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비워낸 삶, 마침내 선명해진 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크리스티네 튀르머의 《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살림)는 성공의 가도로 치닫던 삶의 정점에서 찾아온 예기치 않은 결핍과 상실을, 두 발로 땅을 딛고 길을 지나는 유랑의 서사로 바꾸어 낸 인상적인 실화 고백이자 독보적인 하이킹 기록물이다.
현대 사회가 정의하는 성공의 공식은 명확하다. 높은 사회적 지위, 끊임없이 상승하는 연봉, 거대한 도시 한복판에서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안락한 삶이다. 저자 크리스티네 튀르머 역시 이러한 공식에 완벽히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기업의 최고운영책임자(COO) 자리에 오르며 기업 구조조정과 경영 정상화라는 과업을 지적으로 해치우던 성공한 재무 전문가였다. 그러나 타인의 기준과 사회적 속도에 맞춰 숨 가쁘게 달리는 인생의 궤적은 신의 장난처럼 일순간에 붕괴하고 만다. 갑작스러운 해고 통보, 그리고 거의 동시에 찾아온 친한 친구의 뇌졸중 선고와 비극적인 죽음은 그녀가 구축해 놓은 단단한 일상의 성벽을 무참히 부수어 버렸다. 평생을 공들여 탑을 쌓았으나 손에 남은 것은 허무와 정체성의 불분명함뿐이었다.
이 극적인 삶의 단절 앞에서 저자가 선택한 탈출구는 자아도취적 우울이나 과도한 자책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려한 직함과 고급 승용차, 안락한 집을 미련 없이 뒤로한 채 오로지 배낭 하나만을 메고 길 위로 나섰다. 미국 서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4277킬로미터를 시작으로, 대륙분할 트레일(CDT)과 애팔래치안 트레일(AT)에 이르기까지 미국 3대 트레일 약 1만 2700킬로미터를 완주하여 하이커들의 꿈인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장대한 여정이 출발하는 순간이다.
이 책의 독보적인 매력은 흔히 ‘길 위의 삶’에 부여되곤 하는 감상적이고 낭만적인 포장을 담담히 배제한다는 점에 있다. 저자는 청소년 시절 체육 시간을 가장 싫어했고, 운동 능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전형적인 사무직 인물이다. 따라서 트레일 위에서 펼쳐지는 저자의 여정은 웅장한 자연 속에서 얻는 환희나 깨달음의 연속이라기보다는,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뼈를 깎는 통증과 싸우며 하루 수십 킬로미터를 묵묵히 이겨내야 하는 현실적 생존기에 가깝다. 8년간 스물다섯 켤레의 신발을 찢어버리고, 추위와 허기를 달래기 위해 500킬로그램이 넘는 초콜릿을 삼키며, 홀로 야생에서 2000일이 넘는 밤을 지새운 기록은 걷기라는 행위가 지닌 본질적인 물리성과 신체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녀가 걷기를 통해 수행하는 것은 몸의 다이어트일 뿐만 아니라 마음의 비움, 즉 ‘최소한의 삶’에 대한 고찰이다. 재무관리 책임자로 일할 때 저자의 삶은 효율과 이윤, 데이터와 예측 가능성에 의해 통제되었다. 그러나 트레일 위에서는 오직 어깨에 짊어진 배낭의 무게만이 생사를 결정한다. 필요 이상의 물건은 곧 육체적 고통으로 직결되기에, 저자는 오직 생존에 필요한 최후의 물품만을 남기고 비워내는 법을 몸으로 배운다. 물질적 소유를 줄이고 불필요한 관념적 짐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몸은 가벼워지고 감각은 날카롭게 깨어난다. 도시의 소음과 자본주의적 경쟁의 압박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스스로의 숨소리만이 남는다.
이 물리적 걷기의 축적은 결국 깊은 정신적 전환으로 이어진다. 저자에게 걷기는 지나간 삶의 상처를 치유하는 도구이자, 외부의 시선에서 벗어나 온전한 자기 자신과 직면하는 자아 발견의 시간이다. 문명 세계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기대와 사회가 부과한 역할에 맞추어 연기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산과 들, 사막과 숲으로 이루어진 길 위에서 자연은 하이커의 사회적 지위나 은행 잔고, 과거의 명성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쏟아지는 폭우와 뙤약볕, 거친 암석 지대는 모든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만든다. 이러한 야생의 공평함 속에서 저자는 마침내 타인의 평가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나’라는 존재의 참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책의 제목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생’의 가치와 의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과제는 멀리서 바라볼 때 압도적인 중압감으로 다가오지만, 그것을 하루하루 걸어야 하는 한 발 한 발의 미세한 단위로 쪼갤 때 비로소 견뎌낼 수 있는 것이 된다. 오늘 걸어야 할 목표 지점까지만 무사히 도달하는 것, 눈앞의 돌개천을 무사히 건너는 것, 텐트를 칠 안전한 장소를 찾는 것과 같은 지극히 단순하고 근본적인 목적에 집중할 때, 삶을 괴롭히던 수많은 잡음과 불확실성은 시원하게 휘발된다. 걷기는 결국 복잡하게 꼬인 삶의 문제를 단순화하고, 현재라는 순간에 온전히 현존하게 만드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또한 이 책은 혼자 걷는 외로운 여정이 역설적으로 타인과의 진정한 연대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트레일 곳곳에는 하이커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물과 음식을 제공하고 숙소를 내어주는 ‘트레일 엔젤’들이 존재하며,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 하이커들과의 국경과 나이를 초월한 우정이 존재한다. 문명사회에서는 타인을 경쟁자나 경계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쉽지만, 극한의 환경을 공유하는 길 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길에서 만난 낯선 이들의 무조건적인 호의와 따뜻한 손길을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와 사랑을 회복한다. 홀로 걷는 고독 속에서 오히려 타인과 깊게 연결되는 경험은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구원이다.
미국의 3대 트레일(The Triple Crown of Hiking)
결론적으로 크리스티네 튀르머의 《생이 보일 때까지 걷기》는 단순한 도보 여행기나 성공적인 탐험의 기록을 뛰어넘는 강렬한 인생의 지침서다. 저자는 삶이 무너져 내리고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위는 바로 두 발로 땅을 딛고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것임을 증명해 보인다. 안정적인 일상의 궤도를 벗어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불안으로 주저하는 현대인들에게 이 책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거창한 준비나 거대한 포부 없이도, 배낭을 메고 문을 열고 나서는 순간 새로운 삶은 시작된다. 삶의 방향성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다면, 혹은 스스로 구축한 삶의 무게에 짓눌려 숨을 쉬기 힘들다면 이 책은 다정하면서도 단단한 손길로 우리를 안내할 것이다. 길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나, 그리고 비로소 선명해진 진짜 생이 기다리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말이다. 걷기를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조망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책 중에서
AT(애팔래치안 트레일)는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현재로써는 트레일에서 전혀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는 게 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당장 여행을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만두고 나면 어디로 간단 말인가? 월세 계약도 해지했고, 친구들은 내가 1년 뒤에나 돌아오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 친구다운 친구가 여전히 남아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주먹을 쥐어 가슴을 쾅쾅 쳤다. 내 발로 걸어 들어온 이 악몽에서 깨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악몽에서 깨어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원을 들어주는 요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법처럼 따뜻하고 푹신한 침대에서 눈뜨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침대는커녕 비조차 그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지저분하고 홀딱 젖은 몰골로 메인 주의 외딴 숲속에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었다. 일어나서 계속 걷지 않으면 내일 아침에도 여전히 이곳에 앉아 있을 것이고 그랬다가는 감기에 걸려 상황만 더욱 악화될 것이다. 나는 콧물을 훌쩍 들이마시며 눈물과 빗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닦고 몸을 일으켰다. 2킬로미터만 더 가면 산장이다. 그곳까지는 어떻게든 갈 수 있겠지. -p.388~389
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