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의 외교 개가 1000년이 흐른 지금 우리는… [뉴스] 한국사 최고의 외교관을 꼽으라면 단연 천 년 전 사람 서희다. 993년 거란 소손녕의 대군이 쳐들어오자 고려 조정에서는 땅을 떼어 주고 물러가게 하자는 주장이 나왔다. 서희는 거란이 고려를 삼키려는 것이 아니라 송과의 관계를 끊게 하여 배후를 안정시키려 한다는 속셈을 읽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국이라는 논리로 상대의 주장을 되받아치고, 거란과 교류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했다. 남의 요구에 굴복하는 대신 남의 필요를 이용해 고려의 국경을 넓힌 외교였다.
신흥 강대국 체면 세워주며 실익 챙긴 서희 외교
서희의 담판을 한 사람의 배짱과 말솜씨로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외교에서 형식과 실질을 구분할 줄 아는 국가가 있었기에 그런 외교관도 나올 수 있었다. 서희는 고려가 어떤 나라인지, 무엇을 지키고 무엇은 잠시 양보해도 되는지를 알고 있었다. 송과의 외교관계는 조절할 수 있었지만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정체성과 북방 영토는 양보할 수 없었다. 철학과 전략이 있었으니 고려는 거란의 체면을 세워 주는 대신 국경과 안전이라는 실물을 가져올 수 있었다.
고려는 송 하나만을 문명의 중심으로 떠받들지 않았다. 송에서는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이고, 거란과는 싸우면서도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여진에는 회유와 정벌을 번갈아 사용했다. 거란의 연호를 받아들인 뒤에도 송과의 교역과 문화교류를 이어갔다. 어느 나라가 선이고 어느 나라가 악인지부터 묻지 않았다. 국경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전쟁을 피할 수 있는가, 나라의 선택권을 넓힐 수 있는가를 묻는 것이 고려의 외교였다. 고려 전기의 자주외교는 큰소리로 외친 구호가 아니라 여러 강국 사이에서 실제로 행사한 선택권이었다.
그보다 더 웅장한 외교를 고구려에서 찾을 수 있다. 광개토태왕은 ‘영락’이라는 독자 연호를 쓰면서 고구려 자체의 시간과 질서를 선포했다. 요동을 장악하고 백제를 굴복시켰으며, 신라의 요청을 받아 군사 5만을 보내 왜를 몰아냈다. 장수왕은 그 힘을 외교체계로 완성했다.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북위와 송, 남제, 북방의 유연을 동시에 상대했다. 북위가 커지면 그 적대세력과 손잡아 견제하고, 필요해지면 다시 북위와 사절을 교환했다. 고구려는 중국 왕조 사이에 끼어 눈치를 보는 나라가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을 움직이는 축이었다.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에 디지털로 재현된 광개토태왕릉비. 연합뉴스 자료사진
외교의 수단 아닌 목적이 돼버린 한미동맹
대한민국 수립 이후 근 80년의 외교사를 돌아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부마다 세계화외교, 실용외교, 가치외교, 글로벌 중추국가 같은 간판을 내걸었지만 결론은 언제나 한미동맹 강화였다. 동맹은 외교의 수단이 아니라 외교의 목적이 됐다. 한미동맹은 절대적 가치를 갖는 ‘숭미동맹’으로 변모했다. 한반도의 미래를 먼저 설계하고 미국을 설득하기보다 미국의 세계전략에 자진해 흡수되어 국익과 자존을 훼손했다. 대외정책을 스스로 만들기보다 강대국의 정책을 번역하고 집행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외교는 유사 외교행위에 불과한 것이었다.
자주란 압력을 견디면서 우리의 판단을 정책으로 관철하는 능력이다. 자주성이 강하다고 믿어지던 노무현 정부조차 이 구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균형적 실용외교와 동북아 균형자론을 말했지만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고, 용산기지 이전과 주한미군 재배치에 막대한 재정을 부담했으며, 주한미군의 전략적 유연성도 단서 조항을 붙여 수용하는 등 미국이 요구한 큰 현안들은 모조리 관철됐다. 자주국방을 말하면서도 그 앞에 ‘협력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독립국으로서의 주체적인 국방과 외교를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미국의 주도권을 인정한 ‘새장 속의 자유’일 뿐이었다.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 역시 다를 것이 없었다.
이재명 정부는 ‘국익 중심 실용외교’를 표방하고 있다. 미·일 일변도 외교를 벗어나 중국, 브라질, 인도와의 관계를 복원하고 내실화하려는 움직임에서는 일말의 자주적 싹이 보였다. 그러나 국익을 판별할 기준과 목표가 분명하지 않은 것 같다. 한미동맹과 대중국 경제 관계가 충돌할 때, 미국 중심 공급망과 기술주권이 상충될 때, 한미연합 훈련와 한반도 평화가 대립될 때 무엇을 앞세울지 명확한 관념도 없어 보인다. 한중관계의 완전복원과 한러관계의 정상화를 말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기는커녕 미국의 얼굴만 살피고 있는 실정 아닌가.
이재명 정부 ‘국익 중심 실용외교’도 꺾이고 있는 건 아닌가
말과 행동의 불일치는 최근 들어 뚜렷해졌다. 6월 10일 한·EU 정상회담 공동성명은 불과 이틀 전 취임 1주년 기자회견과 달리 러시아와 중국과 조선을 동시에 거세게 자극했다. 7월 초 NATO 정상회의에서는 한국 기업을 NATO 방산 공급망에 편입시키겠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중국과 조선의 눈에는 한국이 그들의 적임을 명확하게 자인한 셈이다. 8월 5일 통일부 업무보고에서는 조선 호칭과 지난해 당신 스스로 제안했던 9·19 선제조치에 제동을 걸었다. 그러니 올해 8·15 경축사는 텅 빈 말잔치에 불과했다. 자주의 싹은 지금 시들고 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이 튀르키예 앙카라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나토 방위산업 포럼에서 참석자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6.7.7 연합뉴스
한국은 세계적인 제조업과 무역망, 군사력, 기술력, 그리고 문화자산을 보유한 나라다. 그런데 외교적 사고는 한미동맹의 굴레를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까지 한미동맹이 우리의 절대적 가치로 작용해야 하는가. 자주란 우리의 생존과 번영에 필요한 목표를 우리가 정하고, 동맹국의 요구도 그 기준에 따라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성장했는데 외교만 왜소하게 남아있는 상태라면 우리가 쌓은 국력은 미국의 세계전략을 위해 쓰이는 자산이 된다. 그러니 미국이 우리를 ‘봉’으로 보고 수탈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고구려와 고려 전기의 외교가 오늘에 주는 교훈은 분명하다. 그들은 어느 한 나라에 운명을 맡기지 않고 국경과 안전과 세력균형이라는 목표 아래 전쟁과 교섭, 견제와 교류를 배치했다. 지금 한국에 부족한 것이 국방과 외교, 통상과 남북관계를 하나로 묶는 큰 그림이다. 무엇을 지킬 것이고 어떤 요구는 거부할 것인지를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간판을 갈아 다는 임기응변은 끝내고,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변화를 내다보는 장기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국력에 걸맞은 외교는 우리가 원하는 질서를 구상하는 데서 시작된다.
통일 방법론의 재모색, 미·중·러 등과의 관계 재정립
조선과의 관계에서도 근본적인 사고 전환이 필요하다. 대화를 말하면서 상대의 이름조차 부정하고, 평화를 말하면서 군사행동을 지속하는 모순은 이제 끝내야 한다. 남과 북이 별개의 국가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또 조선이 남북 관계를 ‘통일로 가는 과정에서의 특수관계’로 인정하기를 끝내 거부한다면,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상호 승인과 수교 방안을 절대 불가로 금기시할 이유가 없다. 두 국가체제는 영구분단이 아니다. 전쟁을 끝내고 정상적인 국가관계를 만든 뒤 긴 시간을 두고 연합의 길을 찾아야 한다. 통일 방법론의 재모색이다.
자주는 미국을 버리는 것이 아니다. 미국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국가 중의 하나임에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주종관계가 아니며 외교의 최종 목표일 수도 없다. 한국은 독립된 주권국가로서 당당히 한미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되 동시에 중국, 러시아, 조선과도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기준으로 관계를 설계해야 한다. 서희는 거란의 요구서를 받아 적는 것을 거부하고 그 요구 속에 감춰진 상대의 필요를 읽어 고려의 길을 만들어 냈다. 외교는 강대국의 말을 잘 듣는 기술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는 일이다.이경렬 전 대사 kylee85@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