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훔쳐진 아이였다 [사람들] 구상필(59)은 멸치볶음을 잘 먹었다. 지난 4일 식당에 마주 앉아 밥을 먹으며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는 멸치볶음에 유난히 손이 자주 갔다. 특별할 것 없는 반찬이었다. 한국 사람에게 멸치볶음은 흔한 밑반찬이다. 그러나 구상필에게 그것은 단순한 반찬이 아닌, 기억이었다. 1967년생인 그는 한 살 무렵 어느 단체를 통해 부산아동보호소를 거쳐 부산 남광보육원에 들어갔다. 남아 있는 기록은 많지 않다. 부모의 이름도, 부모가 왜 아이를 보육원에 맡겼는지도 확인되지 않는다. 남아 있는 것은 시설에 들어온 기록과 이후 입양됐다는 기록 정도다. 그리고 그 기록에는 당시 그의 몸 상태가 적혀 있다. 영양실조. 뼈가 드러날 정도로 마른 몸. 그런데 배는 볼록하게 부풀어 있었다. 그렇게 시설에서 지내던 아이는 1971년 벨기에로 떠났다. 한국에서는 홀트아동복지회를 거쳤고, 벨기에에서는 ‘떼르데좀(Terre des Hommes, 인간의 땅)’이라는 입양기관을 통해 새로운 가족을 만났다. 벨기에에서 그의 이름은 Marc Modave가 됐다.
벨기에 입양 당시 구상필 씨의 관련 서류
구상필과 마주 앉은 자리에 몽테뉴해외입양연대 배진시 대표가 함께 했다. 구상필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한다. 한국어로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배진시 대표가 그의 말을 프랑스어로 듣고 한국어로 옮겼다. 하지만 그의 통역은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옮기는 일이었다. 구상필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이야기할 때 배 대표는 단어 하나를 놓치지 않으려 했다. 때로는 구상필이 잠시 말을 멈추기도 했다. 오래된 기억을 꺼내는 사람에게는 말 사이의 침묵도 하나의 문장이기 때문이다.
배진시 대표가 해외입양인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프랑스 유학 시절이었다. 프랑스에서 학위 과정을 밟던 그는 현지에서 수많은 한국계 해외입양인을 만났다. 처음에는 그저 프랑스 사회에서 살아가는 한국계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한국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유럽의 낯선 나라로 보내졌다. 언어와 문화의 단절, 정서적 괴리감, 백인사회에 흔치 않은 동양인, 그 가운데서 벌어진 인종차별, 가정 내의 폭력과 성적 학대. 그들의 이야기는 배 대표에게 충격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해외입양인을 돕는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프랑스어권 현지와 한국을 연결하는 일이 그의 역할이 됐다. 입양인들이 한국에 와서 가족을 찾을 때 통역을 돕고, 국내 기관과 연락하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주는 일을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많은 해외입양인의 뿌리찾기 과정에 함께하게 됐다.
한국어를 모르는 입양인에게 오래된 주민등록 기록과 시설 기록, 입양 서류를 찾아가는 일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배 대표는 그 사이에 서 있었다. 프랑스어를 한국어로 옮기고, 한국의 기록을 다시 프랑스어로 설명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자신이 단순히 통역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해외입양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번역된 문장이 아니었다. 그들의 과거였다. 구상필의 경우에도 그랬다.
저의 벨기에 부모님은 불임 가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공무원이었고 아버지는 산업디자이너로 국가기관의 연구원으로 일했습니다. 외할머니는 교장선생님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된 중산층 이상의 가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입양됐을 당시 이미 한 살 위의 누나가 있었습니다. 누나는 1966년생으로 1969년 한국에서 벨기에로 입양됐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저는 그 가족에 합류했습니다. 그렇게 한 가족이 됐지만 한 가족이 된다는 것과 자신의 출생에 대한 질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은 가정에서 성장하며 안정된 삶을 살았다고 하더라도 제가 찾아 헤매는 정체성은 또 다른 문제였습니다. 저는 2022년부터 해마다 한국에 오고 있습니다. 부모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저에게 한국은 지도 위의 한 나라가 아니라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장소입니다.”
기억이란 때때로 아주 사소한 곳에서 되살아난다. 멸치볶음처럼. 그는 어린 시절 시설에서 먹었던 멸치볶음의 맛을 기억하고 있었다. 늘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아니었다. 굶주림 속에서 어쩌다 한 번 먹었던 음식. 그래서인지 멸치볶음의 맛은 그의 기억 속에 오래 남았다. 몇 가지 해산물도 좋아한다. 그것 역시 어쩌면 맛의 기억일 것이다. 하지만 그에게 가장 강렬한 기억은 맛보다 냄새였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그는 어린 시절 바다의 기억을 찾아 인천으로 갔다. 바다 냄새를 맡으면 어린 시절의 기억이 되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천의 바다는 자신이 기억하는 바다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했다. 이 냄새예요.” 어린 시절 자신이 맡았던 바다 냄새.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몸 어딘가에 남아 있던 냄새였다. 사람의 기억은 때때로 기록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서류에는 부모가 없고, 주소도 없다. 어머니가 누구였는지도 알 수 없다. 그가 언제, 어떤 이유로 시설에 들어갔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몸은 어떤 것을 기억하고 있을지 모른다. 바다 냄새를 기억하고, 음식의 맛을 기억하고, 어쩌면 어머니의 품을 기억한다. 구상필은 지금도 꿈을 꾼다. 한국의 엄마가 두 팔을 벌리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꿈이다. 그 꿈은 단순한 그리움과는 조금 다르다. 그는 어머니가 이미 세상을 떠났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다. 그래도 한국에 올 때마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해마다 한국에 온다.
현재의 구상필 씨와 벨기에 입양 당시의 어린 구상필
나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훔쳐진 아이였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하는 말이다. 그에게 이 문장은 자신의 인생을 규정하는 하나의 질문이다. 정말 자신은 버려진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가족으로부터 분리된 것일까. 현재 남아 있는 기록만으로는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이름에서부터 단서를 찾고 있다. ‘구’라는 성. 흔하지 않은 성씨라는 점에 주목하며 구씨 종친회를 통해 DNA 검사를 받는 방법까지 알아보고 있다. 혹시라도 자신의 혈연을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DNA 검사를 받는다고 해서 곧바로 부모를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교할 가족의 DNA가 필요하고, 오래된 기록을 추적해야 하며, 당시 시설과 행정기관의 자료도 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사람이다. 함께 기록을 찾아주고, 기관에 문의하고, 오래된 자료를 뒤지고, DNA 검사를 연결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가 한국에서 원하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누가 자신을 낳았는지, 왜 시설에 들어갔는지, 왜 벨기에까지 가게 됐는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는 어디에도 없었던 한 아이의 인생이 어떻게 결정됐는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그가 한국에 올 때마다 찾는 것은 부모만이 아니다. 자신과 같은 입양인의 삶을 돕는 일도 그의 또 다른 인생의 일부가 됐다. 그의 누나는 한국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한국에 대한 관심도 동생만큼 크지 않다. 그러나 누나의 자녀들, 구상필의 조카들은 한국을 알고 싶어 한다. 같은 가정으로 입양됐지만 한국을 기억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입양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방식으로 한국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한국을 찾아오고, 어떤 사람은 한국을 외면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출생국을 끊임없이 묻고, 어떤 사람은 그 질문 자체를 닫아버린다. 배진시 대표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입양인들을 만나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현지 사회에 완전히 적응하고 ‘백인화’ 혹은 현지화된 입양인 가운데는 한국에 대한 생각 자체를 일부러 차단하는 경우도 있다. 열어버리면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쏟아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다. 입양은 아이에게 새로운 가족을 주는 일이라고 흔히 설명된다. 그러나 입양된 아이에게는 그와 동시에 하나의 가족을 잃는 일이기도 하다. 그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사람마다 다르다.
프랑스 문화부 장관을 지낸 플뢰르 펠르랭의 사례도 상징적이다. 한국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입양된 그는 법적으로, 정서적으로, 문화적으로 프랑스 사회에서 성장했다. 그는 여러 언론 인터뷰에서 자신을 프랑스 사람이라고 밝혔다.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한국에 특별한 감정을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 그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태어난 곳이 사람의 정체성을 전부 결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구상필처럼 평생 출생국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다. 둘 중 누가 더 한국적인가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왜 어떤 아이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평생을 돌아다녀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그 질문은 개인의 감정에서 멈추지 않는다. 입양의 역사를 돌아보면 당시 유럽 사회가 어떤 아이를 선호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배진시 대표가 유럽 입양의 역사를 연구하며 전한 설명이다.
당시 유럽에서 입양을 원하는 가정들은 인종적 차이가 크게 드러나지 않고 미모도 괜찮은 러시아나 루마니아 출신 아동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유럽 국적 아동의 입양에서 밀려난 예비입양부모들에게 한국 아동이 새로운 선택지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 ‘한국 아이들은 영특하고, 조용하고, 온순하다. 예방접종 기록도 잘 갖춰져 있다. 굳이 한국까지 갈 필요도 없다. 공항까지 아이를 데려다준다.’ 현지 입양기관들이 이런 광고를 했습니다. 아이를 한 명의 인간이 아니라 입양하기 좋은 상품으로 설명하는 언어가 반복해서 등장한 것입니다.”
그 순간부터 아이의 가난은 입양의 조건이 되고, 부모가 없는 상태는 상품의 특징이 된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아이를 공급하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한국전쟁 이후 수많은 아동이 시설로 들어갔다. 가난한 아이, 부모를 잃은 아이, 미혼모의 아이, 가족과 헤어진 아이들이 시설에 모였다. 그리고 그중 일부는 해외로 떠났다. 그 과정에서 정말 모든 아이가 고아였는가. 정말 모든 부모가 아이를 버렸는가. 정말 아이들은 모두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는 상태였는가.
구상필 씨의 가족을 찾기위해 제작되어 부산 일대에 뿌려진 전단지와 전단물품
이 질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구상필의 기록에도 부모는 없다. 그러나 부모가 없다는 것과 부모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혀 다른 말이다. 기록이 없다는 것과 가족이 없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구상필이 자신을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훔쳐진 아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그 빈 공간에 있다. 그는 아직 자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지 못했다. 어쩌면 앞으로도 어머니를 찾지 못할 수 있다. 구씨 종친회를 찾아가도 혈연을 확인하지 못할 수 있다. DNA 검사를 받지 못할 수도 있으며, 받는다 해도 아무런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그가 꿈꾸는 어머니가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떠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에 온다.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어쩌면 그 믿음은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믿음 자체가 살아가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가 한국에서 먹은 멸치볶음 한 접시는 그래서 특별하다. 한 아이가 굶주림 속에서 먹었던 작은 음식의 맛. 수십 년 뒤 다시 한국에서 그 맛을 만난 남자. 그는 멸치볶음을 먹으며 어린 시절의 자신과 잠시 마주 앉는다. 그리고 부산 바다의 냄새를 맡으며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다시 묻는다. 입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었다.
벨기에에서 그는 Marc Modave가 됐다. 안정된 가정에서 자랐고, 사랑받았을 것이다. 그것은 부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좋은 양부모가 있었다는 사실과 친생부모를 찾고 싶은 욕구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과 자신의 과거를 알고 싶다는 것 역시 모순되지 않는다. 입양은 새로운 가족을 얻는 일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최초의 가족에 관한 기록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구상필은 지금도 그 기록을 찾고 있다. 어쩌면 그가 찾는 것은 단 한 사람의 어머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던지는 질문은 한 사람의 가족사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 시대 우리는 아이들을 어떻게 다뤘는가. 가난한 아이들은 왜 시설로 보내졌는가. 시설에 들어간 아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해외로 보내졌는가. 그 과정에서 국가는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을 확인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사라진 가족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수십 년 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그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가.
구상필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한국에 온다. 어머니가 살아 있든 죽었든, 기록이 남아 있든 사라졌든,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 하나를 품고. 그에게 한국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마지막 문장은 아직 쓰이지 않았다.
* 구상필 씨는 2026년 11월 17일까지 국내 체류 예정입니다. 구상필 씨의 가족을 알고 계신 분은 기자의 이메일로 연락바랍니다.이득신 시민기자 dsshine23@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