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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200년간 서고에 묻혀있다 햇빛 본 비발디의 사계

200년간 서고에 묻혀있다 햇빛 본 비발디의 사계
[사람들]
미사 도중 악보를 쓰러 나간 사제 승강기를 타든,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 기다리든, 우리는 어김없이 〈사계〉를 듣는다. 그 곡을 쓴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Lucio Vivaldi, 1678~1741)는 정작 자기 곡이 300년 후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승강기와 전화기를 점령하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이발사 출신 바이올린 연주자의 아들로 베네치아에서 태어났다. 1703년 사제가 되었으나 머리카락이 붉어 붉은 사제 로 불렸다. 그런데 이 사제는 사제 노릇에 별 뜻이 없었다. 미사를 올리다가 악상이 떠오르면 제단에서 슬쩍 물러나 악보부터 적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본인은 가슴이 답답한 지병 때문에 미사를 못 드린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그 가슴으로 어찌나 열심히 작곡하고 여행을 다녔는지, 병이 있다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드물었다. 1737년에는 교황 관할 도시 페라라에 들어가는 것조차 거절당했다. 미사는 안 드리면서 가극공연은 여는 사제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비발디로 추정되는 초상화, 1723년경(위키피디아) 버려진 아이들이 만든 악단 그의 일터는 피에타 자선원 이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운영하던 이 시설은 버려진 아기와 고아를 거두는 곳이었다. 여자아이들에게는 악기를 가르쳤다. 비발디는 1703년부터 이곳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며 곡을 써 주었다. 덕분에 이 아이들은 유럽에서 이름난 악단이 되었다. 철창 너머로 연주하는 소녀들의 솜씨에 손님들이 몰렸다. 프랑스의 법관 샤를 드 브로스(Charles de Brosses, 1709~1777)도 그 연주에 감탄하는 글을 남겼다. 비발디는 이 아이들의 손가락과 숨결에 맞춰 협주곡을 지었으니, 500편이 넘는 곡의 상당수는 사실 고아들을 위한 맞춤옷이었던 셈이다. 여기에 우스운 대목이 하나 있다. 피에타 자선원 이사들은 해마다 비발디를 계속 둘지 투표로 정했다. 한때는 표결에서 밀려나 쫓겨났다가, 몇 해 뒤 만장일치로 다시 모셔 갔다.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없으면 안 된다니, 인사가 변덕스럽기로는 300년 전 베네치아나 오늘의 어느 기관이나 다를 바 없다. 비발디가 세례를 받았던 교회, 베니스의 세스티에레 디 카스텔로, 브라고라의 산 조반니(위키피디아) 〈사계〉가 세상에 남긴 것 1725년 암스테르담에서 〈화성과 창의의 시도〉라는 이름의 협주곡집이 나왔고, 맨 앞의 4곡이 훗날 〈사계〉로 불리게 된다. 봄의 새소리, 여름의 폭풍, 가을의 사냥, 겨울의 떨리는 이빨을 악기로 흉내 냈다. 곡마다 시를 곁들여 어디서 무엇이 나오는지 설명까지 해 놓았다. 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표제음악의 앞길을 닦은 셈이다. 형식에서도 공이 크다. 빠르게, 느리게, 다시 빠르게로 이어지는 세 악장의 협주곡 틀을 단단히 다져 놓았다. 독일의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그의 곡을 건반악기용으로 여러 편 고쳐 쓰며 배웠다. 대가가 남의 곡을 베껴 가며 공부했으니 그보다 확실한 추천장은 없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추정 초상화(위키피디아) 인기가 식자 무덤도 허름해졌다 그렇게 이름을 떨쳤어도 말년은 쓸쓸했다. 유행이 바뀌자 베네치아는 새 음악에 마음을 주었다. 비발디는 새 후원자를 찾아 1740년 빈으로 떠났다. 믿던 이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6세(Charles VI, 1685~1740)였는데, 그가 그해 세상을 떠나 버렸다. 비발디는 이듬해 빈에서 가난하게 숨을 거두었고 장례도 소박하게 치러졌다. 이 도시는 훗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도 공동묘지에 묻은 곳이다. 음악의 도시라는 빈이 대가를 대접하는 솜씨는 영 시원찮았다. 그러고는 200년 가까이 그의 곡은 잊혔다. 1926년 이탈리아 북부의 한 수도원 학교 서고에서 오래된 악보 꾸러미가 나왔고, 토리노의 학자 알베르토 젠틸리(Alberto Gentili, 1873~1954)가 그 가치를 알아보았다. 곰팡이 핀 서고에서 대가가 걸어 나온 셈이다. 비발디는 이렇게 무덤 밖으로 불려 나왔다. 피에르 레오네 게치의 비발디 풍자화, 로마 (1723)(위키피디아) 붉은 사제가 오늘 한국에 던지는 물음 비발디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 가지를 묻는다. 첫째, 공공의 돌봄이 어떤 열매를 맺는지 보여 준다. 버려진 아이들이 나라가 세운 시설에서 음악을 배워 유럽을 놀라게 했다. 우리는 문화예산이 정권의 입맛에 따라 오르내리고, 예술인은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는 나라다. 재능은 부유한 집에서만 나지 않는다.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들의 손끝에서 나오는 재능을 알아보고 길러 주는 일을 낭비 로 부르는 순간, 사회는 스스로 미래를 깎아 먹는다. 둘째, 기록의 힘이다. 한 사람의 악보가 200년을 서고에서 버틴 끝에 되살아났다. 반면 우리는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이후에도 기록을 감추거나 지우려는 시도를 숱하게 보았다. 악보는 서고에서 살아남았는데 공문서가 파쇄기에서 사라지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는가. 기록은 오늘의 권력이 아니라 훗날의 후손을 위한 것이다. 시민이 모아 펴낸 『반헌법행위자열전』이 그러하듯, 기록은 버텨 주기만 하면 언젠가 반드시 불려 나온다. 셋째, 인사와 평가의 변덕이다. 해마다 투표로 쫓고 부르던 이사들처럼, 재능을 소모품 취급하는 조직은 어디에나 있다. 한 사람의 쓰임새를 짧은 눈금으로 재면 〈사계〉를 쓴 이도 한 번은 해고된다. 남은 숙제는 이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느 서고에 어떤 악보를 쌓아 두고 있는가. 그리고 후손들은 그것을 읽고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붉은 머리 사제가 200년 만에 돌아왔듯, 묻힌 진실도 반드시 돌아온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오스트리아 빈의 루즈벨트 광장에 있는 안토니오 비발디 기념비(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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