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푸틴 경유 딜 … 유가 아닌 러-우 전쟁에 파괴적 [환경] 미국이 지난 9일 러시아산 경유 수출에 대한 제재를 한시적으로 해제했다. 내년 4월까지 6개월간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마친 직후 러시아가 총 480만t의 경유를 미국과 세계 시장에 공급하는 경유 거래 를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트루스소셜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한 바에 따르면, 러시아는 즉시 30만t 이상, 11월 중 추가 50만t, 그 직후 100만t, 그리고 러시아의 경유 정제시설 상태를 고려해 머지않은 시기에 추가로 300만t을 공급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도 이 합의를 확인하고 경유 수출 제한 조치 해제에 바로 돌입했다. 앞서 러시아는 주요 정유시설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공격으로 생산 차질이 빚어지자 지난 7월부터 국내 수급 안정을 위해 경유 수출 제한 조치를 도입했으며, 10월 말까지 연장한 상태였다.
이를 두고 트럼프 대통령은 글로벌 경유 가격이 빠르게 하락할 것이라면서 미국인들, 특히 우리의 위대한 농부, 목장주, 트럭 기사들을 위한 (경유) 가격 인하는 나의 최우선 과제 라고 주장했다. 장기 교착에 빠진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따른 미국 내 경유 가격 폭등이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본인에게 큰 정치적 압박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발언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 알래스카 앵커리지의 엘먼도프-리처드슨 합동기지에서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을 한 뒤 악수하고 있다. 2025.8.15. 로이터 연합뉴스
트럼프-푸틴 경유 거래 …올 연말까지 총 480만t
우크라·유럽 반발… 푸틴 생일 선물, 전쟁 장기화
트럼프의 경유 거래 결정은 우크라와 그 지원 세력인 유럽국들에 큰 충격을 줬다. 지난해 트럼프의 백악관 복귀 후 이어져온 미국과 서방 동맹국 간의 갈등을 더 부채질하는 모양새다. 특히 트럼프의 발표가 미국 마이애미에서 대통령 특사인 스티브 윗코프와 맏사위 재러드 쿠슈너를 비롯한 미국 관계자들과 우크라, 유럽 주요국, EU,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관계자들이 모여 종전 방안을 논의하는 와중에 사전 통보없이 전격적으로 이뤄져 충격을 더했다.
전쟁의 직접 당사자인 우크라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은 강하게 반발했다. 젤렌스키는 이날 X와 미 악시오스 인터뷰를 통해 푸틴에게 주는 생일 축하 선물 이라며 러시아는 더 많은 테러와 배신행위로 갚을 것이다...전쟁 장기화에 투자하는 것과 마찬가지 라고 비난했다.
우크라 전쟁을 지원해왔던 유럽국들도 가세했다. 유럽연합(EU)의 카야 칼라스 외교안보 고위대표는 10일 SNS를 통해 러시아에 전쟁 수행 자금을 더 벌어준다 며 지금은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완화할 때가 아니다. 유럽은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이라고 썼다. 영국과 독일은 대러 제재를 유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영국 총리실 대변인은 영국 역대 최대 수준의 제재로 러시아에 대한 압박을 유지해 푸틴의 침략 대가를 높일 것 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앤디 버넘 총리는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대러 제재 강화를 약속했다. 독일 정부 대변인도 성명에서 독일 정부는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고수하며 새로운 제재에 관해 유럽 파트너들과 협력하고 있다 고 밝혔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12일 X에 프랑스 해군이 인도양에서 러시아의 석유 제재 회피에 동원된 것으로 보이는 이른바 그림자 함대 유조선을 나포했다고 밝혔다. 또한 칼라스 대표는 1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교장관 회담에 앞서 우리는 이 전쟁을 끝내고, 정유시설 공격으로 인한 모든 여파를 없앨 수 있도록 러시아에 제재를 시행할 것을 요구한다 면서 트럼프 행정부를 겨냥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5년 12월 28일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마라라고 클럽에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맞이하고 있다. 2025.12.28. AP 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악마와 거래, 더러운 거래 성토
트럼프 6번 요청 거부, 새 대통령 맞이할 때
미국 내에서도 야당인 민주당을 중심으로 반발이 거세다. 민주당의 척 슈머(뉴욕) 연방 상원 원내대표는 10일 X를 통해 트럼프는 위태로워진 정치적 운명을 구하려 악마와 거래하고 있다 며 이 더러운 거래는 중동에서 이란이 미군을 살해하는 것을 돕고, 우리 동맹인 우크라를 불법적이고 잔혹하게 침공한 푸틴을 돕고 방조할 뿐이다 라고 덧붙였다. 딕 더빈(일리노이) 상원의원도 푸틴의 전쟁 기계를 부추기고, 우크라 분쟁을 장기화시킬 뿐 이라고 동조했다.
우크라와 서방 동맹인 유럽의 반발에 트럼프는 물러서지 않았다. 먼저 이번 결정을 하게 된 원인 제공자로 젤렌스키를 지목했다. 트럼프가 그동안 우크라에게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중단하라고 6차례 요청했지만, 거부됐다는 게 미국의 주장이다. 이 요청에 젤렌스키는 러시아가 우크라 발전소 공격을 중단하면 러 정유시설 공격을 중단하겠다고 맞선 걸로 전해졌다.
트럼프는 10일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젤렌스키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되 전 세계적 문제를 일으킬 러시아 정유소 공격만 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크라이나는 국토의 30%를 잃었고 100만 명 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전쟁은 결코 시작돼선 안 되는 전쟁이었고, 우크라는 새 대통령을 맞이할 때가 됐다 고 젤렌스키를 직격했다. 이번 경유 거래 에 우크라가 불만을 드러내자 미국이 우크라와 전쟁 관련 정보 공유를 중단했다는 일부 보도도 있었다. 그러나 트럼프는 중단한 적 없다 라고 부인했다.
13일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으로 손상된 다층 주거용 건물의 화재를 한 구조대원이 진화하고 있다. 2026. 10. 13 [AP=연합뉴스]
전문가 러시아 정제 능력 최대 60% 감소
EU, 러에 에너지 비용 2500억 달러 지불
앞서 우크라는 지난 몇 달 드론과 미사일을 동원해 러시아 정유시설을 집중해서 공격했다. 이에 경유 등 에너지 생산 차질이 빚어지자 러시아는 경유 수출을 제한했고, 이는 이란 전쟁으로 극도로 불안정해진 국제 경유 시장에 추가적인 부담으로 이어졌다. 런던의 외교정책센터(FPC) 슈테판 볼프 선임연구원은 12일 자 기고에서 최근 몇 달 러시아의 정제 능력이 최대 60%까지 감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며 트럼프는 높은 경유 가격의 원인을 이란과의 전쟁이 아닌 우크라 탓으로 돌리고 있다 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1일 트루스 소셜을 통해 러시아와 우크라 간 에너지 휴전 이 이뤄졌고, 즉각 효력 이 발생한다고 했다. 그리고 양측 모두 동의 했으니 위반하지 말라 고 주문했다. 그러나, 러-우 양측 모두 금시초문이란 반응을 보여 트럼프의 일방적 선언으로 풀이됐다. 이에 젤렌스키는 악시오스에 처음 듣는 내용 이라며 하지만 러시아가 에너지 휴전에 동의한다면 우크라이나도 동의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이같은 에너지 휴전 발표 이후에도 러시아가 우크라 제2 도시 하르키우의 열병합발전소를 공격했다고 젤렌스키는 주장했다.
유럽의 비판에도 정면 대응했다. 트럼프는 12일 트루스 소셜에 EU는 에너지 비용으로 러시아에 2500억 달러(약 334조 원)를 지불했다. 나는 미국인을 위해 올바른 결정을 했다. 언제나 미국이 우선이다 라면서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러시아도 맞장구를 쳤다. 알렉산드르 노박 부총리는 12일 한 방송에 출연해 EU 회원국에 공급한 석유, 천연가스 등 탄화수소 에너지가 2022년부터 지금까지 약 3207억 달러(약 430조 원)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올해에도 약 213억 달러(약 28조 원) 상당의 러시아산 에너지를 구매했다고 덧붙였다.
오만 무산담에서 바라본 호르무즈 해협 풍경. 많은 선박이 닻을 내린 채 떠 있다. 2026. 06. 03 [로이터=연합뉴스]
전문가 유가 영향 미미, 우크라 전엔 파괴적
이란산 경유 러시아 거쳐 우회 유입 가능성도
트럼프-푸틴 경유 거래 와 관련해 볼프 연구원은 단순히 연료 수급에 국한된 문제라면, 그 규모는 잘해야 미미한 수준이다 라고 지적했다. 트럼프가 언급한 경유 총 480만t은 미국 전체 1일 소비량의 1.5배(미 에너지정보청 기준)에 불과하고, 러시아가 그 물량을 실제로 모두 공급한다고 해도 글로벌 경유 가격에 미칠 영향은 역시 미미할 것으로 봤다. 볼프는 경유 가격 상승은 트럼프가 이란을 상대로 벌인 전쟁에서 시작됐고, 주된 원인 역시 거기에 있다 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11월 초에 있을 미국의 중요한 중간선거를 앞두고 경유 가격을 낮추려는 합의라고 해도 큰 효과를 거두기는 어려워 보인다 면서 그러나 우크라 전쟁에 미칠 영향은 비할 바 없이 크고 파괴적일 가능성이 크다 고 우려했다.
이런 가운데, 그리스 가 13일 경유 수급 경로에 관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이 매체는 우크라의 집중 공격으로 정제 능력의 상당 부분을 상실하고 역시 경유 수급에 곤란을 겪는 중인 러시아가 당장 경유 수출 물량 전체를 국내에서 확보하긴 쉽지 않다는 가정하에서 러시아가 이란의 내수용 경유를 받고, 러시아는 자국산 경유를 국제 시장에 판매해 일정한 마진을 얻고 그 판매 대금을 활용해 이란에 매입 대금을 갚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런 가능성이 현실화할 때엔 러시아와 국제 시장이란 우회로를 거쳐 이란산 경유가 전쟁 중이고 제재를 부과 중인 미국으로 흘러 들어가는 역설적 상황도 가능하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이유 에디터 yooillee22@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