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만에 고국 온 레이 안 우린 달랐고 성공했어요 [사람들] 지난 9월 19일 서울 홍익대 근처 레이 안의 숙소에서 인터뷰 하는 모습. 사진 촬영 정숙 시민기자
호주 펑크록의 한 축을 40년 넘게 지켜온 하드온즈(Hard-Ons)가 9월 처음 한국 무대에 올랐다. 11일과 12일, 19일 서울, 18일 부산에서 팬들을 만났고, 밴드의 궤적을 담은 다큐멘터리 는 지난해 제2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초청작으로 소개돼 그 인연으로 올해 서울과 부산 공연으로 이어졌다.
세상의 모든 곳에 감춰진 불의와 비리에 맞서 정의, 인권, 평화, 생명, 환경과 민주주의를 위해 저항하고 고발하는 사람들의 영화축제 ‘2026 제3회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SWFF 2026)’는 10월 23일(금)부터 25일(일)까지 사흘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자대학교 내 아트하우스 모모 2개 상영관에서 화려한 막을 올린다.
1980년대 호주 펑크 신에 등장한 하드온즈는 한국계 레이 안(Ray Ahn), 크로아티아계 피터 ‘블래키’ 블랙, 스리랑카계 키시 드 실바가 시드니에서 만나 결성한 밴드다. 주류 음악산업의 요구에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신들의 음악과 방식을 지키며 40년 넘게 활동해 왔다.
창립 멤버이자 베이시스트인 레이 안은 한국에서 태어나 아홉 살에 호주로 이주했다. 한국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나 하드온즈의 베이시스트로 한국 무대에 선 그를 9월 19일 서울 홍익대 인근에서 만나 이민과 인종차별, 펑크에서 발견한 자유, 음악산업과의 충돌, 그리고 하드온즈의 40여년에 대해 두 시간 넘게 얘기를 나눴다.
4살 쯤 명륜동 집에서 찍은 사진. 본인 제공
왼쪽은 1958년, 오른쪽은 1960년 공군 조종사였던 아버지 사진. 본인 제공
아버지가 선택한 호주, 아홉 살 소년의 이민
- 1974년에 한국을 떠났다.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어린 시절 기억이 선명한가
명륜동에서 살았어요. 다섯 살쯤 화곡동으로 이사했고요. 집에서 개와 토끼도 키웠어요. 학교 다니던 기억도 나고요. 당시에는 통금이 있어서 할아버지 댁에 갔다가 늦지 않으려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던 기억도 있어요.”
- 호주 이민에는 아버지의 결정이 컸다고?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조종사였어요. 당시 대통령이 박정희였는데 아버지는 한국의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저와 동생이 계속 한국에서 살면 나중에 군대에도 가야 하잖아요. 그런 부분도 걱정하셨던 것 같아요. 조종사 친구들 가운데 미국이나 캐나다로 떠난 분들도 있었고, 우리 가족은 호주를 선택했어요.”
- 호주에서 자랐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도 유지됐나
그럼요. 부모님은 대학에도 꼭 가야 한다고 하셨고요. 집에서는 계속 한국말을 했어요. 호주 사람이지만 제 안에는 분명 한국적인 부분도 있어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드온즈 원년 멤버들인 블래키(왼쪽부터), 레이, 키시 드 실바
사람이 조금 달라도 괜찮구나”
- 호주 학교에서 ‘다른 아이’라는 사실을 처음 실감한 순간은?
처음 다닌 학교에는 아시아인이 거의 없었어요. 대부분 백인 아이들이었죠. 어머니가 김밥을 싸주셨는데 어떤 아이가 그걸 빼앗아 던진 적도 있어요. 그래서 싸웠죠. 아버지께 학교에서 자꾸 싸우게 된다고 했더니 ‘누가 너를 때리면 너도 맞서라’고 하셨어요.”
- 10대에 만난 펑크는 어떤 의미였나
펑크는 다른 음악과 달랐어요. 사람들의 모습도 달랐고 음악 스타일도 달랐죠. 저 역시 호주 사람들과 똑같이 생기지 않았잖아요. TV에서 펑크 록을 보면서 처음 알게 된 거예요. ‘사람이 조금 달라도 괜찮구나.’ 그게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했어요.”
- 세 멤버 모두 이민자 가정 출신이다. 당시에도 서로의 뿌리를 의식했나
전혀요. 우린 그냥 친구였어요. 제가 살던 동네에는 인도계, 이탈리아계, 중국계 등 다양한 사람들이 살았어요. 생김새도 다르고 집에서 먹는 음식도 달랐지만 우리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어요.”
- 다큐멘터리 제목 은 ‘가장 호주적인 밴드’라는 뜻인데 가장 ‘호주적인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나
그런 사람은 따로 없는 것 같아요. 호주 사람을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할 수는 없잖아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고 생김새도 문화도 모두 다 달라요. 호주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호주 사람인 거죠.”
무대까지 따라온 인종차별
- 어린 시절 겪었던 인종차별이 공연장에서도 이어졌다고?
침을 뱉거나 욕을 하고, 나치식 경례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한번은 어떤 사람이 계속 침을 뱉어서 공연을 중단했어요. 결국 싸움이 벌어졌고 여러 명에게 맞고 발로 차였죠. 또 다른 공연에서는 누군가 던진 유리잔에 머리를 맞아 피를 많이 흘린 적도 있어요.”
- 그런 폭력을 겪고도 무대가 두렵지는 않았나
두렵지는 않았어요. 아버지는 전쟁을 겪었고 가족도 잃으셨어요. 제가 그런 일을 얘기하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하셨죠. 저도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1989년 앨범 Love Is a battlefield of wounded heart 표지 사진. 본인 제공
우리는 이렇게 생겼고, 우리 음악은 이런 소리예요”
- 하드온즈가 알려지면서 음악산업은 변화를 요구했다고?
음반회사는 우리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니까 계속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고 했어요. 사진 촬영을 할 때면 수염을 깎고 좀 더 좋은 옷을 입으라고 했죠. 우리는 싫다고 했고 회사 사람들은 화를 냈어요.”
- 더 큰 성공을 위해 타협할 생각은 없었나
사람들이 하드온즈를 좋아했던 이유는 우리가 다른 밴드와 달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거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음악을 좋아하는 거예요.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는 것은 그다음이에요. 보너스 같은 거죠.”
- 주류 음악 미디어와도 충돌했다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니까 주류 음악 미디어도 우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홍보물에 일부러 한국말로 ‘바보’, ‘미디어 개똥’ 같은 말을 써놓기도 했어요. 그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죠.”
- 문신 때문에 어머니와 부딪혔던 일도 있었다면서?
어머니가 굉장히 화를 내셨어요. ‘한국 사람은 문신을 하지 않는다’고 하셨죠. 그래서 제가 ‘나는 지금 호주에 살고 있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호주에 온 거잖아요. 라고 말했죠.
2003년 너바나 드러머 데이브 그롤과 함께 찍은 사진. 본인 제공
헨리 롤린스·AC/DC·너바나와 교차한 시간
- 미국 하드코어 펑크 록을 대표하는 밴드 블랙 플래그의 보컬로 활동했던 헨리 롤린스(Henry Rollins)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나
미국에서 처음 만났어요. 우리가 ‘호주에 와서 같이 음악을 해보자’고 제안했고 비행기 값도 우리가 냈어요. 같이 해보니 정말 잘 맞았어요. 헨리는 우리 음악을 좋아했고 우리가 재미있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친구가 됐죠.”
- 호주에서 결성돼 세계적인 록 밴드가 된 AC/DC의 ‘Let There Be Rock’을 롤린스와 함께 녹음했다. 왜 이 곡이었나
호주 사람들에게 AC/DC는 정말 특별한 밴드예요. 저도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고 헨리도 AC/DC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그 곡을 함께 하게 됐어요.”
- 어린 시절 동경했던 AC/DC의 창립 멤버이자 리듬 기타리스트 말콤 영(Malcolm Young)이 하드온즈를 알고 있다는 사실도 직접 확인했다고?
쇼핑센터에서 말콤 영을 우연히 만났어요. 정말 놀랐죠. 그가 어머니와 함께 있어서 오래 이야기하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좋아했던 밴드의 멤버가 하드온즈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어요.”
- 하드온즈는 19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을 상징하는 미국 밴드 너바나(Nirvana)와도 무대를 함께했다. 1991년 앨범 의 성공 이전이었다. 당시 너바나를 어떻게 기억하나
그때는 지금 우리가 기억하는 것처럼 엄청나게 유명한 밴드는 아니었어요. 같이 공연도 했고 멤버들과 교류도 있었어요. 그런데 ‘Nevermind’가 나오고 정말 크게 성공했죠.”
- 당시 너바나의 드러머였고 이후 푸 파이터스(Foo Fighters)를 결성한 데이브 그롤(Dave Grohl)과는 지금도 연락한다고?
네. 지금도 연락해요.”
레이는 이 대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데이브 그롤과 최근까지 주고받은 대화와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1990년대 초 음악으로 맺은 인연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 너바나가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지켜봤다. 하드온즈에게 ‘성공’은 어떤 의미였나
물론 성공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죠. 유명해지는 것도 좋고요. 하지만 그게 가장 중요한 목표는 아니었어요. 우리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죠. 결국 행복하게 음악을 하는 게 가장 중요했어요.”
성공보다 자유를 선택하다
- 한때 활동을 멈춘 것도 음악산업의 압박 때문이었나
계속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렇게까지 하면서 밴드를 계속하느니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음악이 싫어진 것은 아니었어요. 음악을 하는 게 더 이상 재미있지 않았던 거예요. 오히려 밴드를 멈췄을 때 홀가분했어요. 이제 아무도 저에게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으니까요.”
- 그런데 결국 다시 하드온즈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다시 공연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왔어요. 멤버들에게 ‘다시 한번 해볼래?’라고 했죠. 다시 해보니 재미있었어요. 예전처럼 우리에게 뭔가를 강요하는 압박도 없었고요. 그래서 다시 시작하게 됐어요.”
2026 하드온즈 한국 투어 공식 포스터. 사진 출처 서울국제휘슬러영화제 공식 페이스북
나중에 가야지”했던 한국, 하드온즈로 돌아오다
- 한국을 떠난 지 반세기가 지나 하드온즈의 멤버로 한국에 왔다. 어떤 기분이었나
기분이 좀 묘했어요. 예전에 살았던 명륜동에 가보니 예전과 비슷한 길도 있었어요. 그런데 살던 집은 이미 없어졌더라고요. 직접 걸어보니까 어릴 때 기억이 금방 떠올랐어요. 한국이 정말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좋았어요. 잊고 있던 기억들이 많이 떠올랐어요.”
- 한국에 더 자주 오지 못한 것이 후회되나
그건 후회해요. 사람들이 한국에 좀 더 자주 가보라고 했는데 저는 늘 ‘나중에 가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는 사이 시간이 정말 빨리 지나가 버렸어요.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한국에 훨씬 더 자주 왔을 것 같아요.”
지난 9월 18일 부산 공연 후 함께 공연했던 한국 록밴드 Tetrapod와 함께 찍은 사진. 본인 제공
지난 9월 19일 서울 공연 후 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본인 제공
우리는 달랐지만, 그래도 성공했어요”
- 하드온즈의 40여 년을 담은 다큐멘터리 를 보고 하드온즈를 새롭게 보게 됐다고?
예전에는 그냥 음악만 생각했죠.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니 우리가 다른 밴드들과 꽤 달랐다는 게 보이더라고요. 우리는 처음부터 달랐어요. 그런데 그렇게 달랐는데도 성공했어요. 여러 나라를 다니며 공연했고, 음악으로 돈도 벌었고, 정말 많은 사람을 만났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할 수 있었고요. 그런 시간을 돌아보면 기분이 좋아요.”
- 그렇다면 지금까지 하드온즈를 계속하게 만든 힘은 무엇인가
좋아하니까요.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예요. 저는 제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게 좋아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1974년 한국을 떠난 아홉 살 소년은 반세기가 지나 하드온즈의 베이시스트로 한국 무대에 섰다. 그 사이 40년 넘게 음악을 이어왔고, 레이는 자신이 ‘다르다’고 느꼈던 시간들을 지나 끝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해왔다.
그에게 성공은 얼마나 유명해졌는가가 아니라, 여전히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정숙 시민기자 suk7505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