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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공백 메우고 ‘친일인명사전’ 토대 닦아
[뉴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의 유일로(唯一路)가 있다고.”(이광수, 매일신보 ‘심적 신체제와 조선 문화의 진로’) 지금은 다만 일본 신민일 따름이다. 한 천황 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이다. 내지(內地)와 조선의 구별적 존재를 허락지 않는 한 민족일 뿐이다.”(김동인, 매일신보 ‘감격과 긴장’) 내로라하는 조선 지식인들의 낯뜨거운 친일 아부 마치 백주에 직사하는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려는 어리석은 어린애와 같이 바라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욱 그 열광 앞에서 시력을 잃고 나중에는 눈앞이 캄캄해져서 아무것도 안 뵈는 것과 같이 나와 같은 미천지신(微賤之臣)이 신상에 남아 넘치는 광영을 힘입어 황공하옵게도 폐하를 이처럼 멀지 않은 거리에 모시게 될 때에 내 감격은 너무 높고 컸으며…”(백철, ‘천황 폐하 어친열 특별관함식 배관근기’)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뵈어 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은 충청도 두메의 이름 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묶여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김동환 매일신보 ‘권군취천명’)   친일문학론 에 등장한 주요 문인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광수, 김동인, 백철, 채만식, 노천명, 김동환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노천명, 매일신보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8월 1일로 뜻깊고 감격 큰 조선의 징병제도는 마침내 실시가 되었다. 이로써 조선 땅 2400만의 백성도 누구나가 다 총을 잡고 전선에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 방패가 될 자격이 생겨진 것이다.”(채만식, 매일신보 ‘홍대하옵신 성은’) 친일매국 폭탄 떨어졌는데도 너무나 평온한 세상 일제강점기 독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은 것은 물론 해방 후에도 문단 권력을 거머쥐고 잘난 체하던 이들의 치부가 훤히 드러났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듣던 것을 훨씬 뛰어넘을 만큼 아부는 너무나도 노골적이어서, 강요와 협박에 의해 마지못해 한 친일 행위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배신감을 느낀 독자들이 친일 문인들의 집에 몰려가 욕설과 돌팔매를 퍼붓고, 광장에 모여 시집과 소설책을 불태울 만도 했다. 책에 등장하는 작가 가운데 일부는 부끄러움을 못 이겨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사과문을 발표하며 붓을 꺾겠다는 다짐을 하고도 남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책 내용이 잘못됐다고 항의하거나 명예훼손이라며 소송을 걸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문단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온했다. 언론이나 평단도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언론인이자 문학평론가인 홍사중이 『신동아』 1967년 1월에 ‘주관 치우쳤으나 값진 자료’란 제목으로 서평을 쓴 게 고작이었다. ‘침묵의 카르텔’ 속 초판 1500부 소화하는 데 꼬박 13년 걸려 임종국은 6개월 안에 1만 부가 팔려나갈 것”이라며 큰소리쳤지만 서점가에서도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동아일보 9월 10일 자 1면에 5단 절반 크기의 광고까지 실었어도 분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초판 1500부를 소화하는 데 꼬박 13년이 걸렸다. 그나마 국내에서는 500부만 팔리고 나머지 1000부는 일본에서 사갔다.   동아일보 1966년 9월 10일 자 1면 하단에 실린 『친일문학론』 광고.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지식인 집단과 주류 기득권층 전체가 짜고 벌인 ‘침묵의 카르텔’이나 다름없었다. 임종국의 분석에 따르면 일반인 사이에서도 친일을 막연하게 스캔들 정도로 여기는 경향도 있었고, 당사자나 유족의 체면을 고려해 덮어두자는 온정론도 작용했으며, 부끄러운 역사이니 들춰내지 말자는 은폐론을 앞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영광의 기록만이 역사는 아니며 바로 이런 분위기 때문에 오욕의 역사가 반복되고 이어진다는 것이 임종국의 소신이었고 책을 쓴 이유였다. 반독재 투쟁이 본격화되는 1970년대 중반부터 지식인과 대학생 사이에서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책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들의 입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3년까지 평화출판사에서 8쇄를 찍고 모두 1만 1200부가 팔려나갔다. 임종국 사후 출범한 민족문제연구소가 2002년 증보판을 낸 데 이어 2013년 일본 리쓰메이칸대 이건제 교수가 오류를 바로잡고 주석을 단 교주본(校注本)을 펴냈다. 생활고 속에서도 ‘1인 반민특위’ 집념으로 저술작업 몰두 임종국은 문학 분야에 이어 사회 일반과 문화 일반까지 3부작을 예정했으나 책 판매가 부진하자 후속 집필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방황하며 두 번째 이혼을 겪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전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또 망국을 할 것인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내로라 하던 60년대 문단 대가들 거의 전부가 식민지 치하에서는 ‘성전(聖戰) 완수’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예찬하던 무리였다. 그런 무리가 등장하는 문단 회합에는 얼굴을 내밀기가 싫었고, 우선 시를 쓴다는 일에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69년 18살 연하의 이연순과 재혼하며 안정을 찾기 시작했으나 살기는 여전히 팍팍했다. 여성지, 대중주간지 등에 잡문을 쓰며 생계를 유지했다. 의외로 『친일문학론』 일본어판이 쏠쏠하게 팔려 간간이 인세가 들어왔다. 『발가벗고 온 총독』(1970), 『한국문학의 사회사』(1974), 『한국사회 풍속야사』(1980년) 등을 발표한 이후로는 거의 해마다 책을 펴냈다. 『정신대 실록』(1981), 『일제침략과 친일파』(1982), 『밤의 일제침략사』(1984), 『일제하의 사상 탄압』(1986), 『한국문학의 민중사』(1986), 『친일논설 선집』(1987), 『일본군의 조선침략사』(1989) 등 일제 침략과 친일 문제를 다각도로 다룬 책들이었다. ‘1인 반민특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집념이자 성과였다. 마지막 숙원 『친일파 총사』 준비 중 60세로 별세 임종국의 마지막 숙원 사업은 10권 분량의 『친일파 총사(叢史)』였다. 혼자 다 쓰기에는 버거울 것 같아 김승화·이명태를 필진으로 참여시켜 계약서까지 썼다. 마지막 권은 그동안 작성해온 친일파 1만 5000명 신상 카드를 토대로 『친일인명사전』을 만들 생각이었다. 여동생에게 돈을 빌려 편찬 비용을 마련하고 중학교 1학년인 둘째 아들을 휴학시켜 자료 조사를 돕게 했다. 이때는 그래도 복사기가 등장해 작업이 비교적 수월했으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복사할 수 없어 여전히 손으로 베껴야 했다.   1970년 셋째 여동생 임경화의 경희대 졸업 기념 가족사진. 왼쪽부터 둘째 여동생 임순화 남편, 백부, 임종국, 큰동생 임종철 아내, 임경화, 임경화 친구, 부친 임문호, 임순화, 작은동생 임종한 아내. (민족문제연구소) 그러나 남은 생애가 너무 짧았다. 지병인 폐기종이 악화해 1989년 11월 12일 서울 순천향병원에서 향년 60세로 눈을 감았다. 충남 천안공원묘원에 안장됐으며 묘비에는 저서 목록과 함께 이런 글귀가 새겨졌다. 이 나라 구석구석에 남은 일제 통치의 독소를 말끔히 씻어내고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서 피나는 노력으로 방대한 자료를 찾아내어 문학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종교·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친일의 실상을 낱낱이 밝히는 파사현정(破邪顯正)의 글을 쓰며 외로운 싸움을 맡았다. 그에게는 항일독립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쉽게도 뜻을 다 펴지 못하고 삶을 마쳤으되 서슬 푸른 기개와 높은 뜻은 길이 이어지리라.”   만년의 임종국. ‘친일파 총사’ 10권 완간의 숙원을 끝내 이루지 못했으나 후배와 제자들이 유업을 잇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임종국 빈소에서 태동한 민족문제연구소 임종국 빈소에 모인 조문객은 모두 침통한 표정이었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아쉬움도 컸지만 그가 해오던 친일파 연구를 누가 이어나갈 수 있을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정부나 대학이 뒷짐지고 있으니 임종국을 따르던 후배와 제자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즉석에서 의기투합해 연구소를 만들기로 했다. 대부분 신분이 불안정하고 급여도 변변치 않은 대학 강사였지만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사무실을 얻고 상근 연구원을 구했다. 1991년 2월 27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작은 골목길의 허름한 2층 사무실 앞에 ‘반민족연구소’라고 새긴 현판을 내걸었다. 부모를 졸라 2천만 원을 아무 조건 없이 내놓은 이가 있는가 하면, 한 부부는 신혼집 전세금을 기부하는 대신 연구소에 딸린 방에 신접살림을 차리기도 했다.   1991년 2월 27일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서 열린 반민족문제연구소 개소식. 나중에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했다. 왼쪽부터 김민철-김경희 부부, 김대기, 김봉우 초대 소장, 조세열 사무국장, 남창균 연구원. (민족문제연구소) 어려운 여건에서도 1993년 『친일파 99인』에 이어 이듬해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출간하고 학술 세미나도 꾸준히 개최하며 친일 청산에 관한 관심이 되살아나도록 불을 지폈다. 1995년 민족문제연구소로 개칭한 뒤로는 전국적인 지부 조직을 갖추고 시민단체 성격을 강화해 일제하 강제 동원, 독도 영유권, 일본 대중문화 개방, 친일파 기념사업 저지 등에 관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임종국이 남긴 원고를 모아 『일제 침략과 친일 마적단』(1991), 『실록 친일파』(1991), 『친일, 그 과거와 현재』(1994), 『한국인의 생활과 풍속』(1995), 『여심이 회오리치면』(1995), 『빼앗긴 시절의 이야기』(1995), 『여인열전』(2006) 등을 펴내기도 했다. 『친일인명사전』 예산 삭감되자 국민성금 모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를 구성한 것은 2001년 12월이었다. 1997년 11월 IMF 외환위기로 미뤄지다가 1999년 8월 ‘『친일인명사전』 편찬 지지 교수 1만 인 선언’을 계기로 급물살을 탔다. 정부도 2002년과 2003년 2억 원씩 지원해 편찬 사업은 활기를 띠었으나 2003년 12월 국회가 『친일인명사전』 사업비 예산 5억 원을 전액 삭감함으로써 발간이 불투명해졌다. 그러자 2004년 1월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가 캠페인을 벌여 7억 원의 성금을 모았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국민적 성원을 등에 업고 250만 건의 인물정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뒤 1차로 2만 5000명을 추려내고 분야별 검토와 상임위 회의 등을 거쳐 4800명으로 압축했다. 2009년 11월 최종적으로 4389명의 명단을 발표하며 이를 3권의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 친일반민족행위자 4389명 명단과 행적을 3권에 담았다. (민족문제연구소) 이 과정에서 임종국이 작성한 신상 카드가 요긴하게 쓰인 것은 물론이다. 사전에 수록된 명단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장면·정일권 전 총리, 언론인 장지연, 음악가 안익태·홍난파, 문인 김동인·서정주, 노기남 전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백선엽 전 육군참모총장 등이 포함됐다. 김성수·이종욱·윤치영 등 독립유공자 20여 명도 올라 건국훈장이 취소되기도 했다. 이와는 별도로 김희선 당시 민주당 의원이 대표로 있던 ‘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 모임’이 2002년 2월 708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했다. 김희선 의원의 발의로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도 2004년 5월 통과돼 이듬해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진상규명위는 2009년까지 3차에 걸쳐 1006명의 친일 명단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박정희·장면·안익태·장지연·최승희(무용가) 등이 빠졌다.   2009년 11월 8일 민족문제연구소 주최로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서 열렸다.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앞에 놓인 ‘친일인명사전’을 참석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2009.11.8. (연합뉴스) 2005년에야 문화훈장 추서하고 임종국상 제정 정부는 임종국의 공로를 뒤늦게 인정해 2005년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민족문제연구소는 그해 임종국선생기념사업회를 출범시키고 임종국상을 제정해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 2016년에는 천안 신부공원(평화공원)에 흉상과 기념 조형물을 세웠고, 2018년에는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을 건립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국민성금을 모아 2018년 8월 서울 용산구 청파동에 문을 연 식민역사박물관 상설전시실. 일제 침략과 함께 친일과 항일의 역사 관련 자료를 전시해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임종국의 유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친일 권력은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일제 잔재가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다. 60여 년 전 세계 전략에 따라 한일 국교 정상화를 종용했던 미국은 지금도 한미일 안보 동맹을 위해 한일 간의 과거사를 묻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하영 증조부 논란으로 친일 청산에 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연예인에 대한 대중적 호기심에 편승한 언론의 여론몰이나 사이버 공간에서 자주 일어나는 네티즌들의 집단 괴롭힘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친일문학론』 발간 60주년을 어떤 언론도 주목하지 않고 넘어가는 세태가 그 우려를 방증하는 듯해 안타깝다.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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