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재학당 세워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 기른 아펜젤러 [사람들] 스물일곱 살, 제물포에 내리다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 인천 제물포 앞바다에 배 한 척이 닿았다. 스물일곱 살 먹은 미국 감리교 목사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가 갓 결혼한 아내 엘라 다지 아펜젤러(Ella Dodge Appenzeller, 1854~1916)의 손을 잡고 내렸다. 헨리는 펜실베이니아 시골 독일계 이민자 집안의 아들로, 조선말은커녕 조선이 지도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잘 모르던 청년이었다.
그런데 막상 배에서 내리려 하자 미국 측 대사가 앞을 막아섰다. 갑신정변 직후라 나라가 어수선하니 젊은 여성은 아직 위험하다는 이유였다. 아펜젤러 부부는 결국 한동안 일본에 머물다가 다시 건너와야 했다.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던 셈인데, 이 사내는 이 낯선 반도에서 남은 인생 17년을 살다가, 결국 이 땅 앞바다에서 목숨을 잃는다. 요즘 말로 하면 이민 가서 정착도 겨우 했는데 사고사로 생을 마감한 셈이지만, 그가 남기고 간 흔적은 지금도 서울 한복판에 학교 이름으로, 교회 이름으로 남아 있다.
1901년의 헨리 거하드 아펜젤러(위키피디아)
학교 하나 열었더니 나라가 술렁였다
아펜젤러가 처음 한 일은 거창하지 않았다. 학생 두 명 앉혀 놓고 영어를 가르치는 서당 수준이었다. 그런데 고종이 이 학교에 유용한 인재를 기른다 는 뜻으로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내려주면서 일이 커졌다. 학생 숫자가 불어나더니 1896년에는 학생들 손으로 협성회라는 단체가 만들어진다. 회의 규칙을 서양식으로 정해 놓고 매주 모여 토론을 벌이는, 요즘으로 치면 학생회 겸 토론 동아리다.
진행자를 뽑고, 발언 순서를 지키고, 표결로 안건을 처리하는 지극히 평범한 절차였는데, 문제는 이 동아리 출신 명단이다. 서재필(1864~1951), 윤치호(1865~1945), 이승만(1875~1965), 신흥우(1883~1959), 오긍선(1878~1963), 여운형(1886~1947). 훗날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임시정부, 심지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까지 이 명단에서 줄줄이 나온다. 윤치호와 신흥우, 오긍선은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학교 하나 세웠을 뿐인데 근대 한국정치사의 인명록이 통째로 딸려 나온 꼴이다. 미국 선교사 눈에는 그저 영어 좀 가르치고 성경 좀 읽히려던 것뿐이었을 텐데, 조선왕실과 훗날의 총독부 입장에서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을 법하다. 회의 규칙 하나 배웠다고 나라를 뒤흔들 인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올 줄 누가 알았겠나.
아펜젤러(뒤 오른쪽 2번째)와 그의 학생들(위키피디아)
말을 남기고 간 사람
아펜젤러는 성경 번역에도 매달렸다. 마가복음, 마태복음을 한글로 옮기는 작업에 참여했고, 1900년에는 신약성서 번역을 마무리 짓는다. 한글을 양반들이 언문이라 낮춰 부르던 시절, 이 미국인은 오히려 한글로 글을 찍어내는 일에 앞장섰다. 그가 세운 학교를 거쳐 간 제자 가운데 최현배(1894~1970) 같은 한글학자가 나온 것도 완전히 우연만은 아니다. 외국인이 와서 우리 글자의 값어치를 새삼 일러준 셈이니, 이것도 참 얄궂은 역사의 장난이다. 게다가 배재학당은 유능한 인재란 곧 남을 섬길 줄 아는 사람 이라는 학훈을 내걸었다. 요즘 자기소개서에 흔히 등장하는 리더십 이니 글로벌 인재 니 하는 말과는 결이 다른, 소박하지만 뼈 있는 문구였다.
최현배(나무위키)
바다가 삼킨 마지막
1902년 6월, 아펜젤러는 성경번역 회의에 참석하러 배를 타고 목포 쪽으로 가다가 군산 앞바다 어청도 근처에서 다른 배와 부딪혀 물에 빠져 죽는다. 마흔넷의 나이였고, 시신조차 끝내 찾지 못했다. 학교를 세우고 교회를 세우고 말을 남긴 사람의 끝이 이렇게 허망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들 헨리 다지 아펜젤러(Henry Dodge Appenzeller, 1889~1953)는 훗날 아버지가 세운 배재학당 교장이 되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교를 지켰고, 딸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Alice Rebecca Appenzeller, 1885~1950)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며 이화학당을 이화여자전문학교로 키워냈다. 죽음으로 끝난 게 아니라 대를 이어 계속된 셈이다.
앨리스 레베카 아펜젤러(https://www.kich.org/news)
데잃리한국
지금 한국에 남기는 숙제
아펜젤러가 남긴 진짜 유산은 벽돌 건물이 아니라 토론하고 규칙을 지키며 의견을 모으는 습관 그 자체다. 협성회 학생들이 매주 모여 갑론을박하던 그 소박한 연습이 훗날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로, 다시 대한민국 정치의 뿌리로 이어졌다. 그런데 요즘 한국을 돌아보면 회의 규칙보다 진영 논리가, 토론보다 고성과 몸싸움이 앞서는 모습을 자주 본다. 국회 안에서 안건 하나 통과시키는 일이 협성회 학생들의 토론회보다 못한 날도 있었다.
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이 국회에 계엄군을 들여보내던 그 장면은 협성회 학생들이 130년 전에 이미 익혔던 최소한의 절차와 규칙조차 이 나라에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외국에서 건너온 스물일곱 살 청년이 던져준 토론 습관을, 정작 그 습관의 주인이어야 할 사람들이 아직도 소화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제라도 다시 배워야 할 숙제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의 아펜젤러 추모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