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라는 이름의 통제와 강제동원… 고아원 잔혹사 [뉴스] 고아원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흔히 선행, 착하고 좋은 일이란 생각을 갖게 된다.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밥을 먹이고 옷을 입히고 잠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이라면 당연히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고아원을 세운 사람은 자선가가 되고, 아이들을 돌본 사람은 사회사업가가 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고아원 역사를 들여다보면 질문은 달라진다. 그 아이들을 누가 보호했는가가 아니라, 그 아이들을 누구의 필요에 따라 보호했는가. 그리고 더 불편한 질문이 남는다. ‘보호’라는 이름의 제도가 어느 순간 아이들을 통제하고, 교화하고, 노동시키며 군인으로 탈바꿈시킨 장치로 바뀐 것은 아닌가.
친일파 윤치호와 오긍선이 운영했던 경성보육원, 친일영화인 최인규의 영화 , 조선총독부의 「조선구호령」과 「조선감화령」, 그리고 일제가 만든 고아수용시설 목포감화원과 선감학원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들을 한 줄로 연결하면 식민지 조선에서 고아와 빈곤 아동을 둘러싼 자선, 사회사업, 행정통제가 어떻게 결합했는지가 보인다. 일제강점기 이전 조선에도 민간이나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구제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식민 통치가 장기화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일제는 사회사업을 단순한 민간 자선의 영역에 방치하지 않고 행정의 영역으로 편입하기 시작했다. 그 중요한 법적 장치 가운데 하나가 1923년의 「조선감화령」이다. 법령을 직접 보면 그 성격이 매우 선명하다. 조선총독은 ‘8세 이상 18세 미만의 자로서 불량행위를 하거나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고 적당한 친권을 행사하는 사람이 없는 자’를 감화원에 입원시킬 수 있었다. 감화원장은 원아에 대해 친권을 행사할 수 있고, 관청은 대상자를 총독에게 보고하고 임시 유치할 수도 있었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한 복지법이 아니었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일제가 아이의 신병과 교육을 통제할 수 있도록 한 법이었다. 1942년에 개정함으로서 통제체계를 더욱 강화했다. 대상 연령을 일부 조정하고 ‘조선소년심판소에서 송치된 자’까지 감화원에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복지’와 ‘소년범죄’가 뒤섞여 있는 것이다. 실제로 후대의 입법자료에서도 「조선감화령」 은 아동복지법이라기보다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아동을 사회통제의 대상으로 취급한 치안정책적 법령’이었다고 평가된다. [법제처 국민참여입법센터. 2016년 11월]
최인규의 친일영화 포스터를 인공지능(AI)으로 재생한 이미지
이후, 「조선구호령」이 등장했다. 고아와 빈곤층에 대한 제도적 통제는 전쟁 말기로 갈수록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빈곤 때문에 생활이 불가능한 사람 가운데 ‘13세 이하의 유자(遺子)’를 구호대상으로 명시했다. 그리고 중요한 조항이 있다. 제6조는 구호시설을 ‘양로원, 보육원, 병원 기타 이 영에 의한 구호를 목적으로 하는 시설’이라고 규정했다. 즉, 고아원(보육원)이 처음 명시적으로 총독부의 구호 행정체계 안에 들어온 것이다. 고아원은 더 이상 단순히 독지가가 자기 돈으로 운영하는 자선시설이 아니었다. 총독부가 인가하고, 지방행정기관이 감독하고, 필요할 경우 행정기관이 아동을 시설에 위탁할 수 있는 제도적 공간이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 경성보육원처럼 총독부와 경성부의 지원을 받은 민간 사회사업시설들이 존재했다.
민간이라고 하지만 친일파였던 이들의 자선과 식민지 국가의 행정이 서로 결합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중요한 역사적 함정이 있다. 일제가 고아원을 지원했다는 사실만 가지고 ‘일제는 고아들을 위해 복지정책을 펼쳤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당시 사회사업 대상에 ‘보호해야 할 사람’과 동시에 ‘관리해야 할 사람’이 함께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아, 빈민, 부랑아, 불량소년, 그리고 사회질서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판단된 사람. 이들은 서로 다른 존재였지만 식민지 행정에서는 점점 하나의 관리대상군으로 묶였다. 즉, 자선과 통제는 서로 반대편에 있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식민지 사회사업 체계 안에서 동시에 발전했다.
이 지점에서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된 윤치호와 오긍선 두 사람의 경성보육원을 다시 봐야 한다. 부친 윤웅렬의 뒤를 이은 친일파 윤치호는 경성고아구제회와 경성보육원 운영에 참여했고, 세브란스 의전 교장을 지내기도 했던 의사 오긍선 역시 경성보육원의 핵심 운영자로 활동했다. 1933년 조선우생협회가 창립했는데 회장이 윤치호, 이사진 중 한 사람이 오긍선이었다. 오긍선은 최근 한 여배우의 증조부란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되고 있는 안상호와 함께 한성의사회를 결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긍선은 윤치소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 윤치호, 윤치소와 사돈이 된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이 사돈총각이 된다.
두 사람이 실제로 아이들을 돌본 사실을 부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경성보육원이 식민지 행정체계와 완전히 분리된 시설도 아니었다. 총독부와 경성부의 지원을 받았고, 당시 민간 사회사업에 대한 행정적 지도감독의 대상이 됐다. 윤치호와 오긍선은 중일전쟁이 격화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전시동원 체제에 협력하는 징병과 징용 그리고 학병에 적극 협력하자는 연설과 글을 쓰기도 했다. 당시 그들이 운영했던 경성보육원 아이들이 일제 전시동원체제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최인규의 카메라가 고아원의 아이들을 비췄다. 1941년 최인규 감독의 가 등장한다. 영화는 실제 고아원인 향린원을 소재로 했다. 거리의 아이들, 굶주린 아이들, 부모 없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돌보는 사회사업가. 관객은 자연스럽게 감동한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에 아이들이 일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황국신민서사를 외친다. 여기서 영화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조선의 실제 빈곤이 일본 제국의 선전 서사 속으로 들어간다. 우리가 이 아이들을 구했다, 그리고 이 아이들도 이제 제국의 국민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변질된다. 이것이 의 가장 불편한 지점이다. 고아의 가난은 진짜였다. 아이들의 눈물도 진짜였다. 그러나 그 진짜 현실을 이용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서사를 만들어 냈다. 선전은 거짓말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진실을 이용해 거짓된 결론을 이끌어낸다.
친일파 윤치호와 오긍선은 경성보육원(경성고아원)의 이사장과 원장을 맡아 이를 일제의 지원을 받아서 운영했다. (AI로 재생)
일제 고아수용시설의 역사를 살펴보며 선감학원과 목포감화원을 빼놓을 수 없다. 선감학원은 일제가 대부도 옆의 작은 섬, 선감도에 설치한 시설이었으며, 목포감화원(목포학원)은 목포 앞바다 고하도에 들어섰다. 겉으로 명분은 부랑아와 불량소년의 교화였다. 그러나 감화령 자체가 이미 ‘불량행위를 했거나 할 우려가 있는’ 아이까지 국가가 시설에 수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불량행위를 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부모가 있는 아이들까지 강제로 수용되기도 했다. 이 제도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다. 더구나 선감학원이나 목포감화원 모두 수용 대상이 단순한 부랑아에 한정되지 않았다. 항일운동이나 정치적 이유로 문제가 있다고 지목된 사람들까지 감화시설에 수용되었다. 식민 권력이 감화라는 이름으로 사회질서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격리 및 통제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갖고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리고 전쟁 말기가 되면서 이 시설의 성격은 더욱 참혹해진다. 수용된 아이들의 노동력이 전쟁경제에 동원되기 시작했다. 일부 수용자들은 전쟁터와 탄광 등으로 보내졌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말과 아이를 노동력으로 사용한다는 말 사이의 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국가인권위원회, 2018년 2월]
여기에서 식민지 사회사업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고아를 구호한다, 부랑아를 보호한다, 불량소년을 감화한다, 건전한 국민으로 만든다, 그렇게 해서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과 병력을 확보한다. 각각의 문장은 서로 달라 보이지만 국가가 아이의 삶을 관리하기 시작하면 이 문장들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된다. 특히 전쟁 말기에는 더욱 그렇다. 일제가 말하는 복지는 보호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총독부가 규정한 ‘황국신민’을 만들어내는 일이기도 했다.
일제는 선감학원과 목포감화원, 그리고 함경도의 영흥감화원을 직접 운영했다. 조선감화령에서 감화원장은 아이에게 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친부모보다 국가가 우선할 수 있었다. 아이의 몸과 교육과 생활을 국가가 관리한다는 뜻이다. 보호와 통제의 경계가 사라진 것이다.
「조선감화령」은 일정한 연령의 소년 가운데 불량행위를 했거나 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을 감화원에 수용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핵심은 아이가 실제 범죄를 저질렀느냐가 아니라 일제가 ‘불량’하다고 판단했느냐 여부다. 선감학원과 목포 감화원은 모두 조선감화령을 배경으로 한 감화시설이라는 공통점을 깆고 있으며 빈곤, 부랑, 불량으로 규정된 소년을 일반사회로부터 격리해 국가가 규정한 질서에 맞는 인간으로 교화한다는 식민지 사회통제의 목표를 공유했다.
목포감화원과 선감학원은 해방 이후 역사와도 연결된다. 일제의 식민지 감화시설이라는 유산이 해방 후 단절되지 않고, ‘부랑아 선도’라는 이름으로 일정한 제도적 연속성을 갖게 된다. 일제 패망 후 우리정부에서 목포감화원은 1967년까지 노동력 착취 등 일제와 흡사한 방식으로 운영하였고, 선감학원도 경기도에서 운영하며 1982년에 이르러서야 폐쇄된다. 고아원의 역사를 단순히 일제강점기의 과거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과거 선감학원 원생들의 모습을 AI로 구현.
윤치호와 오긍선은 고아를 돌봤다. 그들의 사회사업에는 분명히 선행의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식민지 사회의 친일 인물이었다. 최인규는 고아의 삶을 영화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영화는 결국 일본제국의 선전영화였다. 일제는 고아와 빈곤아동을 구호한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감화령을 통해 국가가 아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을 만들었다. 목포감화원과 선감학원은 아이들을 보호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곳에서 아이들은 강제로 갇혔고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무관한 사건으로 분리할 수 없다. 그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된 구조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아이의 삶을 대신 결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또한 고아원 역사를 다시 써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고아원 역사에서 원장의 이름은 쉽게 남는다. 설립자의 이름도 남는다. 후원자의 이름도 남는다. 그러나 제일 중요한 아이들의 이름은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누가 고아원을 세웠는가가 아니라, 그곳에 누가 들어갔는가. 누가 돈을 냈는가가 아니라, 그 돈이 실제 아이들을 위해 사용되었는가. 누가 아이들을 보호했는가가 아니라, 아이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강요받았는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 국가는 왜 그 아이들을 필요로 했는가. 일제의 「조선구호령」과 「조선감화령」을 보면 그 답의 한 단면이 보인다. 한쪽에서는 고아를 구호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불량’한 아이를 감화했다. 한쪽에서는 보육원을 인가하고 지원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감화원에 아이들을 가두었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자 그 아이들은 병력과 노동력으로 활용되었다. 보호와 통제, 복지와 동원은 같은 제도의 다른 얼굴이었다. 결국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원장이 아니라 아이들이다.
한때 사회사업을 했다고 해서 윤치호가 친일파였다는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다. 오긍선의 사회사업 역시 식민지 권력과의 유착을 지워주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최인규가 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영화 속 아이들의 실제 고통을 가짜로 만들지 않는다. 일제는 조선구호령을 통해 고아원을 제도화하고 지원, 감독하는 틀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을 함께 놓고 보면 분명한 것이 하나 있다. 고아를 보호한다는 말은 언제든 국가가 아이를 관리한다는 말로 변할 수 있다. 그리고 목포감화원과 선감학원은 그 변질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고아와 부랑아를 보호한다며 아이들을 감금하고, 감화한다며 노동을 시키고, 전쟁이 시작되자 병사와 노동자로 동원했다. 그 아이들에게 선택권은 없었다. 고아가 되는 것도, 가난해지는 것도, 시설에 들어가는 것도, 무엇을 배우는 것도, 노동하는 것도, 국가가 요구하는 인간이 되는 것도 아이들이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
고아원의 역사를 단순히 선행의 역사로만 기록해서는 안 된다. 그 사이에 있던 아이들의 삶을 기록해야 한다. 고아를 돌본 손을 기억하되 그 손이 누구와 악수했으며, 누구에게 아부하고 부역했는지도 명시해야 한다. 일제의 지원을 기록하되 그 지원에 어떤 조건과 통제가 따라붙었는지도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설을 거쳐 간 아이들이 무엇을 겪었는지를 기록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고아원 역사를 미화하지 않으면서 제대로 복원하는 방법이다. 그곳의 아이들은 고아였거나 또는 만들어진 고아였을 뿐이다. 그곳을 거쳐 간 이름 모를 아이들이 역사의 고아가 되어서는 안 된다.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