩이 한다. 게다가 파도를 아무렇게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 전력망에 이미 흐르고 있는 파도를 읽고, 박자와 높이를 정확히 맞춰줘야 한다. 그래서 인버터 안의 칩은 매 순간 전력망의 전압과 주파수를 재고, 자기가 내보내는 전류를 재고, 계산하고, 다음 스위칭을 결정한다. 이 문장에 인버터가 스마트 그리드의 핵심이 되는 이유가 모두 들어 있다. 인버터는 한 몸에 세 가지를 갖고 있다. 전압과 전류와 주파수를 재는 눈, 그 값을 계산해 판단하는 머리, 그리고 실제로 전기를 움직이는 손이다. 여기에 대부분 통신 기능이 달려 있어 바깥과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코리아 스마트그리드 엑스포 2026 알렉스 코리아 2026’에서 방문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2026.2.4. 연합뉴스 스마트 그리드란 결국 수백만 개의 발전기와 배터리와 충전기에게 말을 거는 전력망이다. 지금 전기가 남으니 출력을 줄여라. 이 동네 전압이 떨어지니 받쳐라. 주파수가 흔들리니 버텨라. 중앙의 AI가 아무리 똑똑한 판단을 내려도, 그 판단을 받아 1,000분의 1초 단위로 실행하는 것은 현장의 인버터다. 가상발전소의 명령도, 출력 제어도, 전압 조정도 마지막 순간에는 모두 인버터의 스위칭으로 바뀐다. 통신망의 끝에 스마트폰이 있다면, 전력망의 끝에는 인버터가 있다. 스마트 그리드의 말단 신경이자 손발이다. 인버터는 동시에 전력망에서 가장 촘촘한 관측소다. 태양광 발전량, 전압과 주파수, 배터리의 충전 상태가 매 순간 인버터를 거치며 기록된다. 앞 글에서 읽을 수 있으면 분석할 수 있다 라고 했다. 전력망의 가장자리에서 그 읽는 일을 하는 것이 인버터다. 그래서 생길 수 있는 무서운 일이 있다. 인버터에게 명령할 수 있는 자가 전력망의 끝단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2024년 11월 15일2024년 11월 15일 아침, 미국과 영국, 파키스탄 등지에서 중국 인버터 제조사 데예(Deye)의 인버터들이 일제히 멈췄다. 화면에는 이 인버터는 파키스탄, 미국, 영국에서 사용이 허가되지 않았다. 공급처에 반품하라 라는 메시지와 함께 나라별 공인 판매사의 이름이 떴다. 다시 켜려면 다섯 자리 암호가 필요했는데, 그 암호는 데예가 갖고 있었다. 해킹도, 국가의 공격도 아니었다. 원인은 상거래 분쟁이었다. 데예는 미국 기업 솔아크(Sol-Ark)의 인버터를 위탁 생산해 왔고, 솔아크는 미국 내 독점 판매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합법적인 대리점을 통하지 않은 제품이 시장에 풀리면서 계약이 위태롭게 되자 항의를 받은 데예가 제품들을 원격으로 꺼버린 것이다. 로이터는 이듬해 중국산 인버터의 보안 문제를 보도하면서, 이 사건을 주요 사례로 언급했다. 악의가 없었다는 점이 오히려 더 무섭다. 제조사의 사업상 판단 하나로 여러 나라의 가정에서 순식간에 전기가 끊긴 것이다. 누구의 집 지붕 위에서 돌아가든, 그 인버터를 끄는 스위치는 제조사의 서버에 있었다. 택갈이로는 안 되는 이유 한국의 사정은 어떤가. 한국경제는 2025년 국내 태양광 인버터 시장을 대기업 세 곳이 80% 넘게 차지하고 있지만, 상당수가 중국산 제품에 국산 브랜드만 붙인 이른바 택갈이 제품이며, 이를 감안한 중국산의 실질 점유율은 95%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같은 보도는 앞으로 10년 동안 국내에 설치될 태양광이 50기가와트 안팎, 여기에 들어갈 인버터가 7조 5천억에서 10조 원 규모라고 추산했다. 국내 주요 기업 상당수가 중국 현지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OEM)이나 제조자 개발 생산(ODM) 방식으로 인버터를 들여온다. 물론 국내에서 유통되는 제품에서 문서에 없는 통신장치가 발견됐다는 보고는 아직 없다. 브랜드만 바꿔 붙여서는 안 되는 이유 세 가지 첫째, 스위치의 열쇠다. 데예 사건이 보여준 것처럼, 인버터를 멈추고 설정을 바꾸는 권한은 펌웨어와 업데이트 서버와 원격 관리 클라우드를 가진 쪽에 있다. 겉에 한국 상표가 붙어 있어도, 그 열쇠가 원제조사에 있다면 달라지는 것은 없다. 둘째, 들여다볼 수 없다. 내가 설계하지 않은 칩과 소프트웨어는 속을 온전히 검증하기 어렵다. 2025년 5월 로이터는 익명의 미국 에너지 당국자들을 인용해 일부 중국산 인버터와 배터리에서 제품 문서에 없는 통신장치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중국 정부는 물론 반박했다. 사실관계를 떠나, 교훈은 분명하다.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르는 장치를 전력망의 신경 끝에 수백만 개씩 달 수는 없다. 엠버가 벽돌이 아니라 뇌에 집중하라 고 말한 이유다. 태양광 패널은 벽돌이다. 칩이 없으니 해킹할 것도 없다. 인버터가 뇌다. 셋째, 산업이다. 인버터는 이제 막 진화를 시작했다. 전력망을 스스로 떠받치는, 즉 관성을 갖는 그리드포밍 기능, AI를 이용한 발전량 예측과 제어, 가상발전소와의 연동이 모두 인버터 위에서 구현된다. 전기국가의 엔진이 인버터라면, 브랜드만 붙여 파는 회사는 엔진을 개량할 수 없다. 기술과 데이터와 이윤은 모두 실제로 만드는 쪽에 쌓인다. 10조 원 규모의 국내 시장을 남의 제품으로 채우는 동안, 그 시장이 키워줄 수 있었던 한국의 기술력도 함께 사라진다. 세계는 이미 움직이고 있다. 미국은 2025년 12월 국방수권법으로 국방 관련 조달에서 위험 국가 기업의 인버터 조달에 연방 자금을 쓰지 못하게 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EU 자금이 들어가는 에너지 사업에서 고위험국 인버터를 배제하기로 했다. 중국 상무부는 물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정부도 기후에너지환경부 주도로 태양광 인버터산업 발전협의체 를 발족하고, 보안을 강화한 인버터 개발과 핵심 기자재 국산화를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비용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국제에너지기구(IEA)는 유럽에서 고위험국이 아닌 나라의 인버터를 쓸 경우 대형 발전소의 전체 사업비는 2% 조금 못 미치게, 주택과 상가용 일반 인버터는 3~4% 정도 늘어난다고 추산했다. 배터리를 함께 다루는 하이브리드 인버터와 소형 마이크로인버터는 20% 안팎까지 오를 수 있지만, 전력망의 신경을 우리 손에 두는 값으로는 비싸다고 할 수 없다. 인버터를 직접 만든다는 것은 공장을 짓는다는 뜻만이 아니다. 칩을 설계하고, 펌웨어를 쓰고, 업데이트 서버와 암호 열쇠를 우리가 갖는다는 뜻이다. 전기가 데이터가 되는 바로 그 길목을 우리 손에 쥐는 일이다. 마이크로 발전 세계 태양광의 절반이 계량기 뒤, 곧 지붕과 공장과 창고 위에 있다. 지붕 태양광과 소규모 배터리가 이미 세계 전체 발전설비 용량의 12%를 차지한다. 우리 법은 이것을 분산에너지 라고 부른다. 2023년 6월 국회를 통과한 「분산에너지 활성화 특별법」이 2024년 6월 14일부터 시행 중이다. 이런 발전에는 네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날씨에 따라 들쭉날쭉하다. 둘째, 수백만 곳에 흩어져 있다. 셋째, 전기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소비자가 생산자가 되고, 전기가 거꾸로 흐른다. 넷째, 모두 인버터를 거친다. 그래서 빠르다. 회전체는 몇 초에 걸쳐 반응하지만, 인버터는 1,000분의 1초 단위로 반응한다. 앞의 세 가지는 문제이고, 네 번째는 해법이다. 재생에너지는 간헐성을 가진다. 수백만 곳에 흩어져 있으니, 거대한 발전소 하나가 여러곳으로 일방향으로 전기를 보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던 이전의 발전과는 송배전망의 복잡도가 비교할 수가 없다. 그런데 전력망은 두뇌를 가질 수 있다. 사방으로 분산되고, 들쭉날쭉한 발전을 묶어낼 수 있는 것은, 그 발전이 모두 칩으로 제어되기 때문이다. 회전기가 줄면 전력망의 관성도 함께 준다. 전력망의 완충장치가 사라지는 것이다. 한동안 이것은 재생에너지의 약점으로 꼽혔다. 해법은 다시 인버터에서 나왔다. 그리드포밍 인버터다. 기존 인버터는 전력망이 만들어 놓은 파형을 따라가기만 했다. 그리드포밍 인버터는 스스로 파형을 만들고, 주파수가 흔들리면 마치 무거운 회전체처럼 버틴다. 쇠붙이의 관성을 소프트웨어로 흉내 내는 것이다. 전기가 데이터를 만나 시너지를 내는 대표적인 자리다. 스마트 그리드전기가 남아도는데 가격이 마이너스가 된다. 전기를 쓰면 오히려 돈을 받는다. 독일, 프랑스, 호주 남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이런 시간이 늘어나고 있다. 공급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공급을 수요와 저장에 맞춰 조율하는 수단이 없어서다. 엠버의 추정으로는 세계 평균 전력 부하 가운데 가격에 반응해 움직일 수 있는 수요는 약 3%에 불과하다. 많은 전기기기가 싼 전기에 맞춰 돌아갈 수 있지만, 가격 신호도 제어 수단도 없으니 움직이지 않는다.   조원갑 행정안전부 인공지능정부정책과장이 25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AI 민주정부’ 실현 전략 관련 브리핑에서 최적의 태양광 입지를 찾아주는 인공지는 서비스 ‘쨍하고 해뜰날’을 시연하고 있다. 2026.8.25. 연합뉴스   사람이 운영하는 관제실이 다룰 수 있는 자산은 200개 안팎이다. 반면 AI가 운영하는 가상발전소는 10만 개가 넘는 자산을 자동으로 움직일 수 있다. 수백만 개의 지붕 태양광, 가정용 배터리, 전기차, 히트펌프를 하나의 발전소처럼 묶어내려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소프트웨어가 필요하다. 이것이 스마트 그리드다. 스마트 그리드의 본체는 전선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전력망의 신경계스마트 그리드를 움직이는 소프트웨어는 하나의 제품이 아니다. 네 개의 층이 쌓인 체계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이해가 쉽다. 맨 아래층은 감각이다. 스카다(SCADA)라고 부르는 감시제어 데이터 수집 시스템이다. 발전소에서 변전소, 배전선에 이르는 설비의 상태를 초 단위로 모아 운영자의 화면에 띄운다. 어디서 전기가 얼마나 흐르는지, 어느 설비가 이상한지, 어디가 정전됐는지를 알려준다. 전력망의 눈과 귀다. 두 번째 층은 판단이다. 발전과 송전을 다루는 에너지관리시스템(EMS), 그리고 배전망을 다루는 첨단배전관리시스템(ADMS)이다. 스카다가 모한 데이터를 해석해 지금 전력망이 어떤 상태인지 이해하고, 부하를 나누고, 전압을 맞추고, 정전이 나면 우회로를 찾는다. 뇌의 앞부분이다. 세 번째 층은 분산자원 관리다. 분산에너지자원관리시스템, 영어 약자로 DERMS라고 한다. 재생에너지가 적을 때는 이 층이 필요 없었다. 발전소는 수백 개였고, 모두 중앙에서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지붕 태양광과 가정용 배터리와 전기차가 수십만, 수백만 개 단위로 전력망에 붙으면 이것들을 동시에 보고 동시에 움직이는 전용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앞에서 본 인버터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층이 바로 여기다. 맨 위층은 시장이다. 가상발전소(VPP) 플랫폼이다. 흩어진 자원을 하나의 발전소처럼 묶어 전력시장에 입찰하고, 전력망이 흔들릴 때 출력을 올리거나 내려 안정을 돕는다. 전력망의 손발을 경제와 이어주는 층이다. 한국 정부도 이 방향을 계획에 담았다. 2023년 2월 확정된 제3차 지능형전력망 기본계획은 5년 동안 약 3조 7천억 원을 들여 차세대 배전망 관리시스템을 단계적으로 넓히고, 배전망 단위로 분산전원을 관리하는 배전망 운영자 제도를 도입하며, 2027년까지 전국 154킬로볼트 변전소 361개를 디지털 변전소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규칙에서 학습으로 이 네 층의 소프트웨어는 오랫동안 규칙으로 움직였다. 이런 상황이 오면 이렇게 하라. 사람이 미리 적어둔 규칙이다. 발전소가 수백 개이고 재생에너지가 몇 퍼센트일 때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수백만 개의 자원이 날씨에 따라 제각각 움직이는 전력망에서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사람이 규칙을 다 적을 수 없다. 여기서 AI가 들어온다. AI가 전력망 소프트웨어에서 하는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예측이다. 위성 영상과 기상 데이터와 현장 센서 데이터를 함께 읽어, 내일 오후 제주의 하늘에 구름이 얼마나 낄지, 그래서 태양광 발전량이 얼마나 줄지를 15분 단위로 맞춘다. 예측이 정확할수록 대기시켜 둘 예비 발전소가 줄고, 그만큼 비용이 준다. 한국에도 성과가 있다. 한전KDN이 자체 개발한 가상발전소 플랫폼 E:모음 은 2025년 8월 전력거래소가 주관한 재생에너지 입찰제도 이행능력시험에서 허용 기준인 8%보다 훨씬 작은 2.34%의 오차율을 기록했다. 둘째는 실시간 최적화다. 수만 개의 배터리와 충전기와 태양광 인버터가 동시에 움직이는 상황에서, 몇 분마다 누가 충전하고 누가 방전하고 누가 출력을 줄일지를 계산한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속도와 복잡도다. 뒤에서 설명할 영국의 크라켄이 수백만 가정의 전기차 충전 시간을 자동으로 고르는 것도 이 일이다. 셋째는 이상 감지와 예측 정비다. 변압기가 고장 나기 전에 진동과 온도와 전류의 미세한 변화에서 징후를 찾아낸다. 전력 설비를 수십 년 만져온 숙련 인력이 은퇴하면서 그들의 머릿속에만 있던 감각도 함께 사라지고 있다. 그 암묵지를 데이터로 붙잡아두는 가장 현실적인 길이 여기에 있다.    AI 이미지 데이터가 없으면 AI도 없다 조율에는 가격 말고도 필요한 것이 있다. 데이터다. 세계 최대의 전력망 소프트웨어 기업 가운데 하나인 GE버노바의 그리드 소프트웨어 사업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제어 시스템의 데이터를 열지 않으면 전력망을 위한 AI는 없다 . 한국의 전력 데이터는 흩어져 있다. 전기를 만드는 데이터는 한수원을 비롯한 발전공기업 여섯 곳에, 전기를 나르고 파는 데이터는 한전에, 전기를 사고파는 데이터는 전력거래소에 있다. 각 기관은 자기 데이터를 자기 업무에 쓴다. AI가 전력의 수급을 정밀하게 예측하고 최적화하려면 발전과 전력망과 소비의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이어져야 하는데, 지금은 기관마다 담장이 서 있다. 계량 데이터도 마찬가지다. 한전은 2024년 11월, 14년에 걸친 지능형 원격검침 인프라(AMI) 보급 사업을 마쳤다고 선포했다. 그런데 녹색경제신문 보도에 따르면 국내 전기 사용 세대의 약 30%는 여전히 한전의 실시간 전력 사용량 앱을 쓸 수 없다. 아파트 때문이다. 대부분의 아파트는 관리사무소가 대표로 한전과 계약하고 세대 검침도 직접 한다. 아파트 세대는 한전의 직접 고객이 아니어서 한전이 세대 계량기에 손댈 권한이 없다. 한국 주택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아파트가 한전의 데이터 지도에서 빈칸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이 빈칸이 실은 아주 큰 기회가 된다. 뒤에서 다룬다. 에너지 데이터 카탈로그 흩어진 데이터를 잇는 방법에 가장 체계적으로 답한 곳이 유럽연합이다. EU 집행위원회는 2023년 6월 6일 집행규정 2023/1162를 채택했다. 이름은 길다. 계량 및 소비 데이터 접근을 위한 상호운용성 요건과 비차별적이고 투명한 절차에 관한 규정. 핵심은 레퍼런스 모델(표준 참조모델)이다. 계량 데이터를 관리하는 자, 계량 지점을 관리하는 자, 데이터 접근을 제공하는 자, 접근 권한을 관리하는 자. 누가 어떤 역할을 맡고 어떤 책임을 지는지를 공통의 틀로 정해두고, 소비자와 자격을 갖춘 사업자가 같은 절차로 데이터에 접근하게 했다. 나라마다 제도는 달라도 같은 모델로 설명되기 때문에 데이터가 국경과 사업자를 넘어 흐를 수 있다. 에너지 데이터 카탈로그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카탈로그는 데이터의 주소록이자 문법책이다. 어떤 데이터가 어디에 있고, 어떤 형식이고, 무엇을 뜻하고, 누가 책임지고, 어떤 조건으로 쓸 수 있는지를 한곳에 정리한 것이다. 데이터를 한곳에 모으자는 것이 아니다. 각자 가진 데이터를 같은 말로 설명하자는 것이다. 도로에 주소 체계와 표지판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차도 목적지에 갈 수 없다. 한전의 데이터, 전력거래소의 데이터, 발전사의 데이터, 지자체와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데이터가 서로 다른 말을 쓰는 한, AI는 전력망을 읽을 수 없다. 읽을 수 없으면 분석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으면 제어할 수 없다. 한국형 카탈로그는 두 단계로 만들 수 있다. 먼저 역할 모델이다. 한국의 전력 생태계에서 누가 데이터를 만들고, 누가 관리하고, 누가 접근을 허락하고, 누가 쓰는지를 정한다. 다음이 정보 모델이다. 각 역할이 주고받는 데이터의 항목과 형식과 주기를 정한다. 역할이 정해지지 않은 채 형식부터 정하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표준이 된다. 공개할 것과 지킬 것도 함께 정해야 한다. 여기에는 이미 쓸 수 있는 틀이 있다. 국가정보원이 2025년 9월 전면 시행한 국가망보안체계(N²SF)는 공공기관의 정보를 기밀(C), 민감(S), 공개(O)의 세 등급으로 나누고 등급에 따라 보안 통제를 달리 적용한다. 에너지 데이터에도 이 틀을 입힐 수 있다. 계통의 취약점처럼 안보와 직결되는 데이터는 기밀로 지키고, 개인의 사용 패턴처럼 민감한 데이터는 조건을 붙여 열고, 나머지는 공개해 민간이 AI를 학습시키는 데 쓰게 한다. 모든 데이터를 똑같이 잠가두는 것도, 똑같이 풀어놓는 것도 답이 아니다. 소비자 쪽의 권리도 생겼다. 2025년 3월부터 개인정보 보호법에 따른 개인정보 전송요구권이 시행됐고, 정부는 이를 전 분야로 넓히고 있다. 내 데이터를 내가 고른 서비스로 보내달라고 요구할 권리다. 법이 권리를 만들었다면, 카탈로그와 레퍼런스 모델은 그 권리가 실제로 작동할 길을 만든다. 형식과 절차가 정해지지 않은 권리는 종이 위에만 있다. 누가 소프트웨어를 만들 것인가 전력망 운영 소프트웨어 시장은 소수의 거인이 쥐고 있다. GE버노바, 지멘스, 히타치에너지 같은 기업들이 수십 년 동안 세계 곳곳의 전력망에서 쌓은 데이터와 경험을 무기로 경쟁한다. 중국은 규모로 밀어붙인다. 중국 국가전망공사는 2026년 1월, 15차 5개년 계획 기간인 2026년부터 2030년까지 4조 위안의 고정자산을 전력망에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직전 5년보다 40% 많은 역대 최대 규모다. 한국이 이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쟁할 수는 없다. 대신 세 갈래의 길이 있다. 첫째, 데이터가 먼저다. 전력망 AI의 경쟁력은 알고리듬보다 데이터에서 나온다. 한국 전력망의 데이터는 한국만 갖고 있다. 앞에서 말한 카탈로그와 등급 체계를 바탕으로 에너지 데이터를 학습에 쓸 수 있게 여는 것, 이것이 모든 일의 출발점이다. 한국 전력망의 특수한 조건에 맞는 AI는 한국의 데이터로만 만들 수 있다. 둘째, 플랫폼은 공공이, 모델은 민간이 만든다. 한전KDN 같은 공공 기관이 전력망 운영의 바탕이 되는 플랫폼과 보안을 맡고, 그 위에서 민간 AI 기업들이 발전량 예측, 수요 반응, 이상 감지 모델을 경쟁적으로 만드는 구조다. 예를 들어 매년 그리드 AI 챌린지 를 열어 비식별화한 실제 전력망 데이터로 국내외 기업들이 모델을 겨루게 하고, 가장 뛰어난 모델을 실제 전력망에 적용한다. 한 기관이 모든 것을 직접 만드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 셋째, 운영자를 돕는 AI다. 전력망 관제실의 운영자에게 AI가 대화 상대가 되는 것이다. 운영자가 오늘 오후 3시에 동해안 풍력이 급감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라고 물으면, AI가 실시간 계통 상태와 예비력과 가용한 배터리 용량을 함께 따져 대응 시나리오를 한국어로 내놓는다. 미국 국립연구소가 관제실용 생성형 AI를 연구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이제 막 열리는 분야다. 제어를 AI에게 넘기는 것이 아니라 운영자의 판단을 넓히는 것이다. 한국어와 한국 전력망 데이터에 특화된 모델은 해외 기업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영역이다. 운영체제를 합해서 수출할 수 있다이 길의 끝에는 수출이 있다. 국내 전력망에서 운영 소프트웨어를 실증하고 실적을 쌓으면, 한국이 해외에 파는 발전소와 HVDC와 에너지저장장치에 운영 소프트웨어를 함께 묶을 수 있다. 설비만 파는 것과 운영 소프트웨어까지 파는 것은 수익 구조가 다르다. 설비는 한 번 팔면 끝나지만, 소프트웨어는 구축 이후에도 라이선스와 유지보수로 수익이 계속 발생한다. 크라켄이 영국 안의 판매회사에서 세계 수십 개 전력회사가 빌려 쓰는 운영체제가 된 것처럼, 한국도 설비 수출국에서 전기국가 구축 솔루션 수출국으로 올라설 수 있다. 앞에서 말한 네 가지 약속, 원격 차단 스위치를 두지 않고, 데이터를 현지에 두고, 표준을 열고, 경험을 나누는 원칙이 그대로 이 소프트웨어의 설계 원칙이 된다. 일의 순서 순서가 중요하다. 첫 단계는 데이터의 표준과 거버넌스다. 기후에너지환경부, 국가데이터처, 한전, 전력거래소, 발전사가 데이터 공유의 원칙에 합의하고, 한국형 레퍼런스 모델의 역할 모델과 정보 모델, 그리고 카탈로그의 표준 스키마를 내놓는다. 두 번째 단계는 실증이다. 이미 지정된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에서 국산 운영 플랫폼과 가상발전소, 그리고 카탈로그 기반의 데이터 개방을 함께 시험한다. 세 번째 단계는 확산이다. 검증된 표준과 플랫폼 위에서 전국의 전력망을 통합 운영하고, 민간 사업자에게 시장을 연다. 이 순서가 작동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공공기관이 가진 에너지 데이터를 기관의 자산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다시 정의해야 한다. 비식별화한 데이터를 민간이 곧바로 쓸 수 있는 법적 근거도 필요하다. 둘째, 보안이 설계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연결될수록 공격받을 수 있는 곳도 늘어난다. 등급별 보안 통제와 제로트러스트, 곧 누구도 기본으로 믿지 않고 접속할 때마다 확인하는 원칙이 처음부터 들어가야 한다. 셋째, 가격이다. 시간대에 따라 달라지는 요금이 없으면 아무리 뛰어난 소프트웨어동 움직일 이유를 찾지 못한다. 전기국가의 운영체제 정리하면 이렇다. 전기국가의 하드웨어는 인버터가 달린 수백만 개의 작은 자원이다. 그 위에서 돌아가는 운영체제는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움직일 이유를 주는 가격, 서로를 알아보게 하는 데이터,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제어.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영국 사례를 보자. 문어와 크라켄 2021년 가을, 영국의 에너지 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코로나 이후 세계 경기가 살아나며 천연가스 값이 치솟았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전기의 40% 이상을 가스로 만들고 있었다. 가스값이 뛰자 전기 도매가격도 함께 뛰었다. 문제는 소매가격이었다. 영국의 에너지 규제기관 오프젬(Ofgem)은 가정용 요금에 상한을 두고 있었다. 전기 판매회사들은 비싸게 사서 싸게 팔아야 했다. 결과는 연쇄 도산이었다. 영국 하원 공공회계위원회에 따르면 2021년 7월부터 2022년 5월까지 29개 에너지 판매회사가 쓰러졌고, 거의 400만 가구가 영향을 받았다. 그중 가장 큰 회사는 영국 7위의 판매회사 벌브(Bulb)였다. 벌브는 너무 커서 다른 회사에 고객을 넘기는 통상의 절차로는 처리할 수 없었다.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에너지 판매회사가 정부의 특별관리에 들어갔다. 도산한 회사들의 고객을 옮기는 데 약 27억 파운드, 벌브를 살려두는 데 세금 약 30억 파운드가 들어갈 것으로 추산됐다. 이 폐허에서 한 회사가 떠올랐다. 2015년에 세워진 옥토퍼스 에너지(Octopus Energy)다. 옥토퍼스는 2022년 12월 20일 정부에 1억 1,300만 파운드를 내고 벌브를 인수해 150만 고객을 받아들였다. 이듬해에는 셸 에너지의 가정용 고객 130만 가구를 넘겨받았다. 2024년 4월 오프젬은 옥토퍼스가 영국 최대의 전기 판매회사가 됐다고 발표했다. 그해 말에는 가스를 포함한 전체 가정용 에너지 시장에서도 점유율 23.7%, 730만 가구로 브리티시가스를 제쳤다. 브리티시가스가 1986년 민영화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창업 10년이 되지 않은 회사가 200년 역사의 회사를 넘어섰다.    AI 산업의 성장은 전력, 물, 탄소크레딧이라는 세 가지 제한적인 자원을 동시에, 그것도 지수적으로 소모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진다. (ChatGPT 생성 이미지) 크라켄이 한 일 옥토퍼스의 무기는 소프트웨어였다. 이름은 크라켄(Kraken). 북유럽 전설의 거대한 바다 괴물, 문어의 모습을 한 괴물의 이름이다. 옥토퍼스는 기존 회사들이 쓰던 낡은 요금 청구 시스템을 버리고, 계량과 청구와 고객 응대와 전력 구매와 기기 제어를 하나로 묶은 운영체제를 직접 만들었다. 크라켄은 하루에 150억 개의 새로운 데이터를 처리한다. 크라켄이 한 일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가격을 실시간으로 조정했다. 옥토퍼스의 애자일(Agile) 요금제는 전기값이 30분마다 바뀐다. 다음 날의 가격이 하루 전에 공개되고, 바람이 세고 수요가 적은 시간에는 값이 마이너스로 떨어지기도 한다. 그 시간에 세탁기를 돌리면 오히려 돈을 받는다. 둘째, 신호에 반응하는 일을 사람 대신 기계가 하게 했다. 전기차를 가진 고객이 저녁에 충전기를 꽂아두기만 하면, 크라켄이 전기값이 가장 싼 밤 시간을 골라 알아서 충전한다. 가격을 보고 판단하고 실행하는 일을 사람이 매번 할 필요가 없다. 앞에서 말한 제어, 곧 인버터와 충전기에 명령을 내리는 일이다. 셋째, 가정을 발전소로 만들었다. 2022년 11월, 영국의 전력계통 운영기관은 겨울 전력 부족에 대비해 수요 유연성 서비스 를 도입했다. 전기가 가장 부족한 저녁 시간에 사용을 줄이는 가정에 돈을 주는 제도다. 옥토퍼스는 이를 세이빙 세션(Saving Sessions) 이라는 이름으로 고객에게 내놓았다. 2022년 11월 15일 저녁 5시부터 6시까지 열린 첫 세션에 20만 가구 넘게 참여했다. 이들은 평소 이 시간 사용량의 59%를 줄였고, 합쳐서 108메가와트시를 줄였다. 어지간한 가스발전소 한 기가 한 시간 동안 만드는 양이었고, 계통 운영기관이 모든 참여자에게서 필요로 했던 200메가와트의 절반이 넘었다. 발전소를 하나 더 돌리는 대신 20만 가구가 저녁을 조금 늦게 먹은 것이다. 그 겨울 동안 열린 13번의 세션에서 옥토퍼스 고객들은 모두 1.86기가와트시의 전력을 줄였고, 한 번에 최대 188메가와트까지 줄였다. 70만 명이 넘는 고객에게 모두 530만 파운드가 돌아갔다. 다음 겨울에는 참여자가 120만 명을 넘었다. 옥토퍼스의 분석으로는 스마트 계량기를 가진 영국의 1,730만 가구가 모두 참여하면 2.1기가와트, 대형 석탄발전소 한 기를 대신할 수 있는 규모가 된다. 크라켄은 이제 옥토퍼스만의 것이 아니다. 프랑스의 EDF, 독일계 E.ON, 미국의 내셔널그리드, 호주의 오리진, 일본의 도쿄가스가 크라켄을 빌려 쓴다. 전 세계 7,000만 개가 넘는 가정과 기업 고객 계정이 크라켄 위에서 움직인다. 2025년 12월 옥토퍼스는 크라켄을 별도 회사로 분리했고, 그 기업가치는 86억 5천만 달러로 평가됐다. 영국의 에너지 위기가 세계적인 에너지 운영체제를 낳은 것이다. 크라켄의 조건 크라켄의 성공을 소프트웨어의 힘으로만 읽으면 절반만 읽은 것이다. 크라켄이 작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국이 먼저 깔아놓은 세 가지 조건이 있었다. 첫째, 가정마다 30분 단위로 사용량을 재는 스마트 계량기가 있었다. 둘째, 누구나 전기 판매회사를 차리고 고객이 자유롭게 회사를 옮길 수 있는 소매 경쟁 시장이 있었다. 그래서 옥토퍼스는 30분마다 바뀌는 요금제를 만들 수 있었다. 셋째, 전력계통 운영기관이 가정의 유연성에 돈을 지불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가격, 데이터, 제어. 앞에서 전기국가의 운영체제라고 불렀던 세 가지다. 크라켄은 그 위에서 돌아가는 응용 프로그램이었다. 한국에는 이 가운데 무엇이 있는가. 한국은 한전이 사실상 유일한 판매회사다. 30분마다 바뀌는 요금제를 만들 회사가 없다. 옥토퍼스 같은 회사가 한국에 태어날 수 없는 이유다. 그런데 한국에는 영국에 없는 것이 하나 있다. 옥토퍼스는 가정을 하나씩 설득해야 했다. 앱으로 알림을 보내고, 이메일을 보내고, 포인트를 쌓아주며 한 집 한 집 참여를 끌어냈다. 20만 가구가 한 시간 동안 사용을 줄인 것이 뉴스가 됐다. 한국에서는 1,000가구가 한 단지 안에 모여 산다. 관리사무소 하나가 운영하고, 한전과는 이미 하나의 계약으로 묶여 있고, 지하주차장에는 수백 대의 전기차가 밤마다 충전기에 꽂혀 있다. 크라켄이 수백만 가구를 소프트웨어로 한데 묶어서 한 일을, 한국에서는 콘크리트가 이미 해놓았다. 영국이 가정을 하나하나 모아 가상발전소를 만들었다면, 한국은 이미 모여 있는 단지를 켜기만 하면 된다. 아파트 공화국의 기회 한국을 흔히 아파트 공화국 이라 부른다. 과장이 아니다. 국가데이터처가 2026년 7월 발표한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주택 2,018만 1천 호 가운데 아파트가 65.8%다. 세 집 가운데 두 집이 아파트다. 아파트는 오랫동안 부동산의 언어로만 이야기됐다. 이제 전기의 언어로 읽을 차례다. 발전소가 아니라 관제실 고층 아파트는 발전소로는 불리하다. 20층, 30층짜리 건물의 옥상은 수백 세대가 나눠 쓰기엔 너무 좁다. 세대당 지붕 면적으로 따지면 단독주택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전기국가의 핵심은 발전이 아니라 조율이다. 조율의 관점에서 보면 아파트는 전혀 다른 물건이 된다. 아파트 단지에는 이미 단지 전체가 함께 쓰는 수전설비와 전기실이 있다. 관리사무소라는 운영 주체가 있다. 지하주차장에는 전기차 충전기가 수십, 수백 대씩 모여 있다. 비슷한 생활 패턴을 가진 수백에서 수천 세대의 부하가 한곳에 모여 있다. 관리비라는 이름으로 이미 단지 단위의 정산 체계도 돌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가상발전소가 필요로 하는 그 조건이다. 흩어진 자원을 모으고, 한 주체가 운영하고, 한 번에 정산하는 것! 서구의 단독주택 사회에서는 수백만 가구와 하나하나 계약하고, 하나하나 장비를 달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을, 한국의 아파트 단지는 이미 갖고 있다. 전기국가의 기본 노드! 엠버는 영국 가정을 예로 들어, 지붕 태양광과 히트펌프와 전기차를 들이고 시간대별 요금과 배터리와 전기차 양방향 충전(V2G)을 더하면, 가정의 에너지 비용이 최대 80%까지 줄 수 있다고 계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계산을 한 집이 아니라, 처음부터 한 단지 단위로, 수천 가구 단위로 할 수 있다.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코리아 스마트그리드 엑스포 2026·일렉스 코리아 2026 에서 방문객들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2026.2.4 연합뉴스 재건축이라는 설계의 기회 재건축도 기회가 된다. 인구주택총조사에서 지은 지 30년이 넘은 주택이 30.6%였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수많은 단지가 재건축과 리모델링을 거친다. 이것은 부담이면서 기회다. 새로 짓는 단지는 처음부터 전기국가의 노드로 제대로 작동하도록 제도를 만들 수 있다. 직류 배전을 염두에 둔 전기실, 모든 주차면의 스마트 충전, 공용 배터리, 히트펌프, 그리고 단지 단위의 에너지 데이터 체계. 애초에 지으면서 넣는 것과, 지은 뒤에 뜯어고치는 것은 비용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미 있는 제도 데이터에서도 아파트는 유리하다. 전력망 운영자에게 필요한 것은 이 노드가 지금 얼마를 쓰고, 얼마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는가다. 그 안에서 몇 동 몇 호가 무엇을 했는지는 알 필요가 없다. 이 구조가 이미 제도로 있다. 아파트가 한전과 맺는 단일계약 은 단지 전체를 하나의 계약당사자로 본다. 한전은 단지 전체의 사용량에 요금을 매기고, 그것을 세대에 어떻게 나눌지는 단지가 정한다. 요금에서는 이미 단지가 하나의 노드인 셈이다. 이것을 제어와 데이터의 단위로 넓히기만 하면 된다. 세대별 사용량은 단지 안에서 요금을 나누는 데에만 쓰고, 단지 밖으로는 합계만 내보낸다. 게다가 아파트에서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자원의 상당수, 지하주차장의 충전기와 공용 배터리와 옥상 태양광과 급수 펌프가 이미 공용 설비다. 이것을 조율하는 데에는 세대의 데이터가 필요 없다. 수천만 가구의 사생활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수만 개의 단지를 움직일 수 있다. 시범단지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시범단지는 기술 실증이 아니라 제도 실증이어야 한다. 한국은 2020년에도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아파트를 대상으로 선택형 요금제와 태양광·저장장치의 상계거래를 시험하려 한 바 있다. 시범단지는 다음의 요소를 한곳에 묶어야 한다. 첫째, 제도다. 분산에너지 특화지역으로 지정해 단지 안팎의 발전과 소비를 직접 거래할 수 있게 하고, 시간대별로 값이 달라지는 요금을 실제로 적용한다. 가격 신호가 없는 망은 반쪽짜리다. 둘째, 운영자다. 관리사무소와 전문 에너지사업자가 함께 단지 전체를 하나의 자원으로 운영하는 구조를 만든다. 수익과 절감분을 주민에게 어떻게 돌려줄지를 처음부터 정한다. 셋째, 데이터다. 한국형 레퍼런스 모델을 처음으로 적용하는 현장으로 삼는다. 세대 데이터는 단지 안에 두고 밖으로는 합계만 내보내는 원칙을 레퍼런스 모델로 처음 적용한다. 넷째, 설비다. 옥상과 주차장 태양광, 공용 배터리, 전기차 스마트 충전과 양방향 충전, 히트펌프를 처음부터 함께 넣는다. 공급만이 아니라 수요를 전기화해야 전기국가다. 다섯째, 보안이다. 인증된 인버터와 제어기기만 쓰고,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를 관리한다. 여섯째, 평가다. 계량기를 몇 대 달았는지, 시스템을 몇 개 만들었는지가 아니라, 주민의 전기요금이 얼마나 줄었는지, 피크 부하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전력망의 부담이 얼마나 덜어졌는지로 평가한다. 산출이 아니라 성과로 재야 한다. 전기국가 건설자, 대한민국 엠버는 나라들을 이렇게 나눈다. 재생에너지를 짓는 데 집중하는 나라가 있고, 경제를 전기화하는 데 집중하는 나라가 있다. 재생에너지만 지으면 이미 전기화된 20~30%의 수요에만 닿고, 전기화만 하면 낡은 발전 설비의 한계에 부딪힌다. 둘을 함께 하는 나라를 엠버는 전기국가 건설자(Electrostate Builder) 라고 부른다. 여기에 AI를 함께 키우는 나라가 힘의 시대를 이끈다는 것이 엠버의 결론이다. 한국은 이 문턱에 서 있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국은 전기국가를 짓는 데 필요한 것을 거의 모든 층위에서 만드는 몇 안 되는 나라다. AI 데이터센터의 심장인 고대역폭 메모리를 만드는 기업이 한국에 있다. 전기차와 에너지저장장치의 배터리를 만든다. 효성중공업은 미국 송전망에 설치된 765킬로볼트 초고압 변압기의 절반을 공급했다. LS전선과 대한전선은 유럽과 대만의 바다 밑에 HVDC 케이블을 깐다. 칩에서 케이블까지, 두 혁명의 공급망이 한 나라 안에 이렇게 촘촘히 모여 있는 곳은 드물다. 빈칸도 있다. 전력전자와 스마트 그리드다. 전기를 읽고 쓰는 인버터, 교류와 직류를 오가게 하는 HVDC 변환설비,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전력반도체. 이것이 전기국가의 뇌이자 엔진이다. 그위에 에너지 데이터 카탈로그와 스마트 그리드로 소프트웨어를 얹어야 한다. 이 빈칸을 채우는 것이 한국이 전기국가 건설자가 되기 위한 마지막 조건이다. 거꾸로 말하면, 이 빈칸만 채우면 한국은 전기국가의 스택 전체를 가진 나라가 된다.   삼성전자는 16일부터 19일까지(현지시간)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리는 엔비디아 GTC에 참가해 차세대 HBM4E 기술력과 베라 루빈 플랫폼을 구현하는 메모리 토털 솔루션을 유일하게 공급할 수 있는 역량을 앞세워 글로벌 AI리더십을 한층 강화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삼성전자 HBM4E 제품 전시 사진. 2026.3.17. 삼성전자 제공 둘째, 한국은 AI에서 미국과 중국 다음에 서 있다. 격차는 크다. 스탠퍼드대의 AI 인덱스 2026에 따르면 2025년 주목할 만한 AI 모델은 미국이 50개, 중국이 30개를 내놓았고, 한국은 5개로 그 뒤를 이었다. 숫자로는 10분의 1이지만 순위로는 세계 3위다. 인구 10만 명당 AI 특허 등록은 14.3건으로 세계 1위다. 전기국가는 전기를 많이 만드는 나라가 아니라, 전기가 닿는 모든 곳을 AI가 읽고 움직이는 나라다. 전기와 AI를 함께 가진 나라는 많지 않다. 셋째, 한국이 걸어온 길이다. 한국은 식민 지배를 겪었고, 전쟁의 폐허에서 원조를 받던 나라였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식민지로 삼지 않고 선진국이 됐다. 유엔무역개발회의는 2021년 7월 한국을 개발도상국 그룹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옮겼다. 1964년 이 기구가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결정은 만장일치였다. 믿을 수 있는 전기국가 건설자 엠버는 이 시대의 역설을 이렇게 요약했다. 에너지와 지능은 수십억 명의 손에 민주화되지만, 그것을 만드는 공장은 소수의 나라에 집중된다. 전기의 시대에는 그 공장을 가진 나라가 스위치를 쥔다. 2024년 11월, 파키스탄과 미국과 영국의 가정에서 인버터가 일제히 꺼졌을 때 세계는 그 스위치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았다. 미국은 위험 국가의 인버터 조달을 막았고, 유럽연합은 고위험국 인버터 배제하기 시작했다. 세계가 지금 찾는 것은 싼 인버터가 아니라 꺼지지 않는 인버터다. 누군가의 지붕 위에서, 누군가의 전력망 끝에서, 그 나라 사람들을 위해서만 일하는 뇌다. 한국은 그 뇌를 만들 수 있는 나라이고, 그 뇌를 믿고 맡길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 석탄의 영국과 석유의 미국은 힘으로 공급로를 지켰다. 전기의 시대에 한국이 내놓을 것은 힘이 아니라 신뢰다. 그 신뢰는 선언이 아니라 설계여야 한다. 한국이 만드는 전기국가의 기술에는 네 가지 약속이 담겨야 한다. 하나, 원격 제어 권한은 설비 소유자와 해당 국가가 승인한 운영자에게만 둔다. 한국산 인버터와 제어기는 그것을 산 사람과 그 나라의 전력망 운영자만이 끄고 켤 수 있다. 둘, 데이터는 현지에 둔다. 아파트 단지에서 세대의 데이터가 단지 밖으로 나가지 않듯, 한국이 지은 전력망의 데이터는 그 나라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 셋, 표준은 연다. 구글과 엔비디아가 직류 데이터센터의 사양을 공개하고 수십 개 기업이 그 위에서 경쟁하듯, 한국의 기술은 닫힌 생태계가 아니라 열린 표준 위에 선다. 넷, 경험을 나눈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선진국이 된 한국의 경험은, 지금 지붕 위 태양광으로 발전소를 건너뛰고 있는 파키스탄 같은 나라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지도다. 엠버는 전기의 세계가 네 가지를 약속한다고 말한다. 주권, 민주화, 풍요, 탈탄소. 그리고 같은 힘이 네 가지 위험을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주권은 고립이 되고, 민주화는 무기화가 되고, 풍요는 독점이 되고, 탈탄소는 급격한 붕괴가 될 수 있다. 약속을 지키면서 위험을 비껴가는 전기국가 건설자가 필요하다. 에너지와 지능이 넘쳐나는 세계가 더 부유하고 더 영리해지는 데 그치지 않고 조금 더 현명해질 수 있도록. 한국은 그런 나라가 될 수 있다. 칩과 배터리와 변압기와 케이블을 만들고, AI를 만들고, 수만 개의 아파트 단지를 수만 개의 관제실로 바꿀 수 있는 나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누구도 지배하지 않고 이룬 나라. 시간이 왔다. 대한민국은 그 건설자로 우뚝 설 수 있다.박태웅 녹서포럼 의장 parkto@hanbi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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