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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하루 300통의 편지를 써 투표함을 열게 만들다

하루 300통의 편지를 써 투표함을 열게 만들다
[사람들]
고아 소녀, 혼자 배우다 역사에는 두 부류의 인물이 있다. 이름이 남는 자와 일이 남는 자. 엘리자베스 울스텐홈 엘미(Elizabeth Wolstenholme Elmy, 1833~1918)는 후자에 속한다.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함께 산 동료들조차 그녀를 두고 빅토리아 말기 여성운동의 두뇌 속 회백질”(the grey matter in the brain of the late-Victorian women s movement)이라 불렀다. 얼굴은 몰라도 머리는 다들 빌려 썼다는 뜻이다. 1833년 맨체스터 인근 치텀 힐에서 태어난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목사였던 아버지마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후견인들은 여자아이가 대학에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정규교육은 단 2년. 그런데 이 2년짜리 학력의 소녀가 훗날 영국 여성 참정권운동 전체의 실무를 떠맡게 된다. 배움이 짧아 포기했다는 이야기는, 적어도 이 여자한테는 통하지 않는다. 19살에 유산을 받자 그녀는 곧장 여학교를 차렸다. 가르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여자도 제대로 배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엘리자베스 울스텐홈 엘미(위키피디아) 의회의 저승사자 1860년대 후반, 그녀는 결혼한 여성이 자기 재산을 남편에게 통째로 빼앗기던 법에 눈을 돌린다. 기혼여성재산위원회 총무를 십수 년 맡으며 의원들을 쫓아다녔고, 그 결과가 1882년 기혼여성재산법이다. 아내의 통장을 남편이 마음대로 못 건드리게 된 것이 겨우 140여 년 전이다. 1871년에는 여성운동 사상 최초로 돈을 받고 일하는 활동가가 된다. 직함은 의회 로비스트. 별명은 하원의 천벌 과 정부의 감시견 . 의원들이 그녀를 보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국정감사장에서 가장 무서운 보좌관이었던 셈이다.   영국 체셔 주 콩글턴에 있는 우리 엘리자베스 청동상(위키피디아) 침실의 폭력을 처음 입 밖에 낸 사람 그녀는 영국에서 최초로 공개무대에 올라 부부 사이의 강간을 이야기한 여성이다. 혼인했으니 거부할 권리가 없다 는 논리가 법과 상식을 지배하던 시절, 이 발언은 곧 사회적 매장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1906년 5월 19일 트라팔가 광장에서 스코틀랜드 노동조합 지도자 키어 하디 뒤에 선 월스턴홈(위키피디아) 추문과 침묵, 그리고 견뎌낸 세월 정작 그녀 자신은 결혼제도의 위선을 몸소 겪었다. 1874년, 함께 살던 벤 엘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기자 동료들조차 등을 돌렸다. 결국 혼인신고는 했지만 종교식이 아닌 시청 앞 간소한 절차였다. 마흔 살 여성의 혼전 임신은 진보진영 안에서도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벤 엘미는 1906년에 눈을 감았다. 그를 지키느라 정치활동을 잠시 멈췄던 그녀는, 남편이 떠난 뒤 현장으로 돌아왔다.   1911년, 발코니에서 여성 대관식 행렬을 지켜보는 울스턴홈(가운데)(위키피디아) 팽크허스트도 인정한 원조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858~1928)가 이끈 여성사회정치연합의 과격투쟁 노선에 대해, 팽크허스트 본인이 엘미를 두고 우리 중 첫 번째 라 불렀다. 1911년 런던의 대규모 여성행진에서는 78세의 나이로 귀빈석에 앉았다. 46년을 참정권 하나만 보고 달려온 최고령 활동가였다. 다만 그녀는 평생 평화주의자였다. 방화와 폭력이 번지자 우려를 표했지만, 동료를 버리지는 않았다. 원칙과 의리 사이에서 끝까지 균형을 잡은 셈이다.   1908년의 에멀린 팽크허스트와 엘리자베스 울스턴홈 엘미, 1908년(위키피디아) 승리를 코앞에 두고 1918년 2월 6일, 30세 이상 일부 여성에게 투표권을 준 국민대표법이 왕의 재가를 받는다.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지만 반세기 싸움의 첫 결실이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달 남짓 지난 3월 12일, 엘리자베스 울스텐홈 엘미는 눈을 감았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걸 보고서야 주저앉은 마라토너처럼.   영국 체셔 주 버글로턴 벅스턴 하우스에 설치된 엘리자베스 클라크 울스턴홈 엘미 기념 파란색 명판(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숙제 한국은 2013년에야 대법원이 부부사이에도 강간죄가 성립한다고 판결했다. 엘미가 무대에서 그 말을 꺼낸 지 130년도 더 지난 뒤의 일이다. 늦었다고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라, 그만큼 이 싸움이 길고 지루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더 눈에 띄는 대목은 따로 있다. 한국국회의 여성의원 비율은 여전히 낮고, 선거철마다 젠더(성별) 갈등은 표를 얻는 손쉬운 도구로 소비된다. 한때 여성가족부를 없애느냐 마느냐가 대선공약으로까지 등장해 정책토론이 아니라 진영싸움의 소재로 전락했던 적이 있다. 결국 부처는 살아남아 성평등가족부로 이름과 조직을 키웠지만, 존폐논쟁 자체가 몇 년을 허비하게 만든 소모전이었다는 사실은 남는다. 그래서 정작 필요한 건 화려한 구호가 아니라 엘미 같은 사람이다. 카메라 앞에 서지 않고 조문 하나, 법안 문구 하나를 붙들고 늘어지는 사람. 하루에 편지 3백 통을 쓰던 그 집요함 말이다. 민주주의는 유명한 연설 몇 개로 완성되지 않는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위원회 회의실에서, 누군가 조용히 법조문을 고치고 있을 때 완성된다. 지금 한국에서 그 자리를 지키는 이름 없는 사람들을 비웃는 이들에게, 이 영국 여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영국 런던 의회 광장에 있는 밀리센트 가렛 포셋의 동상 아래 많은 여성 참정권 동지들 사진들 정중앙에 올스턴홈의 사진이 있다. 하나의 용기가 온세상 용기를 불러낸다. (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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