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년의 침묵, ‘김구의 과수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뉴스] 1. 북한, 31년간의 침묵
1948년 평양 남북협상이 열린 지 31년이 지난 1979년 4월, 북한은 이전에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던 흥미로운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았다. 김일성이 평양을 찾은 김구에게 훗날 다시 북으로 오게 되면 과수원을 마련해 편안한 여생을 보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는 내용이었다.
『김일성저작집』 제4권 「김구와 한 담화-1948년 5월 3일」(* 『김일성저작집』 4권 「김구와 한 담화」, 1979년 4월 조선로동당출판사. 294~304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선생이 북조선에 들어오면 선생의 소원대로 과수원을 가꾸면서 여생을 편안히 보낼 수 있도록 해주겠습니다. 과수원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민정권기관에서 줄 것입니다.” 이어 김일성은 이렇게 덧붙인다. 선생께서 남조선에 나가서 투쟁하다가 정 곤난하면 다시 북조선에 들어오겠다고 하였는데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는 선생이 북조선에 들어오는 것을 언제나 환영할 것입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다. 선생이 내놓은 상해임시정부의 인장은 그냥 가지고 가십시오. 내가 그 인장은 받아서 무엇하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저 인민대중의 두터운 신임이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김일성저작집』에 실린 관련 내용의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특이한 점이 있다. 김구 자신의 발언은 직접 인용되지 않는다. 김구가 어떤 표현을 사용했고 어떤 맥락에서 그런 말이 오갔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모든 내용은 김일성의 회고를 통해 전해질 뿐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왜 이 이야기는 1948년이 아니라 1979년에 처음 등장했을까. 1948년 남북협상은 해방 이후 남북의 주요 정치지도자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여 통일 문제를 논의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회담 직후에는 남과 북에서 수많은 기사와 논평이 쏟아졌고, 참가자들도 여러 차례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그만큼 작은 일화 하나도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이 큰 사건이었다.
그런데 현재까지 확인되는 자료를 보면 김구가 김일성에게 과수원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1948년 당시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북한의 신문과 출판물은 물론 남북협상 관련 발표문, 회담 참가자들의 회고, 월북 인사들의 증언, 공개된 소련 문서에서도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가 회담 말미에, 혹은 개인적인 만남에서 훗날 북으로 돌아와 과수원이나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개인적 대화가 아니라 회담의 성격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당시에는 아무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을까.
1948년 4월 21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인사말을 하는 김구. 김구는 연석회의 본회의에는 참여하지 않고 인사말만 하고 퇴장했다. 당시 북한은 태극기를 국기로 사용했다.
언론보도나 역사 연구에서는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던 이야기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할 경우, 먼저 그 내용의 진위를 단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왜 그 이야기가 바로 그 시점에 처음 등장했는지를 묻는다. 기록은 무엇을 말하는가만큼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남겨졌는가 역시 중요한 연구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관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글은 ‘김구가 과수원을 부탁했는가’ 여부를 단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31년 동안 침묵했던 이야기가 왜 1979년에 비로소 등장했으며,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 하나의 서사로 확장되었는지를 살펴보려는 시도이다.
2. 최초의 기록이 말한 것과 말하지 않은 것
1979년 『김일성저작집』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낸 ‘과수원’ 이야기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길고 구체적인 이야기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85년, 북한은 일본 월간지 『세카이(世界)』를 통해 같은 내용을 다시 소개하였다. 북한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한 『세카이』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는 1985년 6월 9일 김일성을 장시간 인터뷰했고, 그 내용은 「해방 40년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으로 『세카이』 8월호에 실렸다. 야스에는 회견이 오전과 오후, 밤늦게까지 이어졌으며, 기록의 정리와 번역은 북한 측이 담당했다고 기사 말미에 밝혔다.
흥미로운 것은 『세카이』에 실린 내용이 『김일성저작집』보다 훨씬 길고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김일성은 김구가 ‘상해에서는 공론만 일삼았지만 장군은 무기를 들고 싸워 나라를 찾았다’고 말했다고 회고한다. 또 공산주의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음을 인정하며 용서를 구했고, ‘당신 같은 공산주의자라면 손을 맞잡고 조국 통일을 위해 함께 싸울 수 있다’고 말했다고 소개한다.
이어 회담을 마치고 돌아갈 무렵 김구가 ‘남조선에서 활동이 어려워지면 다시 북으로 오겠으니 여생을 보낼 과수원을 마련해 달라’고 부탁했고, ‘종이와 붓을 선물로 받고 싶다’고 했으며, ‘연백평야 농민들을 위해 관개용수를 다시 공급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덧붙인다.
반면 『김일성저작집』에서 비교적 비중 있게 다루어졌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장 이야기는 『세카이』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같은 사건을 회고하면서도 어떤 내용은 새롭게 추가되고, 어떤 내용은 빠진 것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두 자료가 동일한 대화를 충실하게 기록한 것이라면 핵심 내용이 이처럼 달라질 이유는 크지 않다. 그러나 회고가 현재의 목적에 따라 재구성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확대되고,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은 자연스럽게 생략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 공통된 특징이 있다. 두 자료 모두 김구 자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지 않는다. ‘김구가 이렇게 말했다’는 내용은 따옴표 등의 문장부호 없이 모두 김일성의 회고를 통해 전달된다. 독자는 김구가 실제로 어떤 표현을 사용했는지, 어떤 맥락에서 그런 대화가 오갔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더욱이 『세카이』 보도는 현장에서 작성된 속기록이 아니다. 인터뷰 내용은 북한 측이 정리하고 번역하여 일본 측에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독자가 접하는 텍스트는 1948년의 대화 자체가 아니라, 1985년 북한이 재구성하여 제시한 1948년의 기억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회고는 사실 확인이나 역사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이다. 그러나 회고는 언제 이루어졌으며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를 함께 살펴야 한다. 회고는 과거를 기억하는 작업인 동시에 현재를 설명하는 작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김일성저작집』과 『세카이』를 함께 읽으면 하나의 흐름이 드러난다. 시간이 흐를수록 김구는 점점 더 김일성을 이해하고 존경하는 인물로 묘사되고, 김일성은 더욱 포용력 있고 너그러운 지도자로 그려진다. 이 변화는 단순한 기억의 보완이라기보다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서사의 확장으로 읽힌다.
따라서 여기에서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이 이야기는 과거의 기억이 충실하게 보존된 결과일까. 아니면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목적에 따라 다시 구성된 기억일까.
1941년 9월 23일 조완구·차리석 선생 회갑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조성환, 김구, 이시영. 뒷줄 왼쪽부터 송병조, 차리석, 조완구. 중경 우리촌에서.
3. 침묵도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는 기록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엇이 기록되었는가만큼 무엇이 기록되지 않았는가도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된다. 어떤 사건은 수많은 증언 속에서 반복되지만, 어떤 사건은 오랫동안 단 한 차례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처럼 침묵은 단순한 공백이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 될 수 있다.
‘김구의 과수원’ 이야기가 바로 그런 사례이다. 1948년 남북협상은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김구와 김규식을 비롯한 남북의 주요 정치지도자들이 평양에 모였고, 회담 직후에는 남과 북에서 수많은 기사와 논평이 발표되었다. 참가자들은 여러 차례 당시 상황을 회고했고, 이후에는 소련 문서와 북한 자료, 남한의 회고록까지 차례로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 방대한 기록 어디에서도 ‘과수원’은 보이지 않는다. 만일 김구가 위에서 언급된 말을 했다면, 그것은 단순한 사담으로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 사실상 북한 체제 안에서의 삶을 암시했다면 회담 전체의 의미를 바꿀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누구도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까. 북한도 말하지 않았고, 남한도 말하지 않았다. 회담 참가자도, 월북 인사도, 공개된 소련 문서도 이 일화를 전하지 않는다. 그러던 이야기가 31년이 지난 뒤 비로소 등장한다.
바로 이 점이 이 글이 주목하는 핵심이다. 회담의 성격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일화가 수십 년 동안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다가 특정한 시점에 처음 나타났다면, 연구자는 그 등장 자체를 분석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기억 연구’는 의미 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모리스 알바흐스(Maurice Halbwachs)는 기억은 개인 안에 고정되어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된다”고 보았다. 독일의 문화기억 연구자 얀 아스만(Jan Assmann) 역시 공동체는 현재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과거를 선택하고 재해석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북한의 ‘과수원’ 이야기를 이 이론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김일성저작집』에서 시작된 회고가 『세카이』를 거쳐 영화 『위대한 품』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면, 하나의 기억이 점차 집단기억으로 정착해 가는 모습은 분명하게 확인된다.
따라서 질문도 달라진다. 김구는 정말 과수원을 부탁했는가”라는 질문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북한은 왜 그런 김구를 1979년에 처음 필요로 했는가”이다. 그래서 시선을 1948년으로 돌려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