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의 양면…‘백구’의 서정과 ‘서울로 가는 길’의 비창 [사람들] ‘10월 유신’ 이후 발매된 몇 안 되는 음반 중에는 양희은의 이 있다. 번안곡 ‘저 부는 바람’과 ‘아름다운 것들’ ‘등대지기’를 제외하면 모두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노래를 양희은의 목소리로 수록한 앨범이다.
음반은 공교롭게도 유신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인 12월 2일 발매됐다. 10월 17일 계엄령과 함께 ‘유신’이 선포되고, 유신헌법(안) 공고(10월 27일), 국민투표(11월 21일) 그리고 유신헌법 공포(12월 27일)로 이어지는 역사적 퇴행 속에서 기획, 녹음, 제작이 이루어졌다. 박정희의 친위 쿠데타가 한편의 지옥도를 만들어내는 상황인데, 이 음반 수록곡들은 아름답고 동화적인 풍경으로 가득하다.
양희은 2집앨범. 1972년 발매된 양희은 고운노래모음 제2집에는 김민기가 지은 동심 가득한 백구는 물론, 노동자들의 삶을 다룬 서울로 가는 길이 실려 있다.
김민기 노래들은 1971년 10월 그의 앨범 가 출시되고부터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사이 1년여 동안에 작곡됐다. 유신과 겹치지 않지만, 유신에 이르기까지 1년 동안 비상사태 선포, 국가보위특별조치법 날치기, 각종 멸공 관제 궐기대회, 7·4 남북공동성명, 기만적인 남북 협상 등 박정희 정권의 음모와 협잡과 공포 정치가 난무하던 시기였다.
그 꼴을 보며 김민기는 한편으론 ‘두리번거리다’ ‘그 사이’ ‘서울로 가는 길’ ‘아무도 아무 데도’ 등 시대를 직시하고 나를 성찰하며 이웃을 연민하는 노래를 지었다. 다른 한편에선 양희은 2집이 보여주듯이 ‘인형’ ‘작은 연못’ ‘백구’ ‘새벽길’ 등 서정이 가득한, 어른들을 위한 동화 같은 노래도 만들었다. 참혹한 시대 상황을 떠올리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김민기는 평소 수행자처럼 무표정하거나 무뚝뚝하다 못해 때론 화난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에게 아이의 순수한 서정이 어쩌면 저렇게 남아 있는 것인지, 그 험악한 시국 상황에서 제 마음속 ‘천진한 소년’을 어쩌면 그렇게 태연하게 표현할 수 있을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1968년 한국의 문화계 특히 문학계엔 순수‧참여 논쟁이 휩쓸었다. 김수영은 이른바 ‘순수문학’을 사회적 억압과 모순을 외면한, 불의한 권력에 대한 부역이며 기회주의적 작가의 도피라고 비판했다. 1970년대 초엔 그런 김수영을 도마에 올린 ‘리얼리즘 논쟁’이 벌어졌다. 사회 현실의 부조리와 모순을 직시하고 드러내기보다 자신에 대한 성찰과 비판에 매몰된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김민기는 ‘어린이’ 뒤에 숨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의문은 1980년대 중후반의 김민기를 지켜보던 이들 사이에서도 제기됐다. 2000년대 ‘학전’ 시절에도 제기된 의문이었다.
1980년대 전두환의 폭정이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능가할 때였다. 민중가요 혹은 투쟁의 노래 수요가 폭증했다. 그러나 김민기는 나 등 어린이 뮤지컬, 음악극, 연가극 제작에 전념했다. 운동권 선후배들이 그에게 기대했던 투쟁가는 나오지 않았다.
오랫동안 그를 따랐고, 또 그와 함께 작업했던 후배들은 당황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광주 학살의 살인마와 맞서는 것이었다. 그들의 기대는 곧 날 선 비판으로 변했다. 1970년대 그와 그의 친구들이 이끌었던 문화운동 패들의 비판도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오불관언, 대꾸 한 마디 하지 않았다. 문화운동 단체 가입 요청도 거절했다. 그리고 ‘학전’ 시절엔 아예 ‘어린이’에게 ‘몰빵’하다시피 했다. 그가 쌓아 올린 한국 공연 예술의 금자탑이자 신화였던 ‘학전’이 경제적으로 거덜 날 지경에 몰렸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로지 어린이 극, 어린이 뮤지컬에 모든 걸 쏟아부었다.
김민기는 아이들에게 진심이었다. 엄혹한 시절인 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도 2000년 학전시절도 변하지 않았다. 사진은 2024년 3월 학전이 문을 닫은 뒤 그해 7월 17일 학전의 역사성과 김민기의 정신을 잇기 위해 아르코(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가 임차해 새롭게 단장한 꿈밭극장 개관식 모습. 사진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는 마음 가는 대로 살았다. 아니, 마음이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무리 주변의 시선이 따갑고 친구들의 재촉이 심해도, 제 마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인지 몰라도 ‘아이’는 그에게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3000여 명의 아이를 받아낸 어머니처럼 그는 세상의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들을 보듬어야 했다.
그의 첫 음반이 정권에 의해 박살 나면서 ‘김민기’ 이름 석 자도 방송이나 노래판에서 지워졌다. 공개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행히 가까이에 양희은이 있었다. 제 노래의 주인은 양희은이었다. 저보다 백 배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양희은과 작업하는 일이 잦아졌다. 따로 작업할 곳도 없어, 양희은의 집에 드나드는 일이 많아졌다. 미심쩍게 바라보는 시선이 있을 정도였다. 양희은도 회고했지만, 김민기는 참으로 멋대가리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작업을 같이하면서도 양희은과는 노래 이외에는 아무런 이야기가 없었다.
한번은 양희은 집에서 이리저리 기웃하고 있었다. 막냇동생 책상에서 삐뚤빼뚤 글씨가 빼곡한 연습장이 눈에 띄었다. 양희은 막냇동생이 쓴 글이었다. 그 중엔 이런 글이 있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교통사고로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이야기였다.
털이 하얘 이름이 백구인 그 개는 새끼를 여럿 낳아 막내가 알뜰살뜰 보살피고 있었다. 아이가 학교에 가면 학교 앞 차도에서 아이를 기다리던 개였다. 어느 날 백구는 아이를 기다리던 중 그만 차에 치였다. 아이와 식구들의 극진한 보살핌과 간절한 기도에도 백구는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 사연을 글로 남긴 것이었다.
김민기는 그 자리에서 ‘필’이 꽂혔다. 익산의 어린 시절 그에게도 단짝이었던 강아지가 있었다. 이야기를 노래에 어울리게 다듬고, 정리된 노랫말에 선율을 입혔다. 이야기를 담자니 단형의 노래치고는 너무 길어, 짧은 노래극이 되었다. 공연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으니, 그대로 두었다. 서사는 이렇게 조금 각색돼 있었다.
어느 가을, 영영 헤어지던 날이었다. 출산 후유증으로 쓰러져 누운 백구, 병원까지 갔지만 주사 맞기 싫어 뛰쳐나가 아이의 학교로 갔다가 학교 앞길에서 차에 치여 무지개다리를 건너간 백구, 그를 뒷산에 묻어주고 돌아온 밤 꿈속에 철 이른 하얀 눈이 내려 소복이 쌓였다.
노래 속에서 아이는 김민기 자신이기도 하고, 양희은의 막냇동생이기도 했다. 노래 속의 아이는 울지도 않고, 남을 울리지도 않는다. 늙은 아이처럼 담담하게 기억하고 추억할 뿐이다. 그 잔잔함이 오히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후배 가수들의 마음을 뜨겁게 울렸나 보다.
백구는 2002년 그림책으로 출간됐다.
40~50년이 지난 뒤였다. 촉망받던 후배 가수 조규찬은 이 노래가 그렇게 가슴에 와닿을 수 없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노래가 끝나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슬퍼지고 더 가슴에 사무치고, 지나간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이 마구 솟아나는 노래여서,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죠.” 단순히 ‘훌륭하다’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온기’를 느끼게 한다고도 했다.
노래 ‘인형’이 나온 것도 그즈음이었다. 아가옷을 입힐까 색동저고리 입히지/ 치만 뭘로 할까 청바지로 하지/ 청바지에 색동옷 입고 하하하하 바보 인형아/ 색종이를 오려서 예쁜 인형 만들어/ 선생님께 보이고 엄마한테 드려야지”(1절)
아이로 돌아가 아이가 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서정이었다. 정권의 폭력이 미친 바람처럼 몰아치는 상황에서도 김민기는 마음속 깊은 곳에 흐르는 동심이, 어디선가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걸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이런 서정은 평생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아이’와 함께 가고 또 시대를 살았다.
무엇 하나 그의 이름으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전두환의 5공 시절, 울타리 없는 감옥이었지만, 그는 노래극 부터 제작하려 했고, 이농과 농촌의 붕괴에 따른 아이들의 고통을 담은 연가곡 ‘엄마, 우리 엄마’를 지었으며, 사잣밥을 먹어야 하는 탄광 광부 아이들의 일상을 담은 노래극 를 지었다. 군사정권에 막혀 올리지 못해도, 또 짓고 만들었다. ‘학전’은 어린이 청소년 연극, 뮤지컬 불모지에 그 씨앗을 심고 또 심고 기르려다가 결국 극단과 극장의 문을 닫아야 했다.
그렇다고 동심의 서정에만 매달린 것도 아니었다. 그는 스물두 살 청년이었다. 권력의 불의에 피가 거꾸로 솟고, 이웃의 고통에 가슴이 저린 나이였다. 1972년 여름 김민기는 앞으로 그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버린 작지만, 충격적인 ‘사건’에 직면했다. 경상남도 마산에 갔을 때였다.
마산 국립결핵요양원이 있고, 마산수출자유지역이 있던 곳이었다. 요양원 안 가톨릭 공소에서는 가끔, ‘생환하기 힘든 환자’들을 위로하는 음악회를 열었다. 그해엔 당시 최고의 청춘스타 양희은과 베일에 가려진 인물 김민기를 초청했다. 노동 사목을 하던 가톨릭노동청년회(JOC)가 나서고 당시 대중음악계의 큰손이었던 이종환이 주선했다. 김민기와 양희은은 이 뜻하지 않은 초청에 반색했다. 요양원은 다름 아닌 김지하가 위리안치된 유배지였다.
김지하는 1972년 4월, 가톨릭 잡지 4월호에 실린 필화 사건으로 쫓기다가 그의 지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다 못해 제 발로 걸어가 잡혔다. 당시 김지하는 1970년 필화 사건으로 선고유예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와 병합해 재판을 받으면 중형을 피할 수 없었다. 김수환 추기경 등 가톨릭계가 나섰고, 중앙정보부 내부에서도 ‘말 많은 문인을 건드리면 건드릴수록 커진다’라는 의견이 많았다. 중정은 주리를 틀고 싶었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해 결핵 요양원에 연금하는 것으로 절충했다(이종찬 전 국정원장).
김수환 추기경과 김지하는 1972년 김민기와 양희은이 출연한 마산국림결핵요양원 음악회에서 처음 만나 가까워졌다. 사진은 1973년 4월 7일 서울명동성당에서 김수환 추기경(오른쪽) 주례로 김지하와 김영주가 결혼식을 올린 뒤 찍은 기념사진. 사진출처: 동아일보(김지하 제공)
음악회엔 뜻밖에도 귀한 손님이 와 있었다. 서울대교구 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그날 부산에서 있었던 약속까지 미루면서 음악회에 참석했다. 김지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터에 좋은 핑계가 생긴 것이었다. 김지하는 1971년부터 가톨릭과 연계한 각종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원주교구의 반부패 궐기대회, 크리스천 문화운동, 서울대교구가 관할하는 잡지 의 ‘비어’ 게재 등이 그것이었다. 김 추기경과 김지하는 대면한 적은 없지만, 젊은 추기경과 젊은 시인은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66년 주교가 되면서 초대 마산 교구장에 보임됐다. 1968년 대주교로 승품되면서 서울대교구장이 되었고 이듬해 한국의 첫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그는 마산 교구장 시절 여러분과 또한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사목 표어를 내걸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교회는 세상과 대화하거나 삶을 나누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으며, 세상사에 무관심한 채 교회를 위한 교회에 머물러 있었다’.(김수환 회고록)
김 추기경은 마산 교구장 시절 노동 현장의 복음화를 위해 조직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총재 주교를 겸임하고도 있었다. 1967년 노동조합 설립을 탄압하고 노조원을 용공 분자로 몰아 탄압했던 강화도 ‘심도직물 사건’에 한국 천주교가 개입해 노동자의 승리로 이끌게 한 것은 거지반 그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이 사건이 터지자, 사회정의와 노동자 권익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성명서 발표를 끌어냈다. 한국 천주교의 첫 대사회적 발언이었다.
음악회가 끝날 즈음이었다. 김민기와 가수 양희은이 환자들과 함께 ‘아침이슬’을 부르고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김지하는 등에 누군가의 묵직한 기운이 느껴져 돌아보니” 김수환 추기경이 있었다.
김지하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 꾸벅 인사를 했다.
추기경을 뵌 것은 그날 처음이었지만 사진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다. 추기경은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내게 ‘김 시인이지요?’라며 악수를 청했다. 그러고 나서는 갑자기 목에 감겨있던 흰 로만 칼라를 잡아떼어 버렸다. 순간, 나는 너무 놀랍기도 하고 감동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바티칸 계급장’을 떼어 놓고 마음을 열고 싶다는 뜻으로 읽혔기 때문이다.”
음악회가 끝난 뒤 둘은 김지하의 병실에서 밤늦도록 시국 상황과 한국 천주교가 할 일을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추기경께서 먼저 내게 물으셨다. ‘우리는 분단국가다. 가톨릭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김 시인이 ‘오적’에 이어 가톨릭 잡지인 에서 ‘비어’로 다시 칼을 뺐다. …이 분단된 나라에서 가톨릭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우리까지 나서서 정부를 반대하면 큰 혼란이 오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다.’”
나는 그 뒤로도 서울 외곽의 수도원에서 밤샘하며 추기경님과 여러 번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느꼈던 감정을 한마디로 줄이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우리 생전에 이런 분과 함께 숨 쉬며, 동시대를 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이다.’”
김지하와 김 추기경이 마음속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민기는 가톨릭노동청년회 회원 노동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갔다. 요양원에서 가까운, 마산의 대표적인 휴양지 가포해수욕장이었다. 그 자리에서였다.
마침, 바다는 저녁놀에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고, 그 위로 고깃배가 하나둘 포구로 돌아오고 있었다. 민기의 입에서는 무심코 이런 찬탄이 튀어나왔다.
야, 참 멋있다.”
그림을 평생의 업으로 삼고자 했지만, 오랫동안 그 평화로운 장면을 볼 수 없었던 그로서는 풍경 속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곁에 있던 수출공단 노동자들에게는 참으로 배부른 감상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결성 즉 가장 초보적인 단결권조차 봉쇄된 공단의 노동자였다. 한 여성 노동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꾸했다. 그에게서 ‘서러움 모두 버리고 광야로 나선 메시아’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듯 몹시 실망한 목소리였다.
그 사람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에요. 뭐가 멋있다는 거죠?”
손에 기름때 한 번 묻히지 않은 ‘철없는 대학생’은 뒤통수를 철퇴로 맞은 듯했다”.
‘난 아직 멀었구나.’
이때 받은 충격은 그의 삶을 밑바닥부터 흔들었다. 소시민의 허황된 감상, 지식인의 현실에서 유리된 사고, 배부른 자들의 얄팍한 동정 등에 대한 반성이 밀려왔다. 김민기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라고 했다. 그날 그 경험이 자신의 감성과 사고, 태도와 행동을 근본적으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광부의 애환과 탄광촌 아이들의 동심을 그린 어린이 극, 아빠 얼굴 예쁘네요. 사진은 학전에서 공연한 아빠 얼굴 예쁘네요 포스터. 사진출처: 학전
그는 서울로 돌아오면서 바로 그 여성 노동자가 늙은 부모를 두고 농촌에서 마산으로, 공단으로 떠밀려온 배경과 과정, 그리고 공순이로 살아가는 삶을 돌아보았다.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래 ‘서울로 가는 길’은 그렇게 탄생했다. ‘서울로 가는 길’은 앞서 나왔 그의 다른 노래들과 달랐다. 은유적이지도 않고, 성찰적이지도 않았으며, 내면으로 침잠하지도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았다.
당시 박정희의 수출 주도, 고도성장은 농촌과 농민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다. 가발, 섬유, 피혁 등 노동집약적 상품을 수출해 이룬 것인데, 그것은 노동자의 초저임금, 노동자의 피땀 위에서만 가능했다. 초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해선 노동력을 계속 공급해야 했고, 이를 위해선 농민들을 도시로 끌어와야 했다. 그러자면 농촌이 파탄 나야 했고, 농사로는 살기 어려워야 했다. 가장 빠른 길은 생산비 이하의 저곡가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노동자를 초저임금으로 부려 먹기 위해서도 ‘저곡가’는 불가피했다.
초저임금으로 유지되는 수출 주도 고도성장의 부담은 노동자와 농민이 분담하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농촌은 시간이 갈수록 더 피폐해졌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살기 위해서라도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도시로 떠나야 했다.
‘서울로 가는 길’이 그린 풍경은 늙고 병들어 일할 수 없는 부모를 두고 고향을 떠나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가 맞닥트린 시대 상황이었다. 그것은 ‘비어’ 속의 한 주인공 ‘안도’가 처한 현실이었고, 마산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의 삶이었다.
일부에선 한때 농촌 현실을 그린 그의 노래들을 두고, 산업사회에서 ‘브나로드’(농촌 속으로)를 외치는 ‘시대착오적 감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당대의 모순이 집약되는 도시 노동자의 삶이 아니라, 어차피 쇠락할 수밖에 없고 해체될 수밖에 없는 농촌에 대한 향수에 매달려서야 무슨 변화를 이룰 수 있겠느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이농과 농촌의 파괴는 자본주의의 자연스러운 이행이 아니라, 정부 정책에 의한 강제적인 해체이고, 강요된 디아스포라였다. 한 사회의 총체성을 드러내고 표현하려는 리얼리스트라면 외면해서는 안 되는, 시대의 가장 중요한 단면이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