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산중과 담을 쌓고, 너무도 세속적 이었던 스님

산중과 담을 쌓고, 너무도 세속적 이었던 스님
[사람들]
산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왔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했던 수행자.그의 마지막 수행처가 바다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오래 마음에 남는다.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 명진스님을 떠올리면 어쩌면 ‘세속적인 스님’이라는 표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욕망에 물든 세속적이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의 한복판에 두 발을 딛고 살았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산중에 들어가 세상과 담을 쌓은 스님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수행자였다. 사람들의 고통을 보면 외면하지 못했고, 부당함 앞에서는 참지 못했다. 의로운 일이라고 판단하면 몸을 던졌고, 권력이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면 거침없이 목소리를 냈다. 수행자에게도 분노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생 ‘무엇에 분노해야 하는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준 스님이었다. 그렇다고 명진스님을 단순히 ‘사회참여를 한 스님’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의 삶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일이다. 1969년 출가한 그는 송광사와 해인사, 봉암사, 상원사 등 전국의 선방에서 오랫동안 수행했다. 40안거를 성만한 수좌였다. 세상에 뛰어들기 위해 수행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라, 오랜 수행 끝에 산문 밖으로 걸어 나온 사람이었다. 그에게 하나의 전환점이 된 것은 광주였다. 1984년 해인사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의 참상을 담은 비디오를 접한 그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중은 혼자 수행만 하면 되는가.’  그 질문은 이후 그의 삶을 관통하는 화두가 됐다. 그때부터 명진스님에게 수행과 사회참여는 서로 다른 길이 아니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참여했고, 불교계 내부의 개혁에도 뛰어들었다. 1994년 조계종 종단개혁 과정에서는 종단의 권력구조와 기득권을 비판하며 개혁의 한복판에 섰다. 흥미로운 것은 그가 권력을 바라보는 기준이 세속의 권력에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이다. 봉은사 주지 시절에는 사찰 재정을 공개하고 투명한 운영을 강조했다. 거대한 사찰일수록 돈과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불교라는 이름이 권위와 폐쇄성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명진스님에게 불교개혁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었다. 절 안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런 그가 이명박 정부와 충돌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4대강 사업과 민주주의 후퇴를 비판했고, 봉은사 직영사찰 전환을 둘러싸고 조계종 지도부와도 정면으로 맞섰다. 정부가 종단 인사에 개입했다고 문제를 제기했고, 그 과정에 국가정보원의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명진스님은 정치권력만을 향해 목소리를 낸 사람이 아니었다. 종단 내부의 권력에도 같은 잣대를 들이댔다. 결국 조계종으로부터 승적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았고, 오랜 법정 다툼 끝에 종단과 화해했다. 그의 삶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것은 사회적 약자와 참사의 현장을 찾아가는 방식이었다. 1000일 기도를 마친 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곳은 용산참사 현장이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의 농성장을 찾았고,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촛불집회에도 참여했다. 그에게 수행은 자신의 마음을 닦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던 셈이다.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그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부당한 권력이 있다면 그것이 옳은지 묻는 것. 누군가의 눈물이 있다면 그 곁에 서는 것. 그것 역시 수행의 일부였을 것이다. 그래서 명진스님을 ‘정치적인 스님’이라고만 부르는 것은 그를 이해하는 가장 쉬운 방법인 동시에 가장 쉽게 오해하는 방법일 수 있다. 그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권력을 얻기 위해 정치에 뛰어든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권력이 어디에 있든 그것을 의심했던 사람에 가까웠다. 청와대의 권력도, 조계종의 권력도 예외가 아니었다. 산중의 수행자에게 세상은 번뇌의 바깥일지 모른다. 그러나 명진스님에게 세상은 수행의 대상이었다. 광주의 희생자들, 용산의 철거민들, 해고노동자들, 세월호 유가족들. 그리고 권위주의와 맞서 싸우던 사람들. 그는 그들 앞에서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라며 눈 감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명진스님이 평생 던진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산속에서 깨달음을 구하는 것과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불교적인가. 명진스님은 자신의 삶으로 답하려 했다.  수행은 산중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는다고.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도 승병장이 되었을 법한 스님. 그리고 그의 삶에는 또 하나의 수행처가 있었다. 바다였다. 평소 수영을 좋아하고 물을 가까이했던 명진스님은 프리다이빙을 즐기셨다. 숨을 멈추고 자신의 몸을 물속으로 내려보내는 일. 물속에서는 무엇 하나 움켜쥘 수 없다. 오직 자신의 호흡과 몸의 감각에 의지해야 하는 그곳. 물을 좋아했던 명진스님에게 바다는 어쩌면 또 하나의 수행처였을지도 모르겠다. 산에서 시작한 수행은 세상으로 내려왔고, 세상을 향했던 그의 마지막 걸음은 다시 물속으로 향했다. 그래서 그를 더욱더 ‘세속적인 스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세속에 물든 스님이 아니라, 세상을 외면하지 않았던 스님. 산을 떠나 세상으로 내려왔고, 세상을 향해 끊임없이 질문했던 수행자. 그의 마지막 수행처가 바다였다는 사실이 그래서 오래 마음에 남는다.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합니다.홍순구 시민기자 dranx@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