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려 가 별명이던 영국총리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 [사람들]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Herbert Henry Asquith, 1852~1928)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낯설지만, 그가 영국정치에 남긴 흔적은 결코 작지 않다. 1908년부터 1916년까지 영국총리를 지낸 그는 다수당 정부를 이끈 마지막 자유당 총리였고, 오늘날 영국 복지국가의 뼈대를 놓은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람, 별명이 참 재미있다. 기다려 보자(wait and see). 신중함의 상징이자 동시에 우유부단함의 대명사였던 이 말버릇이 결국 그를 총리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데 한몫했다.
1910년대경의 애스퀴스(위키피디아)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시작을 놓다
영국 요크셔의 방직업자 아들로 태어난 애스퀴스는 아버지를 여덟 살에 여의고도 옥스퍼드까지 진학해 변호사가 됐다. 스스로 운명을 헤쳐온 셈이다. 1886년 하원의원이 된 뒤 내무장관을 거쳐 재무장관을 지냈고, 전임총리 헨리 캠벨배너먼(Henry Campbell-Bannerman, 1836~1908)이 병으로 물러나자 1908년 자연스럽게 총리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의 정부가 남긴 업적은 결코 가볍지 않다. 1908년 노령연금제도, 1911년 실업보험을 포함한 국민보험법을 도입해 오늘날 영국 복지국가의 초석을 놓았다. 이를 재정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그 유명한 인민예산 이고, 이에 반발한 상원과 정면충돌하며 1911년 의회법을 통과시켜 상원의 거부권을 대폭 제한했다. 귀족들의 특권을 손보고 서민을 위한 사회보장을 세운, 말 그대로 개혁가였다.
1857년경 애스퀴스(왼쪽)와 그의 여동생 에밀리, 형 윌리엄 (위키피디아)
전쟁 앞에서 무너진 신중함
문제는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시작됐다. 평화 시기의 신중함은 미덕이었지만, 전시에는 다르다. 포탄 부족 사태,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참패가 이어지며 여론은 들끓었고, 애스퀴스는 결단력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1915년 보수당·노동당까지 끌어들여 연립정부를 꾸렸지만 미봉책일 뿐이었다. 결국 재무장관이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가 등을 돌리고 그를 밀어내면서, 애스퀴스는 1916년 12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설상가상으로 그해 여름 솜 전투에서 큰아들 레이먼드마저 전사했다. 평시의 명재상이 전시의 무능력자로 추락한, 참으로 씁쓸한 반전이다.
1916년 솜 전투 당시 전선을 방문한 애스퀴스(위키피디아)
참정권 앞에서는 딴청
더 흥미로운 대목은 따로 있다. 애스퀴스는 여성참정권에 끝까지 반대한 인물로 유명하다. 바로 그의 재임기간 동안 에멀린 팽크허스트(Emmeline Pankhurst, 1858~1928)가 이끄는 여성사회정치연합이 창문을 깨고 단식투쟁을 벌이며 격렬한 참정권운동을 벌였다. 서민의 사회보장은 서둘러 챙기면서 여성의 한 표는 끝까지 틀어막은 셈이니, 그의 개혁이 얼마나 반쪽짜리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결국 여성참정권은 그가 물러난 뒤인 1918년에야, 그것도 제한적으로 인정됐다.
1919년 애스퀴스 초상화 (위키피디아)
한국에 남기는 물음
애스퀴스의 생애를 곱씹다 보면 두 가지가 겹쳐 보인다. 하나는 위기 앞에서 우물쭈물하다 자기 당 사람 손에 끌려 내려온 지도자의 모습이다.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고도,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이들 가운데 스스로 물러나거나 제대로 책임진 사람이 몇이나 되는가. 영국자유당은 부족하나마 결단을 내려 로이드 조지로 지도력을 넘겼지만, 윤석열정권의 비상계엄상황에서 여당인 국민의힘과 대법원장 등 그 주변 인물들은 여전히 지켜보자 는 말만 반복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다른 하나는 개혁의 반쪽짜리 성격이다. 애스퀴스는 서민복지에는 앞장서면서도 여성의 정치적 권리에는 눈을 감았다. 경제적 시혜와 정치적 평등은 별개의 문제이며, 후자는 결국 거리에서, 감옥에서, 단식투쟁 속에서 팽크허스트 같은 이들이 몸으로 밀어붙여 얻어낸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도 복지나 성장 담론은 넘쳐나지만 정작 권력구조의 민주적 개혁, 소수자의 참정권과 대표성 문제는 뒷전으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위에서 내려주는 개혁만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 여기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애스퀴스는 복지국가의 설계자로 기억되지만 동시에 참정권 반대자로도 기억된다. 어느 한쪽만 보고 그를 평가할 수 없듯이, 오늘의 지도자들도 훗날 이 두 개의 저울 위에서 함께 무게를 재게 될 것이다.
서튼 코트니에 있는 애스퀴스의 무덤(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