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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반공 전사·산업 역군 길러낸 이승만·박정희 시대 교육

반공 전사·산업 역군 길러낸 이승만·박정희 시대 교육
[교육]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의 시위 모습. 학생들의 유신철폐 시위는 노동자와 시민의 참여로 확대되었고,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를 뒤흔들었다. 국가발전의 산업역군으로 호명되었던 사람들이 더는 침묵하지 않고 독재권력을 심판하는 시민으로 나선 것이다. 국가가 요구한 인간과 스스로 판단하는 시민이 충돌한 칼럼의 결론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출처: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제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학생들은 국민교육헌장을 외워야 했습니다. 교사는 한 사람씩 불러 암송을 점검했고, 제대로 외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체벌했습니다. 그 뜻을 이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정한 문장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외우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월요일 아침이면 학생들은 운동장에 줄을 맞춰 섰습니다. 교장의 훈화를 듣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외웠습니다. 초등학교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했고, 상급학교에서는 교련복을 입고 제식훈련과 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차렷과 열중쉬어, 우향우와 좌향좌. 구령이 떨어지면 한 몸처럼 움직여야 했습니다. 학교는 지식을 배우는 곳이면서 국가의 명령에 맞춰 생각하고 움직이는 법을 익히는 공간이었습니다. 국민교육헌장에는 당시 국가가 원한 인간이 그대로 담겨 있었습니다. 학생은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임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반공민주정신에 투철”한 애국자이자 근면한 국민”이 되어야 했습니다. 반공과 경제개발, 국가에 대한 충성과 개인의 의무가 하나의 문서 안에서 결합했습니다(대통령 박정희, 「국민교육헌장」, 1968.12.5.). 그러나 이러한 교육방식은 해방 이후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에게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를 암송시키고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학교체조와 군사훈련으로 학생의 몸을 통제했고, 천황과 일본제국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을 길러내려 했습니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학교는 침략전쟁에 필요한 인간을 양성하는 병영으로 바뀌었습니다. 학생은 스스로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국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할 예비군인이었습니다. 1945년 해방과 함께 천황에 대한 충성과 황국신민서사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국가가 학생에게 충성의 문장을 외우게 하고 집단조회와 군사훈련으로 몸과 정신을 규율하는 방식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식민지 병영교육이 남긴 통제방식과 인적·제도적 유산은 충분히 청산되지 않았습니다. 그 통제방식은 해방 이후 독재정권 아래에서 반공주의와 개발주의에 맞게 다시 짜였습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헌법상 민주공화국으로 출발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학교라면 학생을 권력의 명령에 복종하는 국민이 아니라, 국가의 주인으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권력을 감시하는 시민으로 길러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학교에 먼저 들어온 것은 민주공화국의 시민교육이 아니었습니다. 냉전과 분단, 전쟁과 동원의 논리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분단과 한국전쟁을 내세워 학생을 공산주의에 맞서 국가를 지킬 반공국민으로 조직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여기에 경제개발의 임무를 더했습니다. 반공의 전사이면서 생산하고 수출하는 산업역군을 길러내려 했습니다. 반공주의는 국민이 싸워야 할 적을 정했습니다. 개발주의는 국민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은 학교와 사회를 명령과 복종의 체계로 묶었습니다. 식민지 병영교육의 유산을 충분히 청산하지 못한 자리에 반공주의와 개발주의를 결합한 한국형 병영국가가 들어섰습니다.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고전적 의미의 파시즘 국가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반공주의를 절대화하고 사회를 적과 동지로 나누었으며, 학교와 국민을 국가목표에 동원했습니다. 그 통치에는 파시즘적 국가관과 병영식 질서가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해방된 대한민국은 왜 민주공화국의 시민보다 반공의 전사와 산업역군을 먼저 길러내려 했을까요. 이 글에서는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이 어떤 인간을 필요로 했으며, 학교와 교육제도를 통해 그 인간형을 어떻게 만들어내려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국가가 요구한 인간과 그 명령을 거부한 시민의 충돌도 함께 추적하겠습니다. ■ 국가의 적을 가려내는 반공국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을 때, 헌법은 대한민국을 민주공화국으로 선언하고 있었습니다. 국민은 국가의 주권자였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해방된 국가가 학생들에게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서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국가가 누구를 적으로 규정하는지 배우고, 그 적에 맞서 정부에 충성하는 일이었습니다. 정부 출범 전후의 상황은 엄중했습니다.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됐고, 남과 북에는 서로 다른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제주4·3과 여수·순천 10·19사건을 거치며 무장충돌과 국가의 폭력적인 진압이 이어졌습니다.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습니다. 1950년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공산주의와 북한에 대한 두려움은 국민이 직접 겪은 전쟁의 기억이 됐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그 두려움을 통치의 원리로 만들었습니다. 북한과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야 한다는 명분을 정권에 대한 충성과 결합했습니다. 정부를 비판하거나 다른 정치적 견해를 제시하는 사람도 국가의 적으로 의심받았습니다.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과 이승만 정권에 대한 복종의 경계가 흐려졌습니다. 그 바탕에는 일민주의(一民主義)가 있었습니다. 일민주의는 이승만이 제시하고 초대 문교부 장관 안호상 등이 이론화한 국가이념이었습니다. ‘일민’은 하나의 백성을 뜻했습니다. 같은 민족 안에서 남녀와 상하, 빈부와 지역의 차별을 없애고 공산주의의 계급투쟁에 맞서 하나로 단결한다는 논리였습니다(이승만, 『일민주의개술』, 일민주의보급회, 1949.6.10.). 일민주의는 빈부와 귀천의 차별을 없애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의 갈등을 권리와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단결을 해치는 분열로 바꾸어놓았습니다. 다양성과 갈등을 인정해야 할 민주주의의 자리에 하나의 민족의지가 들어섰습니다. 1948년 12월 1일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 반공체제를 법제화했습니다. 반국가단체와 좌익세력의 활동을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제정된 국가보안법은 이후 개정과 운용을 거치며 정부 비판과 정치적 반대까지 공산주의와 연결해 처벌하는 수단으로 확대됐습니다. 반공은 국가를 방어하는 원칙인 동시에 정권의 반대자를 배제하는 무기가 됐습니다(「국가보안법」, 법률 제10호, 1948.12.1.). 해방된 국가의 권력기관에는 식민통치에 협력했던 경찰과 관료가 다시 들어섰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친일 경찰 노덕술은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이 됐습니다.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22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설치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그 활동을 방해했습니다. 1949년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 특별경찰대를 습격해 무장해제시키고 관계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친일잔재를 청산해야 할 국가권력이 친일 경찰을 동원해 청산기구를 무너뜨린 것입니다(「반민족행위처벌법」, 법률 제3호, 1948.9.22.; 반민특위 특별경찰대 습격사건, 1949.6.6.). 식민통치의 인적·제도적 유산을 청산하지 않은 국가는 국민을 시민으로 길러내기보다 감시하고 통제하는 방식을 되풀이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이 법의 영역에서 적과 동지를 나누었다면, 학교의 반공교육은 그 구분을 학생들의 생각과 감정 속에 심었습니다. 학교를 병영적 질서로 묶은 조직이 학도호국단이었습니다. 정부는 1948년 12월 전국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을 학도호국단으로 조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49년 4월 23일 중앙학도호국단 결성식에서 학생 대표는 반민족적인 행동과 반국가적 사상”을 부수고 국토통일과 조국방위에 결사 헌신”하겠다고 선서했습니다(경향신문, 1949.4.23.). 학교장은 호국단장이 됐고, 학생조직에는 대대와 중대라는 군대식 편제가 적용됐습니다. 학생자치의 자리에 국가가 지휘하는 명령체계가 들어섰습니다. 3·1민족혁명의 정신마저 국가에 대한 충성의 언어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3·1민족혁명은 식민권력에 복종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국민이 스스로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불의한 권력에 저항한 혁명이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학도의 정신으로 뒤집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학생이 전선에 나가거나 후방지원에 참여했습니다. 국가는 그 희생을 학생들을 반공전선의 예비전사로 묶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1954년부터 1955년에 걸쳐 공포된 제1차 교육과정은 전쟁을 거치며 강화된 반공주의를 학교 안에 제도화했습니다. 사회생활과에 배정된 시간 가운데 연간 최저 35시간을 ‘반공·도의교육’에 사용하도록 했습니다. 반공은 하나의 지식에 머물지 않고 학생이 갖추어야 할 윤리와 생활태도가 됐습니다(문교부, 「국민학교·중학교·고등학교·사범학교교육과정시간배당기준령」, 문교부령 제35호, 1954.4.20.). 이승만 정권이 요구한 인간은 공산주의를 절대적인 적으로 인식하고, 반공국가에 충성하며, 근로와 자립으로 신생국가 건설과 전후 재건에 참여할 국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민주주의라는 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교육과정과 교과서에는 국민주권과 선거, 자유와 자치의 원리가 등장했습니다. 학생들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며 자유민주주의가 공산주의보다 우월한 체제라고 배웠습니다(이동헌, 「1950년대 국민화 담론 연구―‘도의’교육을 중심으로」, 2008). 그러나 학교 밖의 현실은 교과서와 정반대였습니다. 친일잔재는 청산되지 않았고 부정부패는 권력 주변에 쌓여갔습니다. 경찰과 정치깡패는 정권의 반대자들을 위협했습니다. 이승만은 1952년 계엄령 아래에서 국회의원들을 위협하며 발췌개헌을 강행했습니다.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기 위해 국회에서 부결된 개헌안을 ‘사사오입’이라는 궤변으로 가결시켰습니다. 1960년에는 3·15 부정선거로 권력을 연장하려 했습니다(발췌개헌안 국회 통과, 1952.7.4.; 「대한민국헌법」 제2호 공포, 1952.7.7.; 사사오입 개헌안 부결, 1954.11.27.; 가결 번복, 1954.11.29.). 학생들에게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정권은 선거와 의회, 헌법을 무너뜨렸습니다. 학생들에게 법과 질서에 복종하라고 요구했지만, 대통령 자신은 장기집권을 위해 법과 질서를 짓밟았습니다. 교과서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현실의 비리와 폭력 사이의 괴리는 학생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안겼습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나서고 있다. 자유당 정권은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대구 유세에 학생들이 참석하지 못하도록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다. 학생들은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며 이에 저항했다. 국가가 길러낸 반공학도가 권력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고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일어선 순간이었다. (출처 표기 예시:영남일보 자료사진) 1960년 2월 28일, 자유당 정권은 야당 부통령 후보 장면의 대구 유세에 학생들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대구지역 고등학생들에게 일요일 등교를 지시했습니다. 경북고·대구고·경북여고 등의 학생들은 민주주의를 살리자”,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생들을 정치도구로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며 거리로 나왔습니다. 그들은 결의문에서 부여된 권리를 수호하기 위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2·28민주운동 결의문」, 1960.2.28.). 국가의 통제 아래 조직됐던 학교 안에서 학생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 연결은 이제 부정선거에 맞선 연대와 저항의 통로가 됐습니다. 학생들은 국가가 가리킨 적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부정선거와 경찰폭력을 직접 목격하며 민주공화국을 위협하는 권력이 누구인지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했습니다. 2·28민주운동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 마산시위와 4·19혁명으로 이어졌습니다.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숨진 김주열의 시신이 1960년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발견되자 분노는 전국으로 번졌습니다.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정치깡패의 습격을 받은 다음 날, 전국의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1960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들은 이승만 정권의 현실을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어 자신들의 행동을 일제에 맞서 자유를 외쳤던 앞선 세대의 역사와 연결했습니다.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학생들이 거리에서 요구한 것은 교과서에 없던 새로운 원리가 아니었습니다. 헌법과 교과서에는 적혀 있으나 현실에서 배반당한 민주주의를 실제로 지키라는 요구였습니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라면 대통령도 헌법과 선거의 심판을 받아야 했습니다(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일동, 「선언문」, 1960.4.19.). 이승만 정권은 학생을 국가에 충성하는 반공학도로 길러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학도들은 4·19혁명에서 헌법의 약속을 현실에 요구하며 권력을 심판하는 민주공화국의 시민으로 일어섰습니다. ■ 생산하고 수출하는 산업역군 4·19혁명은 학생과 시민의 힘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세울 시간은 짧았습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를 비롯한 군인들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국가권력을 장악했습니다. 4·19혁명으로 주권자의 자리에 섰던 국민은 불과 1년 만에 다시 군사정부의 명령 아래 놓였습니다. 군사정부는 쿠데타 당일 발표한 ‘혁명공약’에서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는 한편,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고 선언했습니다(군사혁명위원회, 「혁명공약」, 1961.5.16.). 반공과 경제개발은 처음부터 하나의 국가목표였습니다. 반공은 국민이 싸워야 할 적을 정했고, 경제개발은 국민이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국민의 열망을 국가 주도 산업화로 조직했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과 수출 주도 산업화가 추진되면서 생산과 수출은 경제활동을 넘어 애국의 기준이 됐습니다. 공장 노동자와 기술자, 과학자와 관료, 농민과 학생은 모두 국가발전의 역군으로 호명됐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원한 것은 무능하고 소극적인 국민이 아니었습니다. 산업현장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며, 더 많이 생산하고 수출하는 사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왜 국가가 개인의 능력을 요구하는지, 그 능력은 누구를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지, 성장의 성과는 누구에게 돌아가고 그 대가는 누가 치르는지는 묻지 못하게 했습니다. 생산에는 능동적이되 정치적으로는 침묵하는 인간. 이것이 박정희 정권이 요구한 산업역군이었습니다. ● 능력은 요구했지만 질문은 허용하지 않았다 학교교육도 경제개발의 목표에 맞춰 재편됐습니다. 1963년 제정된 「산업교육진흥법」은 산업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가르치는 교육의 법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973년 개정법은 산업교육을 받는 학생이 일정 기간 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이수하도록 했습니다. 공업고등학교와 실업·기술교육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인력을 공급하는 통로로 확대됐습니다(「산업교육진흥법」, 법률 제1403호, 1963.9.19.; 법률 제2545호, 1973.2.22.).   1968년 12월 5일 열린 국민교육헌장 선포식. 국민교육헌장은 반공과 경제개발, 근면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하나의 국민윤리로 제시했다. 이후 학생들은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헌장을 암송해야 했다. 국가가 원하는 인간형을 교육을 통해 만들어내려 했던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문제는 기술교육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기술적 능력을 정치적 판단과 분리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학생은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배워야 했지만, 그 기계가 누구를 위해 돌아가는지는 묻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 인간형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문서가 1968년 12월 5일 선포된 국민교육헌장이었습니다. 헌장은 국민 개개인에게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부여하고, 능률과 실질”, 근면과 협동”을 생활윤리로 강조했습니다.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임을 깨달아”라는 문장은 개인의 삶을 국가발전의 목표에 종속시켰습니다. 무엇이 발전이며 누가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국가가 정했습니다. 국민에게 요구된 것은 토론과 동의가 아니라 근면과 복종이었습니다(대통령 박정희, 「국민교육헌장」, 1968.12.5.). 국민교육헌장이 학생의 생각을 국가목표에 묶었다면, 교련과 학도호국단은 학생의 몸과 일상을 군사적 위계에 편입시켰습니다. 1969년부터 남자 고등학생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교련이 다시 실시됐습니다. 이후 여자 학생에게도 확대됐고, 1971년에는 대학 교련이 필수과목으로 강화됐습니다. 학생들은 제식훈련과 총검술, 화생방훈련과 응급처치를 배웠습니다. 대학생들은 군부대에 입소해 집체교육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1975년 6월 7일에는 대통령령 제7645호로 「학도호국단설치령」이 제정·시행됐습니다. 학생자치는 국가가 조직한 동원체제로 대체됐습니다. 학생은 배움의 주체이기에 앞서 총력안보의 예비전력으로 편성됐습니다. 학교는 산업현장에 필요한 기술자를 길러내는 훈련장이면서 전시에 동원할 예비병력을 양성하는 병영이 됐습니다. 학생에게는 생산능력과 군사적 복종이 동시에 요구됐습니다. ● 질문을 범죄로 만든 국가 복종은 교육과 훈련만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정한 목표를 의심하고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는 중앙정보부와 경찰, 검찰과 법원이 동원됐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반대자를 정치적 경쟁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공산주의자와 간첩, 국가전복세력으로 몰았습니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과 동백림 사건, 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 민청학련 사건과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재일동포와 납북귀환어부 가운데서도 간첩조작 피해자가 속출했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의 유학생과 예술인, 지식인과 정치적 반대자에게까지 중앙정보부의 감시와 폭력이 미쳤습니다. 이들 사건 가운데 상당수는 훗날 국가기관의 조사와 재심을 통해 불법연행과 장기구금, 고문과 조작된 자백, 과장된 수사와 허위 증거가 밝혀졌습니다.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에서는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여덟 명이 불과 하루 뒤 처형됐습니다. 2007년 재심법원은 이들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과 사법절차는 국민의 권리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권이 제거하려는 사람을 처벌하고 죽이는 데 동원됐습니다.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되면서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과 개헌 요구는 범죄가 됐습니다. 1975년 5월 13일 선포된 긴급조치 9호로 수많은 시민과 학생이 기소되고 유죄판결을 받았습니다. 술자리나 수업 중 박정희와 유신체제를 비판한 말 때문에 처벌받은 사건도 적지 않았습니다. 정권을 비판하는 말 한마디가 체포와 구금의 이유가 됐습니다(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긴급조치 위반사건 조사·분석 결과」, 2007·2009). 국민교육헌장은 국민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명령했습니다. 산업교육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을 길렀습니다. 교련과 학도호국단은 복종하는 몸을 만들었습니다. 긴급조치와 조작사건은 국민의 입과 생각을 통제했습니다. 국가의 명령에 왜”라고 묻는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보여준 것입니다. 밝혀지지 않은 죽음도 남았습니다. 유신독재에 맞서던 장준하 선생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국가기관의 거듭된 조사에도 사망 경위와 공권력의 개입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조작사건의 실체가 드러난 뒤에도 여전히 규명되지 않은 죽음이 남아 있습니다. ● 산업역군에서 권리의 주체로 그러나 국민은 국가가 정한 산업역군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습니다. 산업역군으로 불리던 노동자가 국가발전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야 할 권리의 주체임을 선언한 사건이었습니다.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희생된 노동자가 국가와 기업에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1978년 6월 27일 전남대학교 교수 11명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는 유신교육의 본질을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교수들은 현실을 바로 알고 그것을 개선할 힘을 기르는 일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을 교육하는 길”이라고 선언했습니다(전남대학교 교수 11인, 「우리의 교육지표」, 1978.6.27.). 국가는 교육을 국가목표에 적합한 인간을 만드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교육이 현실의 모순을 발견하고 바꾸는 인간을 길러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시작돼 마산으로 번진 부마민주항쟁은 그 저항이 거리로 터져 나온 사건이었습니다. 노동자와 학생, 시민은 유신체제의 명령을 더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국가발전의 역군으로 호명됐던 사람들이 유신권력을 심판하는 시민으로 등장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격으로 사망하면서 18년의 통치는 끝났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학교와 공장, 군대와 사회를 반공과 경제개발이라는 국가목표 아래 묶었습니다. 국민에게 더 많이 배우고, 더 잘 일하고, 더 많이 생산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성장의 목적과 그 대가를 판단할 권리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능력 있는 국민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왜, 누구를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 묻는 시민은 두려워했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학생을 반공국가에 충성하는 학도로 길러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학생들은 4·19혁명에서 부정한 권력을 심판했습니다. 박정희 정권은 국민을 생산하고 수출하는 산업역군으로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노동자는 인간다운 삶을 요구했고, 교수와 학생, 시민은 유신독재에 맞섰습니다. 국가는 복종하는 국민을 만들려 했지만, 국민은 스스로 판단하는 시민으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붕괴가 병영국가의 종말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5·18민주항쟁을 총칼로 짓밟고 학교와 사회를 다시 침묵의 질서로 묶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전두환 정권이 학생들에게 무엇을 기억하지 말고 무엇을 묻지 말라고 요구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이병권 인문연구가 lbkwon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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