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의 기준과 시민의 질문 사이 [칼럼] 천주교정의평화연대(정평연대)가 최근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원로들의 제언을 내놓았다. 황석영, 백낙청, 함세웅, 도올 김용옥, 이부영 등 여러 원로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평화, 87년 체제의 극복, 불평등 완화, 노동의 존엄, 시민주권, 국가 자율성이라는 여섯 가지 기준을 제시하면서 유시민 작가와 방송인 김어준 씨를 직접 거론했다.
정평연대는 대통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은 것도 아니라고 전제하면서도, 정치가 상대방을 ‘배신자’로 몰아세우고 적발과 색출의 언어로 변질되는 현실을 우려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다.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말했느냐보다 무엇을 말했느냐이다. 원로가 말하면 성찰이고, 시민이 말하면 진영논리라는 식의 구분은 민주주의 원리와 어울리지 않는다. 오랜 민주화운동의 경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해서 비판이 면제되는 것도 아니며, 뉴미디어에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의 발언이 처음부터 정치적 권력투쟁으로 규정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모든 목소리를 같은 기준으로 검증하는 일이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인 이재명 전 대표가 유시민 작가, 도올 김용옥 선생과 새 정부의 과제 등을 주제로 대담한 영상이 15일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유튜브 채널을 통해 공개됐다. 2025.4.15 [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유튜브 화면 캡처,
비판을 권력투쟁으로 읽는가
유시민 작가는 이재명 정부의 국정운영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재건축론’을 제기했다. 그는 오랫동안 이재명 대통령을 지지해 왔지만, 현재의 국정운영 방식에는 우려할 지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검찰개혁 논의가 지연되는 과정 등을 거론하면서 정부의 방향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 발언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그 비판을 어떤 성격의 언어로 규정할 것인가이다. 정평연대의 문제 제기처럼 정치권 내부의 권력관계나 진영의 재편이 그 발언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살펴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비판의 본질을 규정한다면 논쟁의 초점이 바뀐다. 정치적 발언에는 언제나 여러 동기가 섞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적 논쟁에서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동기가 아니라 내용이다. 검찰개혁이 왜 지체되었는가. 정부가 약속했던 개혁과 실제 추진하는 정책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 그 차이가 있다면 왜 발생했는가. 정부의 국정운영이 시민들의 기대와 어느 지점에서 어긋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하지 않은 채 비판자의 발언을 ‘진영 내부의 파이 싸움’이나 ‘누구의 설계대로 집을 짓느냐’는 문제로 환원한다면, 정작 검증해야 할 정책과 제도의 문제는 뒤로 밀려난다. 비판자의 정치적 위치를 분석하는 것과 그가 제기한 정책적 문제를 검증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민주주의에서는 둘 다 필요하지만, 앞의 분석이 뒤의 검증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시민은 누군가의 추종자일 뿐인가
정평연대는 김어준 씨와 그가 운영하는 뉴미디어의 영향력을 문제 삼으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는 충분히 토론할 수 있는 문제다. 실제로 특정 방송인이나 미디어 진행자가 정당의 지지층과 정치적 의사 형성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 영향력을 받아들이는 시민은 어디에 있는가. 시민은 언제나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존재인가. 뉴미디어를 시청하는 사람은 스스로 판단할 능력이 없는가.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레거시 미디어든 유튜브든 팟캐스트든 모든 미디어에는 영향력이 있다. 조선일보 사설도 독자의 판단에 영향을 미치고, KBS 뉴스도 시청자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며, 유튜브 방송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문제는 영향력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어떤 방식으로 행사되는가에 있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가 26일 오전 김어준의 겸손은힘들다 뉴스공장과 인터뷰하고 있다. 2024.3.26. 뉴스공장 영상 갈무리
최근 유시민과 김어준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이 문제가 드러난다. 김어준 씨에 대한 비판자들은 그를 ‘밤의 대통령’에 비유하며 선출되지 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문제 삼고 있다. 이는 현재 벌어지는 공론장 논쟁의 한 축이다. 그러나 반대편에서는 기존 언론이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던 목소리를 뉴미디어가 제공해 왔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이 양쪽 주장은 모두 검토 대상이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뉴미디어는 민주주의를 왜곡한다’거나 ‘뉴미디어는 시민의 해방구다’라는 단정이 아니다. 누가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가. 어떤 근거를 제시하는가. 틀린 정보가 나왔을 때 수정하는가. 반대 의견을 소개하는가. 시청자에게 판단의 여지를 남기는가. 그리고 시민들은 그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이런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공론장의 문제를 다루면서 정작 공론장의 주체인 시민을 지워버리는 것은 역설이다.
‘양비론’은 언제나 중립인가
정평연대가 제시한 여섯 가지 기준은 그 자체로 중요한 사회적 의제다. 평화, 불평등, 노동, 시민주권, 국가의 자율성은 어느 정부에서든 지속적으로 검토해야 할 가치다. 그러나 기준을 제시하는 것과 현실의 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작업이다. 예컨대 ‘시민주권’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현재 정부의 어떤 정책이 시민주권을 확대했는지, 어떤 정책이 축소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따져야 한다. ‘노동의 존엄’을 이야기한다면 노동시간,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 산업재해, 노동조합의 권리 같은 구체적인 현실을 살펴야 한다. ‘평화’를 말한다면 남북관계와 군사정책, 외교정책에서 어떤 선택이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져야 한다. ‘불평등 완화’를 이야기한다면 조세와 주거, 자산, 복지, 교육, 의료의 현실을 분석해야 한다. 가치의 목록만 제시한다고 정치가 구체화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책임은 결국 현실의 선택에 관한 것이다. 어떤 법안을 추진했는가. 어떤 법안을 미뤘는가.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갔는가. 누구의 부담이 늘어났는가. 시민에게 약속한 것은 지켜졌는가. 그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이 있었다면 누가 책임지는가. 이 질문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서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고, 유시민을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며, 김어준을 비판하는 것도 필요하다. 동시에 정평연대와 원로들의 판단 역시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공론장의 기본적인 대칭성이다.
원로의 권위보다 시민의 검증이 중요하다
우리 사회에서 원로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 문학과 사상, 종교의 현장에서 오랜 시간 활동해온 사람들의 경험은 분명 귀중하다. 그들의 발언을 가볍게 여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원로의 경력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는 권위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과거의 민주화운동 경력이 오늘의 모든 정치적 판단을 자동으로 정당화해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사람일수록 현재의 권력을 더욱 엄격하게 검증해야 한다. 여기에서 ‘원로 정치’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원로가 사회의 방향을 제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회가 그 방향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는 원로의 말을 경청하면서도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왜 이 기준을 지금 제시하는가. 이 기준은 누구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가. 과거에는 권력을 비판했던 기준이 현재의 권력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가. 비판하는 사람과 비판받는 사람에게 동일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이 있어야 원로의 목소리도 민주주의 안에 머물 수 있다.
이재명 대통령이 10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시민사회 원로인 함세웅 신부, 백낙청 교수와 오찬 간담회를 하고 있다. 2025.7.10. 연합뉴스
정치의 병은 말의 거침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늘날 정치가 지나치게 적대적이라는 지적에는 공감할 부분이 있다.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상대방을 배신자나 적으로 규정하고, SNS에서는 멸칭과 조롱이 넘쳐난다. 최근 범여권 지지층 내부에서도 서로를 향한 과격한 표현이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정치의 병리를 몇몇 스피커의 언어로만 설명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가 극단화되는 데에는 시민의 불안과 경제적 불평등, 주거 문제, 세대 갈등, 노동의 불안정, 지역 격차, 미디어 환경의 변화, 정당정치의 취약성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한다. 사람들이 왜 특정 정치인의 말에 열광하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왜 기존 언론보다 특정 유튜브 방송을 신뢰하는지 물어야 한다. 왜 정당보다 특정 정치평론가의 말을 더 중요하게 받아들이는지도 물어야 한다. 그 답을 찾지 않은 채 스피커의 언어만 교정하려 한다면 현상의 표면만 건드리는 셈이다.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누군가가 거친 말을 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정치가 자신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는다고 느낄 때 분노가 커진다. 따라서 정치의 언어를 바꾸려면 정치의 현실도 바뀌어야 한다.
권력을 비판하는 시민사회여야 한다
시민사회의 가장 중요한 역할 가운데 하나는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다. 그 권력이 보수정권이든 진보정권이든 마찬가지다. 과거의 민주화운동 세력이 집권했다고 해서 감시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도 아니며, 시민사회가 특정 정부와 정치적 목표를 공유한다고 해서 비판의 강도를 낮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자신이 지지했던 권력일수록 더 엄격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유시민 작가 역시 이재명 대통령을 오랫동안 지지해왔다는 전제에서 최근 국정운영을 비판했다. 그 비판의 내용과 방식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제기한 문제를 검증하기 전에 그의 발언을 정치적 세력다툼으로만 해석해서는 논쟁의 본질에 접근하기 어렵다. 김어준 씨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영향력이 크다면 그만큼 더 엄격한 검증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영향력이 크다는 이유만으로 시민들이 그의 방송을 선택하는 행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영향력은 비판받을 수 있지만 시민의 판단권은 존중되어야 한다. 원로 역시 예외가 아니다. 정평연대 역시 예외가 아니다.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야당도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시민도 예외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누구의 훈계도 최종 답이 되지 않는 체제다
정치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한쪽이 자신만이 옳다고 믿을 때다. 그러나 그 반대편 역시 ‘우리가 더 민주적이다’라는 확신 속에서 비판을 차단한다면 결과는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는 선악의 최종 판결문을 작성하는 제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주장을 공개된 공간에 올려놓고 시민들이 검증하도록 하는 제도다. 그래서 원로의 말도 논쟁할 수 있어야 한다. 유시민의 말도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김어준의 말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 대통령의 정책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시민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정평연대가 제시한 평화와 시민주권, 불평등 완화와 노동의 존엄이라는 여섯 가지 기준은 그 자체로 논쟁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실 정치의 구체적인 문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기준은 질문을 만들기 위한 것이지 질문을 끝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누구의 목소리를 침묵시킬 것인가가 아니라 모든 목소리를 어떤 기준으로 검증할 것인가이다. 원로의 권위도 검증받아야 하고, 뉴미디어의 영향력도 검증받아야 하며, 정부의 정책도 검증받아야 한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거친 말 자체가 아니다. 비판할 수 없는 권력이다. 질문할 수 없는 분위기다. 누구의 말이든 권위 때문에 검증하지 않는 태도다. 시민의 판단을 대신하려는 모든 시도는 그 출발점이 어디이든 경계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원로들의 훈시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기 있는 스피커의 말만으로 움직여서도 안 된다. 정치는 시민의 질문 속에서 끊임없이 검증되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가장 불편하면서도 가장 소중한 원칙이다. 그리고 그 원칙은 지금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도, 권력을 비판하는 사람에게도, 원로의 이름으로 사회에 말을 거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박철 시민기자 pakchol@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