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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TS 그래미상 파문과 ‘이방인’의 주류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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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부터 다른 seven aliens, 우릴 부러워하네 저 civilians.” 방탄소년단(BTS)의 앨범 《아리랑》 수록곡 에일리언즈 〈Aliens〉의 가사 일부다. 전 세계에 거대한 팬덤 ‘아미(ARMY)’를 거느린 그들이 스스로를 ‘외계인(Alien)’으로 칭한 것은 과장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최근 그래미 어워드가 ‘아시아 팝’ 부문을 신설한 배경에는 서구와 나머지를 뭉뚱그려 구분하는 차별의 시선이 깔려 있다. 이번 그래미 사태를 계기로 에일리언즈〈Aliens〉는 도리어 역주행하며 며칠간 세계 주요 음원 차트 정상에 올랐다. 인류 문화사에서 ‘이방인(외계인)’과 ‘문명인’의 주도권 다툼은 늘 존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판도를 바꾸는 균열은 때로 뜻밖의 장소에서 불쑥 터져 나와 기존의 게임 법칙을 흔들어 놓곤 했다.   사진 1. 워싱턴 DC 주재 튀르키예 대사관에서 재즈 콘서트를 연 음악가들. 1941년.  1939년 워싱턴 DC 주재 튀르키예 대사관에서 벌어진 일도 그러했다. 당시 대사는 메흐메트 뮤니르 에르테균(Mehmet Munir Ertegun)이었다. 그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지만, 아타튀르크의 법률 고문으로서 1923년 세속주의 튀르키예 공화국을 설립하는 데 기여한 일등공신이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25년부터 스위스, 프랑스, 영국 대사를 역임했고, 1934년 튀르키예 공화국 최초로 미국 대사로 임명된 베테랑 외교관이었다. 그에게는 세 자녀가 있었다. 어린 시절을 유럽에서 보낸 아이들에게 미국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었다. 식당, 학교, 대중교통, 거리, 공연장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공간이 흑백의 피부색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그 경계를 넘어서는 일은 금기였기 때문이다.   사진 2. 1865년 미국에서 노예제도는 폐지되었지만, 인종차별의 뿌리는 쉽게 근절되지 않았다. 출처 : bostonreview.net  아직 십 대였던 대사의 두 아들은 이러한 인종차별을 깊은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1917년생인 큰아들 네수히(Nesuhi)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부터 빅밴드, 블루스, 스윙 음악 등에 매료되어 있었다. 동생 역시 형의 뒤를 따랐다. 바이올린부터 피아노까지 자유자재로 연주하고 춤과 노래에도 능했던 어머니는 형제들에게 영감을 주는 최고의 뮤즈였다. 1920년대 튀르키예의 어린아이들이 뉴올리언스의 진득한 감성이 담긴 블루스에 빠져 있는 모습은 선뜻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들은 진정한 ‘재즈 덕후’였다. 1930년대에 이들이 수집한 재즈 음반은 이미 2만 장을 넘어섰고, 10년 후에는 5만 장 이상을 기록할 정도였다. 아버지가 주미 대사로 부임했을 때, 형제는 드디어 루이 암스트롱의 나라에 가게 되었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사진 3. 아흐메트와 네수히 에르테균 형제. 형제는 재즈 콘서트를 부지런히 찾아다녔지만, 하렘의 클럽에서 생생한 라이브 연주를 듣겠다는 그들의 ‘아메리칸드림’은 산산조각이 났다. 백인으로 분류되었던 이들은 흑인 주거 구역으로 자유롭게 넘어갈 수도, 음반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음악은 색맹”이라고 믿던 이 어린 재즈 마니아들에게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형제는 미국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명문 학교에서 또래들과 어울리고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대신, 수업을 빼먹고 워싱턴의 흑인 구역을 몰래 기웃거리며 재즈를 향한 갈증을 채워 나갔다. 그러던 1939년, 두 형제가 머리를 맞대고 뭐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결단을 내리게 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사진 4. 1939년 링컨 기념관 계단에서 7만 5000여 관중이 모인 가운데 치러진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 출처 : www.kennedy-center.org 도화선이 된 것은 흑인 인권 운동에 앞장서던 오페라 가수 마리안 앤더슨의 공연 무산 사건이었다. 그녀는 워싱턴 헌법홀에서 흑인과 백인이 한자리에 모여 음악을 듣는 콘서트를 기획했으나, ‘미국혁명의 딸들(DAR)’이라는 보수 단체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고 말았다. 인종차별을 둘러싼 분노가 온 사회를 거세게 흔들자,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부부가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 결과 그해 4월 부활절, 앤더슨은 링컨 기념관 계단 위에서 7만 5천 명의 관중이 몰려든 가운데 역사적인 공연을 마쳤다.  에르테균 대사 부부는 라디오 생중계를 들으며 미국의 뿌리깊은 인종차별에 격노했다. 이를 계기로 아흐메트와 네수히 형제는 피부색과 상관없이 모두가 함께 연주하고 식사하는 자리를 직접 만들기로 했다. 당시 일반적인 미국 사회 분위기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파격적인 기획이었다. 형제는 매주 토요일 재즈 클럽의 음악가들을 다음 날 튀르키예 대사관 관저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고 연주를 즐겼다.  지인들과 재즈 팬들도 모여들었다.   사진 5. 1940년대 초반 워싱턴 주재 튀르키예 대사관은 재즈의 선율 속에 인종 차별의 굳건한 장벽이 녹아내리는 낙원이었다.   사진 6. 튀르키예 대사관은 피부색 차별 없이 흑인과 백인이 한자리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던 자유지대였다.  사실 대사는 음악에 관심이 없는 인물이었다. 하루 다섯 번씩 꼬박꼬박 기도를 올리는 독실한 무슬림이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과 소련이 튀르키예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을 압박하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국운을 짊어진 외교적 책무로 분주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대사는 튀르키예 대사관이 흑백 재즈 뮤지션들의 성지가 되는 것을 용인했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장려하기까지 했다. 어느 날은 미국 남부 출신의 한 상원의원이 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관저 주변을 지나다 보니 흑인들이 귀 대사관의 정문으로 출입하더군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앞으로는 후문으로 통행하도록 하십시오.” 대사는 즉시 답장을 보냈다. 편지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손님은 모두 정문으로 들어옵니다. 신 앞에서는 누구나 평등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원님께서 정 원하신다면, 의원님께는 후문도 열어두겠습니다.” 또 다른 일화도 있다. 여느 때처럼 대사관저에서 휴일 재즈 콘서트가 열리던 날이었다. 마침 관저 반대편에서 다른 손님들을 접대하고 있던 대사를 위해, 큰아들 네수히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문을 닫으려 했다. 그러자 대사가 아들을 저지하며 말했다. 문은 열어두어라. 여기 계신 손님들도 음악을 들으실 수 있게 말이다.” 미국 정치의 심장부인 워싱턴 한복판, 튀르키예 대사관에서 인종차별의 굳건한 장벽이 재즈의 선율 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사진 7. 아흐메트, 네수히 형제와 듀크 엘링턴 등 뮤지션들.  대사의 통쾌한 태도에 고무된 에르테균 형제는 이제 대사관 밖으로 무대를 넓혀 콘서트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에서 흑백 관객이 한데 섞여 앉을 수 있는 장소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간신히 섭외한 첫 장소가 유대인 협회 건물이었고, 두 번째로 찾은 곳이 내셔널 프레스 클럽(National Press Club)이었다. 처음에 프레스 클럽 측은 대관을 거절했으나, 네수히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종차별 문제로 큰 사회적 낭패를 겪게 될 것이라며 배짱 있게 압박하여 끝내 콘서트를 성사시켰다. 유럽인도, 기독교인도 아니며, 치외법권을 누린다 한들 여전히 이방인에 불과했던 이 튀르키예 형제는 음악에서 인종 차별의 색깔을 걷어내며 미국 주류 음악계에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1944년, 아버지 메흐메트 뮤니르 에르테균 대사가 세상을 떠났다. 2년 뒤 그의 유해는 미국 미주리호(USS Missouri)에 실려 고국 이스탄불로 돌아갔다. 미주리호는 1945년 일본이 항복 문서에 서명했던 미국의 정예 전함이었다. 자국에서 타계한 외국 대사를 전함까지 동원해 본국으로 송환한 사례는 미국 역사상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튀르키예 대사관에 세워졌던 ‘재즈의 낙원’도 사라졌다. 다른 가족들은 튀르키예로 돌아갔으나 두 형제는 미국에 남기로 했다. 형 네수히는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재즈 레코드숍 주인과 결혼했고, 동생 아흐메트는 1947년 뉴욕에서 아예 블루스 전문 음반사를 설립했다. 훗날 대중음악사의 전설이 된 ‘애틀랜틱 레코드(Atlantic Records)’의 시작이었다.   사진 8. 롤링 스톤즈 잡지는 아레타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을 역대 가장 위대한 가수 100인 목록에서 1위로 선정했다. 아틀랜틱 녹음실에서 찍은 아흐메트 에르테균과 아레타 프랭클린.  초기 레이블의 규모는 구멍가게 수준에 불과했다. 아흐메트는 창업 자금을 마련하려 어린 시절 수집했던 수만 장의 음반을 처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업 밑천은 치과 주치의에게서 나왔다. 과거 대사관에서 월급을 받으며 가족의 치아를 돌봐주었던 의사를 ‘꼬드겨’ 1만 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해낸 것이다. 의사의 제자였던 허브 에이브럼슨(Herb Abramson)도 공동 창업자로 합류했다. 설립 후 몇 년간은 제작한 음반이 단 한 장도 팔리지 않을 정도로 참담한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4~5년이 지나자 애틀랜틱 레코드는 반전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주류의 틀에 매이지 않는 ‘반골 기질’을 지닌 이들이 모여 미국 대중음악계에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빌보드지 기자 출신인 제리 웩슬러(Jerry Wexler)는 입대한 허브 에이브럼슨을 대신해 제작자로 합류했다. 당시 음악계에서 흑인 음악 음반을 가리키는 공식 용어는 인종 음반(Race Record) 이었다. 이처럼 차별적 선입견이 담긴 명칭 대신, 장르 자체의 음악적 특색을 살린 ‘리듬 앤 블루스(Rhythm and Blues, R&B)’라는 단어를 처음 제시하고 통용시킨 인물이 바로 제리 웩슬러였다.   사진 9. 재즈 음악의 전설 레이 찰스(Ray Charles)와 에흐메트 에르테균. 애틀랜틱 레코드의 음반은 소리부터 달랐다. 당시 일반적인 음반사들은 흑인 아티스트의 목소리를 녹음하는 데 큰 비용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에르테균은 최고 수준의 음질을 구현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훗날 최상의 음향을 뜻하는 대명사로 자리 잡은 ‘애틀랜틱 퀄리티’를 완성한 주역은 톰 다우드(Tom Dowd)였다. 그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핵물리학을 전공하고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맨해튼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던 인재였다. 그러나 폐쇄적인 연구 풍토에 반발해 학계를 떠난 뒤 음향 엔지니어로서 독보적인 재능을 꽃피웠다. 여기에 미국인 그 누구보다도 재즈를 깊이 이해했던 이방인, 에르테균 형제가 있었다. 아흐메트는 특유의 친화력을 무기로 수많은 흑인 아티스트들을 섭외했다. 재즈에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흑인 특유의 억양으로 나랑 작업 하나 합시다”라고 밀어붙이는 그의 스타일은 아티스트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대학에서 재즈사를 강의할 만큼 깊은 식견을 가졌던 형 네수히와 아흐메트 형제는 원석 같은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미국 전역을 발로 뛰며 누볐다. 루스 브라운(Ruth Brown), 레이 찰스(Ray Charles), 아레타 프랭클린(Aretha Franklin) 같은 거장들이 애틀랜틱 레코드를 통해 비로소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았다. 애틀랜틱은 흑인 뮤지션들의 목소리를 최상의 음질로 구현해 전 세계에 알렸다.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 오르넷 콜먼(Ornette Coleman), 모던 재즈 쿼텟(Modern Jazz Quartet) 등 재즈사의 빛나는 이름들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비단 재즈와 R&B뿐만이 아니었다. 크림(Cream),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 같은 록의 전설들 역시 애틀랜틱의 품 안에서 음악적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 10. 믹 재거(롤링 스톤즈), 로버트 플랜트 (레드 제플린), 필 콜린스, 밴드 크림. 시계방향.  1983년, ‘록앤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설립을 주도하고 성사시킨 주역이 아흐메트 에르테균이었던 것도 우연은 아니다. 미국 음악사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87년에는 아흐메트가, 1991년에는 형 네수히가 록앤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흥미롭게도 두 형제는 ‘미국 축구 명예의 전당(National Soccer Hall of Fame)’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형제가 1971년 뉴욕 코스모스(New York Cosmos) 축구단을 창단하고 축구 황제 펠레(Pelé)를 미국으로 초대해 미국 축구 부흥을 이끈 주인공이었기 때문이다. 아흐메트 에르테균의 마지막은 생애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2006년 12월, 롤링 스톤스의 콘서트 뒤 무대에서 넘어져 의식을 잃고 한 달 반뒤 83세의 나이로 운명했던 것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전설적인 뮤지션들이 한자리에 모여 추모 공연을 올렸다.   사진 11. 레드 제플린은 1980년 해체 이후 2007년 런던 O2 아레나에서 아흐메트 에르테균을 기리는 추모 공연을 펼쳤다.     사진 12.  2007년 레드 제플린 공연.  2007년 뉴욕에서는 윈튼 마살리스(Wynton Marsalis)를 필두로 에릭 클랩턴(Eric Clapton), 닥터 존(Dr. John), 솔로몬 버크(Solomon Burke), 벤 E. 킹(Ben E. King), 샘 무어(Sam Moore), 스티비 닉스(Stevie Nicks), 크로스비 스틸스 내시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 필 콜린스(Phil Collins) 등 시대의 거장들이 모여 그를 위한 추모 콘서트를 열었다. 1980년 해체 콘서트 이후 노장이 된 레드 제플린 멤버들이 2007년 런던 O2 아레나 무대에 다시 모여 전설적인 재결합 공연을 펼친 이유 역시 아흐메트 에르테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아흐메트과 형 네수히 에르테균은 십대에 미국으로 건너와서 뉴욕 할렘의 뒷골목 클럽에서 자유롭게 재즈를 듣는 꿈을 꾸었다.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를 허물고, 인종과 장르의 벽을 넘나드는 아메리칸 드림을 그들은 음악으로 이루었다.  최근 방탄소년단(BTS)은 그래미상 출품을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소신을 밝혔다.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음악의 힘으로 편견과 차별의 구도를 뒤흔들었던 아흐메트 에르테균이 이 말을 들었다면 이렇게 응수하지 않았을까. 내 말이.”  이혜승 튀르키예 통신원 kedile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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