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고 엷은 검은빛, 가만빛 [사회혁신] 반갑습니다. 우리말의 결을 살려 마음을 보듬는 ‘토박이말 결지기’입니다.
요즘 ‘빛’이 들어간 우리말을 하나씩 살펴보고 있습니다. 앞서 잘 익은 감의 빛깔을 나타내는 ‘감빛’, 햇빛을 받아 온 세상에 퍼지는 빛을 나타내는 ‘날빛’, 아주 짙게 검붉은 빛깔을 나타내는 ‘거먕빛’을 알려드렸습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가만빛
오늘은 그 뒤를 이어 ‘가만빛’을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둘레 사람들에게 ‘가만빛’이 무슨 뜻 같으냐고 물었더니, 가만히 있어라” 할 때의 ‘가만’과 이어진 말이 아니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서 ‘가만’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가만빛’은 밝고 엷은 검은빛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검은빛에도 여러 모습이 있습니다
검은빛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아주 어두운 빛깔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검은빛도 다 같은 검은빛은 아닙니다. 밝고 엷게 보이는 검은빛이 있는가 하면, 어둡고 짙게 보이는 검은빛도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가만빛’을 ‘밝고 엷은 검은빛’이라고 풀이합니다. 비슷한 말로 ‘가만색’과 ‘담흑빛’도 알려 주고 있습니다. ‘가만빛’이라는 말이 낯설게 느껴지더라도, 그 뜻을 알고 나면 어떤 빛깔인지 조금은 그려 볼 수 있겠지요.
검은 옷을 고를 때를 떠올려 보세요. 어떤 옷은 검은빛이 조금 옅고 밝게 느껴지고, 어떤 옷은 한결 어둡고 짙게 느껴집니다. 그 가운데 밝고 엷은 검은빛을 나타낼 때 ‘가만빛’이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가만빛’과 ‘거먼빛’
우리말에는 홀소리가 달라지면서 말의 느낌이나 뜻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만빛’과 ‘거먼빛’도 그런 보기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가만빛’은 밝고 엷은 검은빛을 가리킵니다. 이에 비해 ‘거먼빛’은 어둡고 엷은 검은빛을 나타냅니다. 두 말은 닮았지만, ‘ㅏ’와 ‘ㅓ’가 달라지면서 빛깔의 느낌도 달라집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저씨는 거먼빛 바지를 즐겨 입으신다”라는 보기 문장이 실려 있습니다. 바지의 빛깔을 나타낼 때 ‘거먼빛’이라는 말을 쓴 것이지요. 이런 보기처럼 두 말을 나란히 살펴보면, 빛깔을 나타내는 우리말이 얼마나 꼼꼼한지 알 수 있습니다.
‘감장’과 ‘검정’, ‘깜장’과 ‘껌정’
검은빛을 나타내는 우리말을 더 살펴보면 재미있는 어울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표준국어대사전은 ‘감장’을 ‘감은 빛깔이나 물감’이라고 풀이합니다. 보기로 ‘감장 치마’를 들고 있지요. 황순원의 소설 《곡예사》에도 ‘감장 조바위’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옷의 빛깔을 나타내는 말로 ‘감장’을 쓴 것입니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감장’의 큰말을 ‘검정’, 센말을 ‘깜장’으로 풀이합니다. 여기서 큰말은 소리가 조금 더 크고 묵직하게 느껴지는 말이고, 센말은 느낌이 더 세게 드러나는 말입니다.
이런 어울림을 살펴보면 ‘검정’의 센말로 ‘껌정’도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말의 짜임을 살펴보며 짐작하는 것과 사전에서 실제 쓰임을 확인하는 것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낱말을 새롭게 만들거나 소개할 때도 이 점을 잊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말에는 이처럼 소리의 다름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말들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이런 말의 어울림을 넉넉하게 배우면, 빛깔을 더 꼼꼼하게 나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말을 생각해 낼 때도 도움이 됩니다.
알고 나면 쓸 수 있는 우리말
‘가만빛’과 ‘거먼빛’은 낯선 말일 수 있습니다. 누리그물(인터넷)에서 ‘가만색’이나 ‘담흑빛’이 쓰인 보기는 더러 찾을 수 있지만, ‘가만빛’이 쓰인 보기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쓸모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모르거나 자주 쓰지 않아 눈에 덜 띌 수도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모든 사람이 낯선 말을 억지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미 말집(사전)에 올라 있는 말을 하나씩 알아 두고, 그 말이 어울리는 자리에 써 보면 좋겠습니다. ‘담흑빛’이나 ‘가만색’이라는 말을 만났을 때 ‘가만빛’도 함께 떠올려 보는 것이지요.
어린 아이들에게도 검은색이라고 한데 묶어 가르치기보다, 밝고 엷은 검은빛과 어둡고 엷은 검은빛이 있다고 알려 주면 빛깔을 더 자세히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감장’과 ‘검정’, ‘깜장’처럼 서로 어울리는 말도 함께 알아보면 우리말의 짜임과 재미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습니다.
[마음 나누기]
여러분은 검은 옷이나 물건을 볼 때 빛깔이 서로 다르다고 느끼신 적이 있나요? 밝고 엷은 검은빛을 만나면 ‘가만빛’이라는 말을, 검은빛을 나타내는 다른 말을 만나면 ‘감장’이나 ‘깜장’도 한번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한 줄 생각]
우리말의 어울림을 하나씩 알아 갈수록, 눈에 보이는 빛깔을 나타내는 말도 더욱 넉넉해집니다.
[오늘의 토박이말]
▶ 가만빛
뜻: 밝고 엷은 검은빛.
비슷한 말: 가만색, 담흑빛.
보기: 가만빛 옷을 입으니 검은 옷인데도 밝고 부드러운 느낌이 났다.”
오늘 한마디: 이 옷은 아주 까맣기보다 가만빛에 가깝네.”
[토박이말 길잡이] 결지기 이창수
이창수 시민기자 maljig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