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특구법’에 어른거리는 개발독재 노동정책 DNA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AI발 반도체 열풍에 휩싸여 있다. 경제신문의 지면은 연일 AI와 반도체 기사로 채워지고, 주식시장은 엔비디아와 고대역폭메모리, 데이터센터와 피지컬 AI라는 말에 들썩인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방한은 하나의 사회적 이벤트가 됐고, 이재명 대통령은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젠슨 황과 샘 올트먼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의 최고경영자들을 만나 한국을 세계 AI 공급망의 핵심 거점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정부가 지난 6월 30일 광주 김대중컨벤션센터에서 개최한 ‘서남권 첨단산업 발전 비전 국민보고회’도 이러한 열풍의 한복판에 있다. 정부는 삼성과 SK 등 주요 기업이 서남권에 총 896조 원을 투자하고, 이 가운데 800조 원을 들여 제2의 반도체 생산거점을 조성한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전력과 용수 등 기반시설을 지원하고, 기업과 노동자에게 세제 혜택을 제공하며, 서남권 반도체 산업 진흥을 위해 각종 규제를 풀어주는 ‘메가특구 지정 및 관리에 관한 특별법’, 일명 메가특구법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발표만 보면 낙후된 호남지역의 미래가 반도체 산업단지 조성을 계기로 천지개벽할 것이며 한국 반도체 산업이 곧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질 것처럼 보인다.
7월 22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3대 메가 프로젝트 지원 특별위원회 의 당정 협의에서 한병도 위원장을 비롯한 위원들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2026.7.22. 연합뉴스
1970년대 노동정책으로 21세기 반도체 산업 육성이란 기막힌 비전
문제는 장밋빛 청사진의 뒤편에서 흘러나온 노동정책이다. 아직 정부의 최종 법안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라지만, 언론을 통해 알려진 잠정안에는 반도체 특별법에 담으려던 연구개발 직군에 대한 주 52시간제 예외, 선택적 근로시간제 정산 기간 확대,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을 현행 2년에서 최대 4년으로 연장, 파견 허용 업무와 파견노동자 사용기간 확대 등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소득 상위 일부 노동자에게 노동시간과 연장·야간·휴일근로수당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exemption)’까지 언급됐다. 첨단 반도체 산업을 더 빠르게 육성·지원하겠다는 정부의 산업정책 필요성은 인정한다. 하지만 첨단 반도체 산업단지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더 오래 일하고, 더 불안정하게 고용하며, 더 쉽게, 오랜 기간동안 파견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노동정책 방향이 참으로 고약스러울 뿐이다.
한국 사회 첨단 반도체 산업은 21세기 한복판을 달리고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노동정책은 20세기, 개발독재 시기의 197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 사실 ‘특별한 지역’에서 ‘특별한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동법이 정한 최소한의 노동기준을 낮춰 적용해야 된다는 발상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1970년대 ‘잘 살아 보세’라는 기치하에 산업화를 추진했던 박정희 시기 개발독재 산업화 정책이 바로 그것이다. 박정희 정부는 1970년 「수출자유지역설치법」과 「외국인투자기업의 노동조합 및 노동쟁의조정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제정했다. 외자를 유치하고 수출을 늘린다는 명분 아래 경남 마산과 전북 이리(현 익산)에 있는 수출자유지역 입주기업의 노동쟁의를 공익사업에 준해 엄격히 다루고, 외국인투자기업 노동자의 노동조합 결성·활동과 단체행동권을 제한했다. 헌법이 정한 노동기본권을 수출자유지역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는 더 특별하게 예외적으로 제한한 것이다. 자본에는 세금 감면과 사실상 무상에 가까운 공장 부지·인프라 제공이라는 특혜를 주고,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억눌렀던 개발독재의 전형이었다.
‘경제성장 위해 노동권 희생’ 정권마다 반복되는 시도
이러한 정책의 계보는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때만 되면 되살아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 시기인 2003년 시행된 경제자유구역 정책 역시 외국인 투자를 명분으로 노동규제를 완화하고, 파견 대상 업무와 기간을 넓히며, 불법파견 시 고용의제를 배제하는 특례를 포함하려 했지만 노동계의 반대로 무산됐다. 이후 이명박 정부는 기간제 노동자의 근로계약 기간을 2년에서 4년으로 연장하려 했고, 박근혜 정부도 기간제 4년 연장과 규제프리존, 산업단지 내 뿌리산업에 대한 파견확대를 추진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또한 기간제법상의 2년 기간 제한을 늘리려 했고 연장근로 산정 기준을 연(年) 단위로 확대하려는 노동시간 규제 완화를 추진했다. 노동계와 시민사회의 반발로 번번이 제동이 걸렸던 반노동 정책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AI’와 ‘메가특구’라는 새 이름을 배경으로 이재명 정부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메가특구법에서 박정희 개발독재 시기의 노동정책 DNA가 느껴지는 것은 필자만의 과장일까. 시대와 산업의 이름만 바뀌었을 뿐, 경제성장을 위해 노동권을 예외로 만들겠다는 사고방식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과거에는 수출과 외자 유치가 명분이었다면 지금은 AI와 첨단산업이 명분이다. 그때도 국가 경쟁력을 위해 노동자의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했고, 지금도 노동법 규제를 풀지 않으면 국제 경쟁에서 뒤처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국 규제완화의 실체는 노동시간을 늘리고, 비정규직을 더 오래 사용하며, 결과적으로 일자리 질을 저하시키는 것이다.
노동권 악화 시도에 오히려 앞장서는 고용노동부
이 모든 것이 ‘노동’을 잘 모르는 일부 경제 관료의 구상일 수 있다. 필자는 작년 시흥시의 실무자급 공무원에게서 고위급 공무원들이 노조를 싫어한다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노동조합이 무엇을 하는 조직인지, 노동기본권이 왜 헌법에 보장돼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이 노조를 기업 활동을 방해하는 이기적 집단으로만 보는 공무원이 적지 않다. 경총, 대한상공회의소와 기업 관계자 등 경영진의 애로사항은 ‘현장의 목소리’로 받아들이면서, 노동자의 장시간 노동과 고용불안, 산업재해에 대한 호소는 ‘기득권의 요구’나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쯤으로 치부하는 인식이 팽배해 있는 것이다. 메가특구법상의 노동특례 정책은 대한민국 고위급 경제 관료들의 노동 인식이 얼마나 퇴행적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고용노동부의 태도다. 지난 7월 27일, 고용노동부는 서남권 반도체 메가특구 관련해 앞서 언급한 기간제·파견·노동시간 규제완화 방안을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에게 보고하기까지 했다. 고용노동부는 노동기준을 후퇴시키려는 다른 부처의 요구에 제동을 걸어야 할 부처다. 노동권의 방파제가 되어야 할 부처가 노동 관련 규제완화의 전도사가 된 셈이다. 고용노동부조차 이렇다면 ‘노동존중 사회’를 만들겠다는 이재명 정부의 의지는 어디에서 확인해야 할까. 필자가 알고 있는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인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그렇다고 관료들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미 현행 기간제법이 사실상 ‘2년 이상 고용금지법’이 됐다고 비판하면서 3년이나 4년 고용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대안을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바 있다.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기간 연장론 불씨를 대통령 자신이 지핀 것이다.
노동 없이 자본만으로 첨단 반도체 가능할까?
기업이 1년 11개월짜리 계약을 무한 반복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문제라면, 해법은 기간제 근로계약 기간을 3년, 4년까지 늘리는 것이 아니다. 상시·지속 업무의 직접고용 원칙을 강화하고 불법·탈법적인 근로계약 해지를 막아야 한다. 정규직 고용을 회피하는 기업의 책임을 묻는 대신 노동자에게 고용불안을 2년에 더해 2년을 더 견디라고 요구하는 것을 현실적 대안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기간제 노동자의 근로계약 기간을 4년으로 늘린다고 기간제 노동자의 고용 안정과 고용의 질이 높아질 수 있을까. 3년 11개월짜리 근로계약이 횡행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메가특구법의 노동특례 조항이 알려지면서 오죽했으면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함께 대통령 면담을 요구했겠는가. 서로 다른 노선과 이해를 가진 양대 노총이 한 목소리를 냈다는 것은 이번 사안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메가특구가 노동법의 예외지대가 되는 순간, 그 예외는 다른 지역과 산업으로 확산될 가능성이 크다. 1998년 파견법 제정 이후의 과정에서 드러난 것처럼 특별한 영역에서 시작된 노동 규제완화가 결국 전체 노동시장의 기준을 끌어내리는 통로가 되어 왔기 때문이다.
정부 발표에는 896조 원의 투자와 세계 최대 규모의 반도체 생산시설, 전력과 용수, 세제와 규제 특례가 큼지막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첨단 반도체는 오로지 ‘자본’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다. 반도체 공장을 짓는 건설노동자부터 생산라인에서 각종 설비를 조정하는 노동자, 장비를 유지·보수하는 사내외 협력업체 노동자, 유해 화학물질을 다루는 노동자, 물류·청소·경비를 맡는 노동자가 있어야 한다. AI 시대, AI가 노동을 대체한다는 주장이 폭포수처럼 쏟아지지만 분명하면서도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사실은 ‘노동’ 없이는 ‘생산’도 없다는 점이다.
인권단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활동가들이 6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 앞에서 열린 고 황유미 19주기 및 반도체ㆍ전자산업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 및 삼성의 환경안전보건 대책 촉구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6.3.6. 연합뉴스
장기적 산업 경쟁력은 노동존중 사회에서 나온다는 진리
12·3 내란 시도를 이겨내고 그 결과 정권까지 바뀌었지만 퇴행·반동적인 윤석열 정부가 추진했던 노동정책을 지금 다시 목도하리라고는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K-민주주의를 말하면서 경제정책은 여전히 자본의 이념과 언어로 작성되고, 미래산업을 말하면서 노동정책은 개발독재 시대의 문법을 되풀이 하고 있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노동자는 더 오래 일하고 더 쉽게 해고돼도 된다는 생각이 대한민국 최고 정책 결정권자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는 것이다.
손정순 시화노동정책연구소 연구위원
AI와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을 원한다면 숙련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하고, 안정적으로 고용되며, 산업 성장·전환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노동기본권을 저하시키면서 조성한 특구는 첨단산업의 전진기지가 아니라 나쁜 일자리의 거대한 집적지가 될 뿐이다. 도대체 한국 사회, 한국 경제는 언제까지 ‘노동자를 갈아 넣는’ 생산방식에 의존할 것인가.
이재명 정부가 진정 노동존중 사회를 구현하려 한다면 메가특구법의 노동특례 조항부터 거둬들여야 한다. 한국 노동사회의 미래가 개발독재 시기 노동 규준(規準)이라는 퇴행적 토대에 기반하는 한 AI발 반도체 산업 경쟁력, 나아가 한국 경제의 경쟁력은 사상누각에 불과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손정순 노동판 ksjso2@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