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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한글날 100주년, ‘광화문’ 한글 현판 선물은 어떤가

한글날 100주년, ‘광화문’ 한글 현판 선물은 어떤가
[뉴스]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580년 전 세종대왕이 창제한 것은 훈민정음이었지요. 한문을 쓸 줄 모르는 어린 백성 을 가르치기 위한 글자였습니다. 조선 왕조에서 훈민정음의 반포를 기념한 적도 없었어요. 훈민정음이 계승되었던 것은, 여성과 민중들에 의해서였습니다. 일부 예외도 있었지만 양반 남성들 대부분은 사용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언문’이니 ‘암클’이라는 표현으로 불렀어요. 그러니 우리가 정말 오늘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어 고마워해야 할 분들은, 세종대왕뿐 아니라 조선의 여성과 민중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문화사에 있어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울러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한글이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내고, 지속적인 연구와 보급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 준 한글학자들에게 감사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0년 전 ‘가갸날’의 탄생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조선이 청으로부터 독립 하게 되자, 국문 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중국으로부터 문화적 독립을 꾀했습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나라의 글 이 된 것이지요.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며 국문을 연구하기 시작했던 주시경이, 한글 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13년입니다. 하지만 한글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던 것은 불과 100년 전이었어요.   주시경 선생 1926년 11월 4일에 조선어연구회가 훈민정음을 반포한 지 480년, 곧 간지로 여덟 번째 돌아온 해(八回甲)를 기념하여 축하회를 마련했는데요. 그런데 정확한 반포 날짜를 알 수 없어, 세종 29년 음력 9월 그믐날(29일)로 정하고, 그해의 양력으로 환산하여 11월 4일이 되었던 것입니다. 식도원에서 열린 축하회는 400여명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지요. 11월 6일에는 ‘언문(諺文)이라고 멸시를 받고 학대 받던’ 조선어 강연회와 강습회도 진행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아직 일반인들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한글날 대신에 ‘가갸날’이라는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농촌의 문맹 타파를 목적으로 가갸문 강습회를 개최하는 등 적극적 활동을 하려면 당시 대중에게 익숙한 ‘가갸’라는 이름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요.   훈민정음 반포 팔회갑 축하연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가갸날’에 대한 만해 한용운의 벅찬 감회 만해 한용운은 기념식이 있은 지 한 달 뒤에 가갸날에 대하여”(『동아일보』 1926. 12. 7.)라는 글을 발표했는데요. ‘그 모습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 한 편으로는 바야흐로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라고 하면서, 시인답게 끝 부분에 가갸날에 대한 벅찬 감회를 시로 읊었습니다. 당시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 원문을 그래도 인용할게요.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이   씨슨  이 위에 가갸날이 낫서요 가갸날/끗 엄는 바다에 쑥 소서오르는 해처럼/ 힘 잇고 빗나고 두렷한 가갸날 데이 보다 읽기 조코 씨슨 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젓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젓꼭지를 만지는 어엽분 아기도 일너 줄 수 잇서요/ 아모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아르켜 줄 수 잇서요/ 가갸 로 말을 하고 글을 쓰서요/ 혀끝에서 물ㅅ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여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온 목숨이 사러 움직임니다/ 그 속엔 낫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니면서 감겨 잇서요/ 굿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야요/ 왼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 을 노래하게 하야 주서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어   훈민정음 해례본 발견으로 10월 9일로 확정된 한글날 1928년 음력 9월 29일이었던 11월 11일에 처음 한글날이라는 이름으로 기념식을 치렀고, 1930년의 기념식 자리에서 양력 10월 28일에 지내기로 했다가, 수학 전문가에 의뢰한 결과에 따라 1931년에는 10월 29일에 기념식을 가졌어요. 그런데 또다시 이의가 제기되어 1934년부터는 10월 28일에 기념식을 하는 혼선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한글날에 발표함으로써 한글날의 위상은 더욱 굳건해졌습니다. 그러나 1937년부터 1944년까지는 기념식을 갖지 못했어요. 중일전쟁 이후 일제가 집회를 금지했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1942년 10월 1일에 시작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학회의 중심 인사들이 1945년 광복이 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35년 현충사를 방문한 조선어학회 사정위원회 위원들.. 그런데 1940년 7월에 경북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었어요. 그 책의 끝부분에 ‘정통(正統) 11년 9월 상한(上澣)’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조선어학회에서는 1446년 9월의 상순 가운데 가장 마지막 날인 음력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로 훈민정음 반포일로 정했습니다. 그리고 광복이 되자 그 해부터 이날에 기념식을 가졌어요.   훈민정음 해례본 공휴일 지정 둘러싼 한글날의 우여곡절 1946년은 바로 훈민정음 반포 500돌이 되는 해였습니다. 미군정청에서는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였어요. 조선어학회가 ‘한글반포 50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행사를 마련했어요. 10월 9일 덕수궁에서 열린 경축식은 세종대왕릉까지 달려갔다가 돌아온 『훈민정음 해례본』의 마지막 봉송 주자 손기정 마라톤 선수가 들어오면서 시작했다고 합니다. 1949년 6월 4일에 대통령령으로 정해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건」을 통해 한글날이 ‘법정 공휴일’이 됐는데요. 1982년에 「각종 기념일 등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면서, 기념일에 한글날이 추가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글날이 단지 ‘공휴일’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었는데, 이로써 당당하게 ‘정부 지정 기념일’이라는 법적 지위까지 얻게 된 것이지요. 하지만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 활동에 지장이 많다는 경제 단체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휴일에서 제외했습니다. 따라서 1991년부터 2005년까지 한글날은 ‘기념일’에 불과했어요. 그러다가 2005년 12월 국회에서 의결한 「국경일에 관한 법률」개정안을 노무현 대통령이 재가하여, 2006년부터는 한글날이 국경일로 되어 경축식을 거행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글날은 ’쉬지 않는 국경일‘에 머물렀고, 다시 공휴일로 재지정하자는 움직임이 나타났어요. 그 결과 2012년 11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한글날 공휴일 지정 촉구 결의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이번에도 경제계의 생산성 감소를 우려한 반대 의견이 있었으나, 12월 24일 국무회의를 최종 통과했어요. 그 결과 2013년부터 다시 법정공휴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 한자 현판을 한글로 바꾸는 것은 복원 원칙 아냐” 주장 지난 100년 동안 한글날의 변화를 추적해 보면서, 정말 많은 분들의 노력으로 이날을 공휴일로 쉬게 되었음에 감사하게 되는데요. 동시에 현재 한글을 둘러싼 가장 큰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는 광화문의 한글 현판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최근 대통령은 한글운동단체에서 꾸준하게 제기해 왔던 병기를 제안했어요. 하지만 문체부 장관은 또다시 공론화 과정을 제시했습니다.   26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백양누리홀에서 열린 ‘광화문 현판 한글 병기해야 할까요’ 토론회 2026. 7. 26 그런데 반대하는 분들은 국가 지정 유산 복원의 핵심 원칙은 ‘역사적 사실 그대로의 복원’이라는 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고증에 없는 한글 현판을 더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거나 변형하는 행위라는 것이지요. 조선시대 당시의 공식 문자인 한자와 유교적 통치 이념이 반영된 표기를 현대의 관점으로 지우거나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서 있는 광화문은 고종 시절에 중건되었던 광화문이 아니지요. 현판 글씨도 원형이 아니라 사진을 토대로 복원한 것입니다. 글씨를 썼던 임태영은 당대의 명필도 아니었고, 당시 무과 출신의 훈련대장으로 군인들을 동원했던 책임자였을 뿐이었어요. 그러니까 최고 권력자가 자신이 신임하는 경복궁 중건 현장사무소장에게 현판을 쓰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훈련대장이 쓴 한자 현판, 독재자가 쓴 한글 현판 게다가 그는 철종 시기였던 1860년에 정부 차원의 박해 명령이 없었음에도, 개인적인 반감으로 천주교도들을 대거 체포해서 30여   명을 죽였던 경신박해의 주도자였어요. 그 결과 그는 포도대장에서 해임되었고, 후임이 임명되면서 박해는 중단되었습니다. 그랬던 그를 흥선대원군이 왕의 아버지라는 이유로 국정을 농단하면서 다시 훈련대장에 등용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왜 그런 인물이 쓴 글씨를, 원래의 현판도 없어진 지금 굳이 사진을 보고 복원했다고 2026년의 광화문에 걸어야 하는 것이 납득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이 과거 일제가 광화문을 헐어서 옮겼을 때, 또는 1968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했던 광화문에 자신이 쓴 한글 현판을 내걸어 38년간 유지했을 때 공개적으로 반대했습니까?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 문화재청이 고종 대 경복궁 중건 당시의 모습으로 완전 복원한다 는 방침을 세웠고, 2006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현판을 내려 철거한 뒤, 2010년 현재의 목조 구조와 임태영의 글씨로 되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물론 글씨를 잘 쓰지도 못하는 권력자가, 직접 현판을 쓴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행태라고 할 수 없었어요.   광화문 현판의 변천사. 왜 문제투성이 조선시대 한자 현판에 집착할까 그런데 임태영의 직접적인 필묵이나 원본 현판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문화재청은 1916년에 촬영된 광화문 유리건판 사진을 바탕으로 글자의 윤곽을 정밀 디지털 분석했다면서, 2010년 1차 복원에서는 흰색 바탕에 검은색 글씨로 제작했어요. 하지만 목재 균열과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 소장 1890년대 흑백 사진을 분석한 결과, 바탕색 오류가 지적되었습니다. 그 결과 2023년 10월에 검은색 바탕에 금박 한자 글씨 로 짠 새 현판을 완성하여 다시 내걸었어요. 문화재 전문가를 자처하는 이들이,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면서 임태영의 글씨를 그대로 걸겠다는 것은 오만이자 편견에 불과합니다. 지금이 조선왕조도 아닌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인데, 당연히 누구나 알아 볼 수 있는 한글로 현판을 걸어야 마땅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글운동단체들을 비롯하여 한글을 사랑하는 국민들이 타협안으로 병기를 건의했지만 그것마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원래는 현재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한글서예가가 쓴 글씨를 걸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어렵다면 병기라도 반드시 이루어야 합니다. 또다시 공론에 부친다는 말 하지 말고, 이번에는 확실하게 추진해 주기를 바랍니다.주진오 한국현재사 formch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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