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한 발짝도 안 떠난 남자가 세상을 깨우다 [사람들] 마을 시계였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평생 고향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난 적이 없다. 지금은 러시아 땅 칼리닌그라드가 된 그 작은 도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었다. 세계사를 뒤흔든 철학자치고는 이동거리가 너무 짧아서 약간 민망할 정도다. 여행 한 번 안 하고 인류의 사고방식을 바꿔 놓았으니, 요즘 말로 하면 재택근무의 성공 사례쯤 되겠다.
동네사람들이 그의 오후 산책시간에 맞춰 시계를 맞췄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만큼 규칙적이었다는 뜻인데, 딱 한 번 그 규칙이 깨진 날이 있었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에밀』을 읽느라 정신을 놓아서 산책을 걸렀다는 일화다. 철학자도 좋은 책 앞에서는 시계 노릇을 그만두는 법이다.
그런데 이 조용하고 규칙적인 삶 속에서 그는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옳은가, 나라들은 왜 자꾸 전쟁을 하는가를 놓고 근본부터 다시 뜯어고쳤다. 여행 가방 대신 머릿속에서 대륙을 넘나든 셈이다.
1768년 요한 고틀리프 베커가 그린 칸트 초상화(위키피디아)
네가 하려는 일이 모두의 규칙이 되어도 괜찮은가
칸트 이전까지 도덕은 대개 신의 명령이거나 결과의 이익계산이었다. 착하게 살면 천당 가고, 나쁘게 살면 지옥 간다는 식이거나, 아니면 이렇게 하면 다들 이득이니 그렇게 하자는 식이었다.
칸트는 이 계산을 뒤엎었다. 그가 내놓은 정언명령(定言命令)은 간단하다. 네 행동의 원칙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규칙이 되어도 괜찮은지 먼저 물어라. 거짓말을 해도 되는지 고민된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항상 거짓말을 한다고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애초에 말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거짓말은 안 된다.
이 원칙의 무서운 점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만 특별하니까 , 이번만은 사정이 있으니까 라는 변명이 통하지 않는다.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든, 그 명령이 보편규칙으로 성립할 수 없다면 따르지 말아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훗날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의 나는 명령을 따랐을 뿐 이라는 변명을 두고 악의 평범함 을 논할 때, 그 판단기준의 뿌리에는 칸트가 있었다. 명령에 복종했다는 사실자체가 면죄부가 되지 않는다는 것, 이것이 칸트가 남긴 유산이다.
1842년 그림 속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칸트의 집(위키피디아)
계몽이란 용기를 내는 것
칸트는 1784년에 쓴 짧은 글에서 계몽을 이렇게 정의했다. 감히 알려고 하라. 인간이 미성숙한 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할 용기가 없어서 라고 그는 진단했다. 누군가 대신 생각해 주고 대신 판단해 주는 데 익숙해지면, 편하기는 해도 결국 노예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이 나온 시대의 프로이센 국왕은 프리드리히 2세(Friedrich II, 1712~1786), 흔히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불리는 인물이었다. 계몽군주를 자처하던 왕조차 칸트의 이 도발적인 정의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생각하는 것을 국가가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국왕도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요한 고틀리프 베커의 작품을 바탕으로 1770년경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슈가 그린 칸트 초상화 (위키피디아)
총 없이 평화를 설계한 사람
말년의 칸트는 「영구평화론」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국가들이 상비군을 줄이고, 서로 내정에 간섭하지 않고, 세계시민법이라는 공통규칙 아래 연합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지금 눈으로 보면 국제연합의 설계도나 다름없다. 유엔이 세워지기 150년도 더 전에, 전쟁 없는 세계를 문서로 스케치해 둔 것이다.
물론 그 시절에는 몽상가 취급을 받았다.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 1769~1821)이 유럽을 전쟁터로 만들던 시대에 평화를 논한 늙은 철학자라니, 얼마나 한가한 소리로 들렸겠는가. 하지만 역사는 몽상가의 손을 들어 줬다. 20세기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고서야 인류는 칸트가 이미 그려 둔 설계도를 다시 꺼내 들었다.
크리스티안 야코프 크라우스, 요한 게오르크 하만, 테오도어 고틀리프 폰 히펠, 카를 고트프리트 하겐 등 친구들과 함께한 칸트(위키피디아)
칸트가 오늘 한국에 질문한다면
칸트를 오늘의 한국으로 데려온다면 아마도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 명령이, 모두에게 적용되어도 괜찮은 규칙이었는가? 2024년 12월 3일 밤, 군을 동원한 윤석열의 계엄 선포를 두고 지금도 이어지는 재판과 논쟁의 핵심이 바로 이 질문이다. 명령을 내린 윤석열도, 그 명령을 실행에 옮긴 사람들도 결국 이 물음 앞에서 자유롭지 않다. 위에서 시켜서 했다 는 말은 칸트 앞에서는 변명이 되지 못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할 용기, 그것이야말로 계몽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자격이었다.
정언명령은 사람을 수단으로 쓰지 말고 목적으로 대하라는 원칙이기도 하다. 이 잣대를 한국사회 곳곳에 대 보면 뜨끔한 곳이 한둘이 아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를 숫자로만 보는 기업, 시민을 통계로만 보는 행정, 국민을 지지율로만 계산하는 정치. 칸트라면 이 모든 곳에 같은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사람을 목적으로 대하고 있는가, 아니면 도구로 쓰고 버리는가.
쾨니히스베르크의 산책자는 고향 밖으로 한 발짝도 안 움직였지만, 그가 던진 질문은 지금도 지구를 몇 바퀴째 돌고 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과 스스로 판단하는 것 사이, 그 좁은 길 위에 아직도 우리가 서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 있는 칸트의 무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