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로그인   회원가입   초대장  
모니터링&뉴스레터   페투미X사회혁신
페투미X사회혁신   서비스 소개   아카이브   이야기   이용 안내
페이지투미는 사회혁신분야의 새로운 정보를 일주일에 3번, 메일로 발송해드립니다.

link 세부 정보

정보 바로가기 : ‘배곯는 아이들’을 위한 일…무대에 선 김민기

‘배곯는 아이들’을 위한 일…무대에 선 김민기
[사람들]
박정희가 피살되고 한 달쯤 지났을까? 고교 후배 정병호(전 한양대 인류학과 교수, 2024년 작고)가 돌바우골로 김민기를 찾아왔다. 말은 그와 상의할 게 있다고 했지만, 실은 김민기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을 부탁하려는 것이었다. 정병호의 생각은 이랬다. 엄마, 아빠가 일터로 나가 집을 비워야 하는 달동네야말로 어린이집이 꼭 필요하고, 그런 가정의 어린이들이야말로 돌봄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달동네에는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어린이집도 없지만, 있어도 가난 때문에 다닐 수 없다. 그래서 달동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방치된 채 자란다. 미취학 아이들은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돌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면 방치되긴 마찬가지다. 많은 달동네의 아이들이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수업을 제대로 따라가지 못하는 건 그 때문이다. 아이들이 제때 제대로 교육받지 못하면 엄마 아빠처럼 가난을 대물림하고, 이 악순환은 끝없이 계속된다.” 그런 동네 아이들에게 필요한 돌봄을 제공하고 싶다. 그 아이들이 일정하게 문화적 습득력을 갖춘 상태에서 학교에 들어가고, 또 꾸준히 돌봄을 받으면 그들도 여느 아이들과 어울려 대등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동네 어린이집은) 취학 아동에게도 쉼터와 공부방이 될 수 있다. 이게 평등한 출발점을 만드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김민기의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남달랐다. 그는 학전 시절에도 어린이극을  무대에 올리는 등 어린이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사진은 학전 어린이극 고추장 떢볶이 공연 장면. 사진: 학전제공  설명은 길었지만, 결론은 간단했다. 달동네에 그런 유아원을 설립하려는데 돈이 없다. 기금을 마련하려고 하니 콘서트를 열어달라는 것이었다. 무대에 선 지 까마득하고, 노래를 안 하겠다고 공언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닌데, 그더러 무대를 만들고 무대에 서 달라는 것이다! 김민기는 잠자코 눈만 껌벅거리며 듣더란다. 침묵이 흘렀다. 정병호가 불안해질 즈음 김민기가 입을 열었다. 그래, 알았어.” 그걸로 끝이었다. 김민기의 눈에 정병호는 ‘무슨 일을 해도 진실하게 할 사람’이었다. 게다가 어머니가 평생 받은 아이들 일이라니…. 두 사람 사이에는 이런 인연이 있었다. 정병호가 경기고 2학년일 때였다. 그는 그해 가을 학교에서 터진, 이른바 ‘화동 주보 사건’의 7인 주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다음은 사건의 자초지종.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 발동과 함께 유신헌법 국민투표가 공고됐다. 24일 국민투표와 함께 유신 총통 체제가 시작됐다. 학교 인근 중앙청 앞에는 탱크 두 대가 세워져 있었고, 공공기관 앞에는 군인들이 집총 자세로 시민을 제압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엿새 뒤인 30일 아침 등교한 학생들은 마룻바닥에 주저앉을 정도로 기겁했다. 책상마다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유인물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선생들은 더 놀랐다. 자칫 학교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선생들은 누가 볼세라 숨 가쁘게 유인물을 수거하고, 교장실에 알리고, 교장과 교감은 범인 색출을 지시하는 한편 관계 기관에 신고하고, 힘센 학부모들에게 선처를 부탁했다. 3교시 시작할 즈음 군용 지프와 트럭 두 대가 운동장으로 들이닥쳤다. 총을 든 군인들이 쏟아져 내렸다. 앞서 27일, 정병호 등 7인은 밤새워 8쪽짜리 유인물을 제작하고, 일요일인 29일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일요일 밤엔 학교 도서관 말고 문 연 곳이 없었고, 지키는 교직원도 없다는 점을 노렸다. 도서관에서 밤이 되기를 기다리다가 각자 맡은 교실에 들어가 유인물을 뿌리고 나오기로 한 것이다. 기습 작전은 성공했다. 유인물을 집어 든 학생들은 서늘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묘한 쾌감을 느꼈다. 몇몇은 일요일 아침 교회 예배당을 떠올렸다. 당시만 해도 많은 교회에선 예배 시작하기 전 신도들이 앉는 자리에 주보를 한 장씩 놓아뒀다. 총기 넘치는 학생들은 그 모습을 떠올리며, 이날 사건을 두고 ‘화동 주보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유신체제와 유신헌법에 대한 최초의 비판이자 정면 도전이었다. 김민기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신정야학을 함께 했던 정병호가 1971년 4월 5일, 매년 한 명을 뽑는 명예 보이스카웃 상을 받고 있는 모습(사진 왼쪽).  거리행진 선두에 선 정병호(오른쪽).그는 명예 스카웃 상을 받은 이듬해  화동주보사건 주동자 7인중 한 명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출처: 프레시안 하는 둥 마는 둥 수업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귀가한 정병호는 배낭을 꾸려 혜화동 집을 나섰다. 몇 차례 등산 갔던 소요산으로 피신하려는 것이었다. 김민기처럼 중학생 시절부터 보이스카우트를 했던 터라 야영엔 나름 익숙한 그였다. 혜화동 로터리를 지나가다가 김민기를 만났다. 김민기는 불안해하는 정병호를 데리고, 제 집처럼 드나들던 로터리 근처 친구 화실로 갔다. 그곳엔 문리대 연극반 김석만도 있었다. 정병호는 두 사람에게 유인물을 보여주며, 저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김석만은 격려했다. 난 이런 걸 보면 왠지 숙연해져. 너희들 정말 큰일 했다.” 그러나 거나해진 김민기는 어눌한 말로 쓸데없는 짓을 저질렀네”라고 하더니 쓰러져 자더란다. 야속하거나 밉지는 않았다. 보이스카우트 후배이기도 했던 정병호는 김민기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후배를 위한 일이라면 없는 일도 할 사람이었다. 김민기는 정병호가 진실로 걱정스러웠지만, 어찌해야 할지 저도 몰라 객쩍은 소리 한 번 한 것이었다. 그는 일단 화실에서 당분간 함께 지내보자는 생각이었다. 막강한 인맥 덕에 학교는 큰 화를 당하지 않았다. 주모자들도 정학 등의 징계에 그쳤다. 정병호는 그 일이 있고부터 김민기와 선후배 이상으로 가까워졌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김민기 등이 하고 있던 신정야학에서 활동했다. 정병호는 신정야학에서 부모도 일하고 저도 일해야 하는 아이들을 만난 뒤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아이들의 곁을 지키며 지냈다. 어떻게 하면 이들이 바르게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했다. 해송유아원에서 시작해, 해송아기둥지를 설립 운영했고 공동육아운동을 펼쳤으며, 탈북 청소년들의 남한 사회 적응을 위해 하나원의 ‘하나둘학교’를 세웠고, 다문화이주청소년을 위해 ‘무지개청소년센터’를 세웠다. 기금 마련 콘서트를 고민할 때부터 정병호는 알고 있었다. 김민기만 잡으면 콘서트의 모든 게 해결되리라는 것을. 제작 때 봤듯이, 김민기는 일단 결심하면 불길 속으로라도 뛰어들었고, 그런 그와 함께 뛰어들 꾼들이 주변에 많았다. 그가 손을 내밀면 운동권 노래패든 낭만주의 ‘딴따라’건, 대중음악 밴드건 교회 합창단이건 언제든 손을 맞잡을 이들이었다. 김민기가 마음을 굳히고, 얼마 뒤 서울 불광동 어머니 집에서 김민기, 임진택, 김영동 등 제작진과 빈민촌 어린이집 설립을 추진하던 정병호, 이기범(숙명여대 명예교수, 어린이어깨동무 이사장)이 모였다. 기금 마련 공연 발대식이었다. 박정희가 피살된 10·26 직후였다. 아버지의 땅 익산에서 농삿일을 하던 김민기는 정병화의 요청으로 해송어린이 집 기금마련을 위한 공연에 발벗고 나섰다. 1980년 1월 26일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열린 공연에는  양희은 김도향 등 대중가수는 물론 소리꾼 임진택, 춤꾼  채희완 등이 무대에 올랐다. 김민기도 모처럼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다.  사진은  김민기의 어린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소개한  SBS 뒷것 김민기  방송 영상  갈무리.         그로부터 한 달쯤 뒤 서울 반포 쪽에서 전체 기획회의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12·12 군사반란이 일어난 바로 그날이었다. 전두환과 신군부 일당은 이날 삼각지 육군본부 일대에서 교전 끝에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고 군권을 장악했다. 이 사건으로 한강 다리가 통제되는 바람에 적잖은 이들이 참석하지 못했다. 시국은 수상했고, 정세는 불길했다. 박정희는 피살됐다지만 유신체제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게다가 수경사 경비단장을 하며 박정희를 곁에서 보고 배운 전두환이 끌고 다니는 신군부 일당이 전면에 나선 것이다. 공연이 제대로 열릴 수나 있을까? 그러나 기왕 시작한 일! 김민기는 전두환과 신군부 패거리에 개의치 않고 콘서트에 매달렸다. 공연 프로그램을 짜고, 동참할 가수와 연주자를 섭외하고, 공연장까지 물색했다. 유아원 설립을 위한 기금 마련 공연’은 1월 26일 서울 정동 문화체육관에서 열렸다. 무대에는 양희은, 조동진, 김의철, 김도향 등 당대의 ‘딴따라’들은 물론 임진택과 채희완 등 소리꾼과 춤꾼 그리고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등이 올랐다. 양희은은 1979년 초 김민기 노래들로 제작한 앨범(타이틀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에 실린 노래 ‘상록수’ 등을 불렀다. 조동진은 노래굿 제작에 밴드 ‘동방의 빛’과 함께 참여했던 의리 있고 지조 있는 ‘딴따라’였다. 1970년대 ‘한국 포크’ 그리고 1980년대 이후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대부였다. 2018년 김민기와 함께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던 그는 2017년 김민기보다 7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공연장에서 김민기는 공연 내내 무대 밑 마이크 선을 정리하거나 조명을 점검하는 스태프로 일했다. 쏟아지는 호명에도 얼굴을 감추고 있다가, 공연 막바지에 무대에 올랐다. 4곡을 내리 부르고 내려가려 했지만, 쏟아지는 관객의 성화에 5곡을 더 불러야 했다. 기금 마련 공연이었으니 표가 많이 팔려야 했다. 장애물이 많았다. 가장 큰 장애물은 ‘김민기’였다. 그는 여전히 요시찰 대상이었고, 당시는 여전히 계엄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이 무너졌다지만, 정치권은 군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게다가 김민기는 소리굿 공연 이후 공개적으로 그의 이름을 어디에도 올린 적이 없었다. 올릴 수도 없었다. 웬만한 연예인이라면 잊히고도 남을 만큼 오랜 시간이 흘렀다. 잊히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이름을 앞세워 홍보할 수도 없었다. 공연 프로그램 어디에도 그의 이름 석 자가 없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저 대학가 노래패와 교회 그리고 학생운동권 서클 조직을 통해 알음알음 알려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공연은 대박이었다. 삽시간에 입장권 3천 장이 동이 났다. 미처 예매하지 못한 젊은이들이 현장 매표를 위해 정동 문화체육관 앞으로 몰려왔고, 경찰도 덩달아 몰려왔다. 암표까지 극성했다. 공연 수입은 애초 기대한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300만 원이나 됐다. 당시 강남 아파트 한 채 값에 해당하는 돈이었다고 한다. 정병호, 이기범 등은 구청장을 지낸 학교 선배의 소개로 관악구청과 협의해 신림동의 대표적인 달동네인 낙골(난곡동) 국유지에 기부채납 형식으로 해송어린이집(유아원)을 건립했다. ‘해송’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대 아동문학가 마해송 선생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김민기와 각별했던 정병호의 생전 모습. 정병호는  김민기 못지 않게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80년 난곡에 해송유아원(어린이집)을 만들었고,  협동조합형 어린이집을 설립해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김민기가 세상을 떠난뒤 4개월후인 2024년 12월 8일 사망했다. 사진: 어린이어깨동무제공 해송유아원은 금방 입소문을 탔다. 1982년 전두환 정권의 서울시는 모범 어린이집으로 선정했고, 1983년 전두환 부인 이순자가 이 ‘모범 어린이집’을 방문했다. 그런데 해송을 방문하고는 이순자의 마음이 동했다. 무언가 자신도 내세우고, ‘5공’에 도움이 될 만한 일거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얼마지 않아 ‘새마을 유아원 사업’ 추진과 관련한 정부 계획이 발표됐다. 해송어린이집은 이 사업의 1호로 찍혀 흡수당했다. ‘전두환 위에 이순자’라는 말이 돌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부지는 관악구청 소유였다. 김민기와 정병호 등이 아무리 증오하는 정권이라도, 이들의 요구를 거절할 순 없었다. 더군다나 이들이 나서서 가난한 아이들을 돌보겠다고 하는데 버틸 순 없었다. 해송 쪽은 설립 취지가 흔들리지 않도록 일부 운영자들이 그곳에 남아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일터에서 쫓겨난 해직 여성 노동자를 상대로 한 돌봄 연수도 계속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정부 지원을 끌어내 1984년 종로구 창신동에 ‘해송아기둥지’를 설립했다. 당시 창신동은 청계천 평화시장에 기대어 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달동네였다. 창신국민학교는 서울에서, 아니 전국에서 가장 학생 수가 많은 학교로 소문나 있었다. 해송어린이집은 1980년대 선을 보이기 시작한 공동육아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정병호는 이후 협동조합형 어린이집을 설립하고, 공동육아의 전도사가 되었다. 현재 공동육아 공동체교육 현장은 100곳이 넘는다. 그는 또 늘푸른 학교, 하나둘학교 등 대안학교를 설립해 탈북 청소년들의 사회 적응을 도왔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어린이어깨동무 이사로 북한 어린이 돕기나 남북 어린이 문화교류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이승만과 박정희를 ‘아버지’로 모시는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물거품이 되거나 시달림을 당했다. 김민기는 아이 많은 집에서 태어났다. 누나나 형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집안은 10남매로 북적거렸다. 김민기에게 가장 아름답고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곧 형과 누나들이 공부하러 혹은 직장 다니러 서울로 떠나자, 그는 엄마와 달랑 둘이 지내야 했다. 어머니는 수시로 아이를 받으러 가야 했으니, 혼자 집을 지켜야 하는 일이 많았다. 여름날 그 길고 긴 한낮의 외로움, 겨울철 그 춥고 긴 저녁의 그리움이 뼛속 깊이 새겨지던 날들이었다. 아마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일하는 아이, 외로운 아이, 훌쩍이는 아이만 보면 대뜸 제 눈시울이 붉어졌다. 기금 마련 콘서트 이후에도 김민기는 해송과 그 아이들을 각별하게 챙겼다. 농사를 지어 쌀을 수확하게 되면, 다만 몇 가마라도 해송에 보냈다. 몇 푼이라도 돈이 생기면 해송을 후원했다. 허투루 연락하는 일이 별로 없는 김민기였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가며 아이들 이야기, 어린이집 소식을 묻고 들었다. 정병호는 김민기가 세상을 떠나고 넉 달 보름 뒤 그 뒤를 따라갔다. 사랑하는 이들은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나가고 또 따라가는가 보다고, 그의 절친 정유성(전 서강대 교육학과 교수, 평화디딤돌 공동대표)과 남은 이들은 말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최근 3주간 링크를 확인한 사용자 수

검색 키워드


주소 : (12096) 경기도 남양주시 순화궁로 418 현대그리너리캠퍼스 B-02-19호
전화: +82-70-8692-0392
Email: help@treeple.net

© 2016~2026. TreepleN Co.,Ltd. All Right Reserved. / System Updated

회사소개 / 서비스소개 / 문의하기 /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