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4.5일제 공약에 996 을 주장하는 장관 [노동] 대통령의 말과 장관의 정책, 정부의 행정이 같은 방향을 향할 때 비로소 공약은 국정이 된다.
주 4.5일제 노동시간 단축을 핵심 공약으로 내걸었던 대통령에게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중국의 ‘996’을 꺼내 들었다. 996은 오전 9시에 출근해 밤 9시에 퇴근하고, 주 6일 일하는 장시간 노동 체제를 뜻한다. 한쪽에서는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더 오래 일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다. 대통령의 공약과 주무 장관의 메시지가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셈이다. 정부의 노동정책은 도대체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가.
중국과의 기술 경쟁에서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것도 정부가 해야 할 일인 만큼, 산업 경쟁력을 걱정하는 것 자체를 나무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경쟁력을 높이는 방법이 꼭 장시간 노동이어야만 하는가. 세계가 생산성과 기술, 인공지능과 자동화로 경쟁하는 시대에 얼마나 오래 일하느냐 를 경쟁력의 기준으로 들고 나오는 것은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더구나 ‘996’은 중국에서도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을 침해하는 장시간 노동의 상징으로 비판받아 온 방식이다. 그런 구호를 우리 정부의 장관이 마치 경쟁력의 기준인 것처럼 꺼내 들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의 국정 방향과 정면으로 어긋난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의 핵심 노동 공약인 주 4.5일제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과 삶의 균형을 높이겠다는 방향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장관이 해야 할 일은 대통령의 공약을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 방법을 찾는 것이다. 대통령은 4.5일제를 말하는데 장관은 996을 말한다면, 국민은 도대체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가.
대통령의 공약은 선거 때 표를 얻기 위해 내거는 현수막이 아니다. 국민에게 한 약속이며, 국정을 운영하는 기준이다. 장관은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자신의 부처 정책으로 구체화하고 실행하는 자리다. 장관이 대통령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린다면 결국 둘 중 하나다. 대통령이 국정 방향을 바꿨거나, 아니면 장관이 대통령의 방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거나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은 개혁을 이야기하는데 관료들이 그 속도를 늦추고 방향까지 틀어버린다면, 국민은 대통령의 말을 믿어야 할지 정부의 행동을 믿어야 할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혼란의 최종적인 책임은 결국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물론 대통령의 공약도 현실과 부딪히며 조정될 수 있다. 주 4.5일제 역시 산업별 특성과 기업 규모, 생산성 등을 고려해 단계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 무조건 밀어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속도를 조절하는 것과 방향을 거꾸로 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주 4.5일제를 추진하면서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생산성 향상 방안을 찾는 것과, 장시간 노동인 996을 경쟁력의 모델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아예 출발점부터 다르다. 하나는 미래의 노동을 준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과거의 노동 방식을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공약이 연설문 속의 구호에 그쳐서는 안 된다. 장관의 정책 방향에 담겨야 하고, 관료들이 만드는 정부안에 반영돼야 하며, 국회에 제출되는 법안과 현장에서 집행되는 행정으로 이어져야 한다. 대통령의 말과 장관의 정책, 정부의 행정이 같은 방향을 향할 때 비로소 공약은 국정이 된다. 대통령의 공약을 정부가 배반하는 순간, 국민의 신뢰 역시 배반하게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홍순구 시민기자 dranx@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