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시경 나신 150돌,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사람들] 주시경 스승님께 드리는 꽃바구니
지난 7월 27일, 한흰샘 주시경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지 112돌을 맞아 한글학회를 비롯한 여러 국어운동 단체에서 스승님의 묘소를 찾아 꽃을 바쳤다는 기별을 들었습니다. 나라를 잃었던 가장 어두운 시절,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치신 스승님을 기리는 뜻깊은 자리였습니다.
해마다 이날 우리는 꽃을 바칩니다. 그러나 문득 스스로에게 이런 물음을 던져 봅니다. 스승님께서 목숨 바쳐 물려주신 이 소중한 말과 글 앞에,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
주시경 스승님 찍그림(위키백과)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한흰샘 주시경 선생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어린이를 위한 위인전도 있고, 학술서와 평전도 여러 권 나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스승님의 삶과 뜻을 온 국민이 함께 알리고 길이 기릴 제대로 된 기림집(기념관) 하나, 이를 꾸준히 이끌어 갈 국가 차원의 기념사업회 하나 없다는 사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하셨다면, 한흰샘 주시경은 나라를 빼앗긴 시대에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연구하여 오늘날 국어학의 기틀을 세운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쓰는 한글 이라는 이름도 그분의 피땀 어린 노력 속에서 널리 자리 잡았습니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 우리말 연구의 뿌리를 내렸고, 말이 오르면 나라가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가 내린다 는 믿음으로 한뉘를 바치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분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요.
울산광역시 중구에 있는 외솔기념관
외솔 최현배 선생의 고향이라는 인연으로 울산광역시에 외솔기념관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습니다. 한뫼 이윤재 선생과 눈뫼 허웅 선생을 기리는 김해한글박물관 역시 김해시가 중심이 되어 만들었습니다. 이처럼 지역이 고향 출신의 스승을 기리는 일은 참으로 뜻깊고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흰샘 주시경 스승님은 황해도에서 태어나 열세 살에 서울로 오셨습니다. 분단으로 고향을 잃은 지금, 어느 지방자치단체도 선뜻 주체로 나설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렇다면 더욱 국가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말은 어느 한 지역의 문화가 아닙니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얼이자 삶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말과 글을 지켜 낸 선각자들을 기리는 일 역시 특정 지자체의 몫으로 남겨둘 것이 아니라, 국가가 책임져야 할 핵심 문화정책이자 교육정책이어야 합니다.
더욱이 이 문제는 한흰샘 한 분만의 일이 아닙니다. 주시경, 최현배, 이윤재, 허웅을 비롯하여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 키운 수많은 선각자의 삶과 정신을 국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보존하고 연구하며 교육하는 기반은 여전히 매우 허술합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꿀 때입니다.
기념관은 그저 오래된 유물을 전시하는 건물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우리말의 역사를 배우고, 한글이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 체험하며, 말과 글을 지켜 낸 사람들의 삶을 만나는 살아 있는 배움터입니다. 지은슬기(인공지능, AI) 시대를 살아가는 미래 세대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새로운 기술만이 아니라, 우리말의 뿌리와 정신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정체성입니다.
2026년 올해는 한흰샘 주시경 스승님께서 나신 지 150돌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이 역사적 시점을 계기로 국가 차원의 한흰샘 주시경 기념사업회 를 꾸리고, 국민이 함께하는 기념사업을 펼치며, 국립 우리말글 누리(기념관) 를 세우는 일도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합니다. 아울러 초·중·고 교육과정에서도 우리말과 글을 지켜 낸 분들의 삶과 노력을 더 깊이 배우도록 내용을 깁고 더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도 더 이상 이 문제를 민간의 몫으로 미룰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모아 정책으로 답해야 합니다. 우리말과 글을 아끼는 시민들과 여러 학술·시민단체도 함께 뜻을 모아 청원과 제안을 이어 가야 할 때입니다.
나라를 잃었던 가장 어두운 시절에도 끝내 우리말을 잃지 않도록 지켜 낸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습니다. 그분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나라는 자신의 뿌리를 잊은 나라와 다르지 않습니다.
꽃은 하루를 향기롭게 합니다. 그러나 기억은 백 년을 넘게 이어 갑니다.
한흰샘 주시경 스승님 나신 150돌을 맞이하는 지금,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한 차례의 꽃바치기가 아니라 우리말과 글을 지켜 낸 분들을 나라의 이름으로 오래도록 기억하고 배우게 하는 단단한 밑바탕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스승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참된 고마움이자, 미래 세대에게 물려줄 가장 값진 유산일 것입니다.이창수 시민기자 maljig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