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교향곡 21년 묵힌 완벽주의자, 요하네스 브람스 [사람들] 가난한 항구도시의 건반 소년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독일 함부르크의 가난한 악사집안에서 태어나 독일 낭만주의 후기음악을 대표하게 된 작곡가다. 어린 시절 항구 술집에서 건반을 두드려 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사실이냐를 두고는 말이 갈린다. 확실한 건 금수저 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이다. 스무 살 때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을 찾아갔다가 새로운 길을 열 젊은이 라는 극찬을 받았으니, 면접도 보기 전에 추천서부터 받은 셈이다. 슈만이 세상을 뜬 뒤에는 그의 아내 클라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과 아이들 곁을 오래도록 지켰다.
브람스(위키피디아)
태워 버린 악보와 21년 걸린 교향곡
브람스의 완벽주의도 병이었다.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악보는 불쏘시개로 썼고, 현악 사중주 악보를 스무 곡 가까이 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교향곡은 더 심했다. 루트비히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을 두고 등 뒤에서 거인의 발소리가 들린다 며 끙끙대더니, 구상한 지 스물한 해가 지난 1876년에야 첫 교향곡을 내놓았다. 한스 폰 뷜로(Hans von Bülow, 1830~1894)는 이 곡을 베토벤의 열 번째 라 불렀다. 끝 악장 가락이 베토벤의 교향곡 9번과 닮았다는 말에는 그건 당나귀도 알아본다 고 받아쳤다. 닮은 걸 들키고도 이만큼 당당하면 변명보다 차라리 시원하다.
1891년에 촬영된 함부르크 소재 브람스 생가 건물. 이 건물은 1943년 폭격으로 파괴되었다(위키피디아)
독설가의 주머니엔 사탕이 있었다
브람스의 입은 칼이었다. 잔치를 떠나며 여기 아직 내가 모욕하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사과드린다 고 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런데 주머니에는 길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줄 사탕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검소하게 살면서 가난한 학생들을 남모르게 도왔다. 1870년대 중반에는 오스트리아 정부 장학금 심사에 참여해 보헤미아의 가난한 청년 안토닌 드보르자크(Antonín Dvořák, 1841~1904)를 눈여겨보고 출판사에 소개해 주었다. 심사위원이 제 할 일을 하면 이렇게 새 재주가 세상에 나온다.
1857년의 클라라 슈만(위키피디아)
보수 딱지와 쇤베르크의 뒤집기
당시 음악계는 두 쪽이었다.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와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쪽은 미래의 음악 을 내걸었고, 옛 형식을 다듬던 브람스 쪽은 보수 취급을 받았다. 에두아르트 한슬리크(Eduard Hanslick, 1825~1904) 같은 비평가가 브람스를 거들자 싸움은 열성 지지층끼리의 다툼으로 번졌다. 1860년 친구 요제프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등과 낸 반대선언문은 서명을 더 모으기도 전에 신문에 새나가 망신만 샀다. 그런데 한참 뒤 아르놀트 쇤베르크(Arnold Schoenberg, 1874~1951)가 「진보주의자 브람스」(Brahms the Progressive)라는 글로 판을 뒤집었다. 옛 형식을 뼛속까지 익힌 사람이 그 안에서 가장 새로운 길을 냈다는 것이다. 딱지가 얼마나 믿을 게 못 되는지 알려 주는 대목이다.
1853년의 브람스(위키피디아)
흠도 있다
브람스는 제국주의자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Otto von Bismarck, 1815~1898)를 우러렀고, 1871년 프랑스와의 전쟁 승리를 기리는 「승리의 노래」(Triumphlied)를 지어 빌헬름 1세(Wilhelm I, 1797~1888)에게 바쳤다. 큰 예술가도 권력의 승전잔치에 노래를 얹을 수 있다는 서늘한 증거다. 한편 「헝가리 춤곡」은 헝가리 연주가 에데 레메니(Ede Reményi, 1828~1898)에게 배운 가락이 바탕인데, 브람스는 이를 창작이 아닌 편곡 이라 적고 작품번호도 붙이지 않았다. 출처를 밝히는 정직함이다.
1852년 헝가리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가 에데 레메니(왼쪽)와 브람스(위키피디아)
산 자를 위한 진혼곡
브람스의 대표작 「독일 진혼곡」(Ein deutsches Requiem)은 1868년 브레멘에서 초연됐다. 라틴어 예배문 대신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옮긴 독일어 성서에서 구절을 직접 골랐고, 죽은 이를 심판하기보다 남은 사람을 달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곡에는 브람스가 어머니를 여읜 슬픔이 배어 있다고들 한다. 곡 전체가 울고 있는 사람 곁에 말없이 앉아 주는 노래인 셈이다.
1872년경의 브람스(위키피디아)
한국에서 곱씹을 것
첫째, 숙성이다. 2024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이후 개헌, 사법개혁, 내란청산까지 할 일이 산더미다. 이럴수록 법안을 하룻밤에 구워 내는 졸속은 곤란하다. 스물한 해를 묵힌 브람스의 교향곡이 지금도 연주되는 까닭이다. 다만 숙성은 미루기와 다르다. 책임을 묻는 일은 미루지 말고, 제도설계는 충분히 따져 가며 해야 한다.
둘째, 딱지다. 브람스는 옛 형식을 지키면서 내용은 새롭게 채웠다. 보수란 본래 지킬 것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헌법이 정한 질서를 무너뜨린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두고 계몽령 이라 우기는 이들이 보수를 자처한다. 지킬 것이 헌법이라면 보수의 자리는 계엄을 막는 쪽이어야 맞다.
셋째, 권력 곁의 붓과 입이다. 브람스의 「승리의 노래」는 음악의 대가도 권력 앞에서 흔들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윤석열의 비상계엄을 두둔하는 궤변에 장단을 맞춘 지식인, 연예인과 이름난 말꾼들은 훗날 제 이름 옆에 영원히 붙을 무서운 역사의 꼬리표를 헤아려 보는 게 좋겠다. 반대로 심사위원 브람스는 이념이 아니라 실력으로 드보르자크를 골랐다. 예술인을 이념으로 가려 블랙리스트를 만들던 이명박근혜 정권과 윤석열 정권의 전례를 되풀이하지 않는 길이 여기에 있다. 김건희의 표절 시비에 입을 닫는 풍토에서는 브람스가 편곡이라 적었다 는 한 줄도 새삼 그립다.
넷째, 위로다. 진혼곡은 산 사람을 위로하려고 쓴 노래다. 우리 역사의 비극인 민간인학살, 인권침해,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유족에게 필요한 것도 낭독문이 아니라 진상규명과 가해자에 대한 철저한 책임추궁이다. 위로는 책임이 따를 때 비로소 노래가 된다.
브람스의 「승리의 노래」도 기록에 남았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빈 중앙 묘지에 있는 브람스 무덤; 빅토르 오르타가 설계한 기념비와 일제 폰 트바르도프스키가 제작한 조각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