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이 지워버릴 뻔한 귀한 한글 이름 ‘서울’ [뉴스] 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경성부(京城府)를 서울시라 칭하고 차(此)를 특별자유시로 함. 서울시의 관할 구역은 현 중구, 종로구, 동대문구, 성동구, 서대문구, 마포구, 용산구, 영등포구로 하되 금후 법률에 의하야 차를 변경함을 득(得)함.”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장관 아처 린 러치 소장이 공표한 서울시 헌장의 제1조 조문이다. 미국의 도시자치 헌장을 본떠 만든 7장 58조의 서울시 헌장은 경성(京城)이란 수도 명칭을 서울로 바꾸고 경기도에서 분리해 도(道) 수준으로 승격시킨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는 그해 9월 18일 공표되고 10일 뒤부터 시행된 미군정 법령 제106호에 의해 확정됐다. 서울특별자유시가 서울특별시가 된 것은 지방자치법이 발효된 1949년 8월 15일이었다.
1946년 8월 10일 미군정청 관보에 실린 서울시 헌장 한글 공포문 표지(왼쪽)와 영문 공포문 본문 첫 장(오른쪽), (서울시)
서라벌 소부리 쇠벌… ‘서울’의 어원은 무엇일까
서울이란 이름이 공식화된 지 올해로 80주년을 맞았다.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서울이라고 불렀으나 법령으로 정해진 것은 그때가 처음이어서 그때부터는 글로도 모두 서울이라고 썼다. 마을이나 도로에 한글 지명을 쓰는 경우는 있지만 도시명을 우리말로 지은 것은 서울이 유일하다.
사전적으로 ‘서울’은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첫 번째는 보통명사로 ‘한 나라의 중앙 정부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고유명사로 ‘한강 하류에 위치한 면적 605㎢의 도시’를 가리킨다.
서울의 어원은 신라 수도 서라벌(徐羅伐·경주)에서 비롯됐다는 학설이 다수다. 소수설은 백제 수도 사비(泗沘·부여)를 일컫는 소부리(所夫里·소벌)나 후고구려(태봉) 수도 철원(鐵原)의 우리말 쇠벌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도성의 범위를 놓고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논쟁을 벌이다가 눈 녹은 자리를 경계로 삼았다는 일화를 들어 ‘눈울타리’를 뜻하는 ‘설(눈)울’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일찍이 백제가 서울의 한강 남쪽에 위례성(慰禮城)을 쌓고 도읍을 삼았다가 고구려가 점령해 남평양성(南平壤城), 혹은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불렀다. 통일신라 때는 한산주(漢山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이었다. 고려에 들어와 양주(楊州)로 바뀐 뒤 문종 때인 1067년 남경(南京)으로 승격했다. 숙종은 비기(秘記) 예언에 따라 1104년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궁궐을 짓고 천도를 추진하기도 했다.
260년 전 서울 경계는 중랑천(동), 불광천(서), 한강(남), 북한산(북)
조선 태조 이성계는 개국 2년 만인 1394년 한양으로 천도했으니 올해로 정도(定都) 632주년이다. 왕자의 난을 거치며 1399년 정종이 개경으로 환도했으나 1405년 태종이 다시 옮겨오면서 지금까지 수도의 지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하자 2004년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을 내세워 위헌 결정을 내렸다.
인왕산의 서울 성곽. 조선 태조는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뒤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산을 따라 도성을 쌓았으나 한성부 권역은 성밖 10리까지였다. (이희용 촬영)
한양 도성(한성)은 내사산(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 마루금을 따라 쌓았지만 한성부 구역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고 해서 도성 밖 10리까지였다. 지형에 따라 경계가 일정하지는 않아 동북쪽에는 ‘5리를 더했다’는 가오리(加五里)란 지명도 있다. 일설에는 미아리고개에서 장사 지내는 곡소리가 임금에게 들리지 않도록 5리를 더 가라고 했다고 한다. 1765년(영조 41년) 간행된 사산금표도(四山禁標圖)에 따르면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불광천, 남쪽은 한강, 북쪽은 북한산까지를 경계로 삼고 벌채나 매장 등을 금했다.
1820년경 한양 도성과 주변의 모습을 그린 실측 지도 수선전도(首善全圖).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벼슬 이름은 판한성부사와 한성부윤을 거쳐 예종 때 한성판윤으로 개칭했다. 품계는 판서와 같은 정2품이었다. 조선 왕조 512년 동안 한성판윤이 2012대를 내려왔으니 평균 재임 기간은 3개월에 불과했다. 특히 고종 재위 43년간은 429명이나 됐다.
한성부 청사는 이조와 호조 사이 지금의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었다. 행정구역은 5부(部) 52방(坊)으로 구분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중곡동 일대)와 고양군 하도면 일부(수색 일대)가 각각 한성부 두모방과 연희방에 편입되고 5부가 5서(署)로 개편됐다.
1904년의 한성부 관아 정문. KT 광화문빌딩 자리에 있던 한성부는 조선 말기 들어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세기 독립신문도 발행처를 서울로 표기
일반 백성은 공식 명칭인 한성보다 서울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안정복의 『동사강목』, 이덕무의 『앙엽기』,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는 각각 ‘徐蔚(서울)’, ‘徐兀(서올)’, ‘徐鬱(서울)’로 표기했다. 서양인들도 서울로 불러 나라 밖에 그렇게 알려졌다.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은 국문판과 영문판에서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1896년 8월 27일 자 독립신문(62호) 한글판(위)과 영문판(아래). 발행처를 각각 ‘조선 서울’과 ‘Seoul Korea’로 표기했다. (독립기념관)
일제는 1910년 8월 27일 대한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 10월 1일 한성부를 경성부(京城府)로 개칭하고 경기도 소속으로 격하시켰다. 성저십리 가운데 대부분을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시키고 일본인 거류지가 있는 용산 일대와 동대문·서대문·서소문 밖 일부만 경성부에 남겨놓았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과 함께 5서는 5부로 환원되고 각 방은 동(洞)과 면(面)으로 바뀌었다. 일부 지역에는 통(通), 정(町), 정목(丁目) 등의 일본식 행정구역 명칭을 도입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가 대경성계획을 추진하면서 북쪽은 정릉천, 동쪽은 중랑천, 서쪽은 홍제천, 남쪽은 안양천과 대방천까지 경계가 늘어났다. 한강 이남의 영등포도 비로소 서울로 편입됐다. 1943년에는 구제(區制)를 실시해 7개구로 나누고 이듬해 마포구를 신설했다. 경성부 기관장은 초창기에 사무관급이었다가 1933년 이후 장관급으로 격상됐다. 18명 모두 일본인이었고 평균 재임 기간은 23개월이었다.
1930년대 경성(서울) 중심부 모습. 왼쪽의 경성부청(서울시청)에서 세종대로가 뻗어 있고 오른쪽 위에 지금은 철거되어 없는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서울역사박물관)
을지로 충무로 등 이름 붙인 2대 경성부윤 김형민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이뤄지자 금산 군수와 전남도청 관리를 역임한 김창영이 쓰지 게이고 경성부윤으로부터 업무를 인계받았다. 9월 9일 미군정이 들어서면서 업무가 이원화됐다. 군정부윤은 제임스 킬러프 소령에 이어 제임스 윌슨 중령, 민정부윤은 총독부 관리 출신 이범승에 이어 김형민이 각각 맡았다. 각각 1대와 2대로 치지만 김창영을 초대 경성부윤으로 보기도 한다.
김창영과 이범승은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된 인물인 반면 김형민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다.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와 미시간대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공부하고 귀국했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할 때 친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투옥됐다. 해방 직후 3·1석유상사를 운영하다가 웨슬리언대 인맥으로 주한미군 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발탁돼 경성부윤이 된 데 이어 1946년 9월 28일 서울특별자유시 초대 시장으로 취임했다. 당시 나이 39세로 최연소 기록이다.
광복 후 2대 경성부윤이자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 최연소 서울시장인 그는 일본식 지명을 우리 식으로 바꾸고 서울시 이름을 정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독립기념관)
김형민은 1946년 6월 30일 부임하면서 일제 잔재인 정, 통, 정목을 각각 동, 로(路), 가(街)로 바꾸면서 한국사의 위인 이름을 붙였다. 황금정통(黃金町通·고가네마치도리)은 을지로, 본정통(本町通·혼마치도리)은 충무로, 죽첨정(竹添町·다케조에초)은 충정로, 원정(元町·모토마치)은 원효로가 됐다.
미군정이 서울이란 이름을 정할 때도 김형민이 강력하게 서울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도 식자들은 한성 등 한자식 옛 명칭을 선호했다. 각계 인사 90명으로 구성된 경성부 고문회의는 한성시라고 쓰고 서울시라고 읽는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냈다. 그러나 미군은 영문 표기 ‘Seoul’과 일치하는 서울을 선호해 미국 유학파인 김형민과 의견이 일치했다.
김형민은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로도 넉 달 더 시장에 재직하다가 윤보선에게 물려줬다. 3·1석유상사로 돈을 벌어 대한극장도 세웠으나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국쾌남에게 넘겼다. 1998년 5월 2일 별세해 고향인 전북 익산에 묻혔다가 2003년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됐다.
미군정청 주요 인사들. 왼쪽부터 민정장관 안재홍, 사령관 존 하지 중장, 부사령관 앨버트 브라운 소장, 김형민 서울시장, 고문 서재필. (국가기록원)
서울시 명칭까지 우남 이승만에게 바치려던 아첨꾼들
서울이란 명칭은 법제화된 지 10년도 지나지 않아 도마에 올랐다. 이승만 대통령이 1955년 9월 18일 개정을 제안하는 담화를 발표한 것이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서울이 수도를 일컫는 보통명사이지 땅 이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도성 이름을 묻는 프랑스 선교사의 질문에 사람들이 서울이라고 답하자 프랑스 사람이 소리낼 수 있는 음을 취해 쓴 것이 외국에 잘못 알려졌으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뜨거운 논쟁이 펼쳐졌다. 이승만에게 아부하려는 권력 추종자들이 주도하는 가운데 당대의 지식인들도 가세했다. 한글 전용론자인 최현배는 ‘큰 벌판’을 뜻하는 ‘한벌’을 제안했다. 국무위원과 정부위원 등으로 수도명칭제정연구위원회가 발족했고 서울시도 수도명칭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여론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승만 호인 우남(雩南)이 1423표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한양 1117표, 한경(韓京) 631표, 한성 353표였다.
당시는 파고다공원(탑골공원)과 남산공원 등에 이승만 동상이 세워지고 남산 정상의 팔각정과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건설 중이던 시민회관을 각각 우남정과 우남회관으로 명명하는 등 이승만 우상화가 한창일 때였다. 이승만시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1950년대 후반에 촬영한 서울 남산 정상의 팔각정. 우남정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서울역사박물관)
수도 이름을 살아 있는 집권자의 호로 바꾸려는 시도는 거센 반발을 불렀다. 결국 이승만은 1957년 1월 20일 한도(韓都)가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하며 내가 대통령으로 있으면서 서울의 이름을 우남특별시로 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여러 사람이 ‘내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렇게 될 것(우남시로 바뀔 것)이니 그냥 둬보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내가 강권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후 4·19혁명이 일어나 없던 일이 됐다.
서울대 총장 모시려다 한성대 총장 잘못 초청
80년 전 서울이란 명칭이 확정됐어도 한자 문화권에서는 한동안 옛 명칭대로 불렀다. 그래도 일본은 일찍부터 가타가나를 써서 ‘게이조(京城)’ 대신 ‘ソウル(소우루)’로 바꿔 부르고 있는 반면 중국은 늦게까지 ‘한청(汉城·漢城)’이라고 했다.
그러다 보니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한성을 다른 도시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한성상회와 서울상회를 구분하지 못하고 서울신문과 서울방송을 한성신문과 한성방송이라고 불렀다. 서울대 총장을 초청하려다가 한성대 총장에게 초대장이 잘못 가는 촌극이 빚어지기도 했다.
인왕산 범바위에서 남산 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야경. 서울시는 세계인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도시의 하나가 됐다. (이희용 촬영)
정부는 1992년 한중 수교 직후부터 개선 방안을 마련하려고 했으나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나와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했다. 2005년 1월에야 중국식 발음으로 ‘서우얼(Shouer)’인 ‘수이(首尔·首爾)’로 확정하고 중국과 대만 정부에 협조를 요청했다. 관공서나 공항 등을 시작으로 바꿔나가고 있지만 아직도 기존 명칭대로 부르는 사례가 간혹 있다.
산으로 둘러싸인 서울의 지형 특성을 반영하고 주요 관광명소를 시각화한 서울 일러스트 관광지도. (서울관광재단)
서울은 80년 전 이름이 법제화됐을 때보다 면적은 4배 이상, 인구는 10배 이상 늘어났다. 특히 1970년대 영동 지구 개발이 서울의 팽창을 가속화했다. 영동은 ‘영등포의 동쪽’이란 의미였으나 1975년 성동구에서 떨어져나올 때 강남구로 명명되면서 차츰 사라지고 영동대교, 영동대로, 영동시장, 영동고등학교 등 일부에만 지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서울의 구가 25개에 이른다.
서울의 발전은 외형적 성장에만 그치지 않았다.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가 주목하는 도시가 됐고 경제 성장, 민주 혁명, 한류 등으로 세계인이 가장 방문하고 싶어하는 도시의 하나가 됐다. 만일 그 이름이 서울이 아니라 우남이었어도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누릴 수 있었을까?
남산 정상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본 서울시 전경. 고층빌딩이 빼곡한 가운데 왼쪽부터 인왕산, 북악산, 낙산이 감싸고 있고 뒤로 북한산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이희용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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