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웹, 혁명 대신 회의록과 통계를 택하다 [사회혁신] 열여섯 살 사무원, 사회주의자가 되다
영국 런던의 가난한 회계사 아들로 태어난 시드니 웹(Sidney Webb, 1859~1947)은 열여섯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그런데 이 청년, 낮에는 서류를 정리하고 밤에는 야간강의를 들으러 다녔다. 그렇게 독학으로 법률시험을 통과해 공무원이 되었으니, 흙수저 출신 자수성가 이야기로는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문제는 이 남자가 단순히 출세만 하고 끝날 인물이 아니었다는 데 있다. 사무실에서 서류를 넘기는 손으로 사회를 뜯어고칠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1893년 시드니 웹(위키피디아)
페이비언 협회, 혁명 대신 팸플릿
1885년, 웹은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의 권유로 갓 생긴 작은 사회주의 단체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한다.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로마 장군 파비우스처럼 정면승부 대신 끈질기게 버티며 서서히 이기는 전략, 그것이 이들의 철학이었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식 계급투쟁과 혁명을 믿지 않고, 오히려 영국 사회주의의 원조는 로버트 오언(Robert Owen, 1771~1858)이라 주장하며 통계와 팩트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선 것이다.
웹의 무기는 총도 깃발도 아니고 숫자였다. 1887년 팸플릿 『사회주의자를 위한 사실들』을 써서 산업사회의 통계를 조목조목 늘어놓았다. 혁명가라기보다는 꼼꼼한 회계감사관에 가까운 사회주의자였던 셈이다. 어찌 보면 화염병 대신 엑셀 스프레드시트를 들고 광장에 나온 활동가라고나 할까.
윌리엄 헨리 브룩이 그린 로버트 오언 초상화, 1834년(위키피디아)
베아트리스와 런던정경대학
1892년 웹은 사회조사 연구자 베아트리스 포터(Beatrice Potter, 이후 베아트리스 웹, 1858~1943)와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합은 낭만보다 업무 파트너십에 가까웠다는 후문이지만, 그 시너지는 어마어마했다. 부부는 함께 노동조합사와 지방자치 제도사를 쓰고, 1895년에는 런던정경대학(런던 스쿨 오브 이코노믹스)을 세운다. 지금은 세계적 명문으로 꼽히는 이 학교의 출발이 부부의 서재에서 시작된 것이니, 부부싸움을 논문으로 승화시킨 보기 드문 사례라 하겠다.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위키피디아)
노동당 정치인, 결국 귀족이 되다
웹은 이론에만 머물지 않았다. 1922년 하원의원이 되고, 1924년에는 램지 맥도널드(Ramsay MacDonald, 1866~1937) 내각에서 통상장관을 지냈으며, 1929년에는 식민장관 겸 자치령장관을 맡았다. 그리고 같은 해 패스필드 남작이라는 귀족작위를 받는다. 혁명을 거부하고 점진주의를 택한 사회주의자가 결국 귀족원 의석을 얻은 것을 두고 당대 좌파들 사이에서는 조롱 섞인 뒷말이 무성했다. 역시 점진주의는 결국 자기 자신부터 귀족이 되는 것이었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1923년의 램지 맥도널드(위키피디아)
노부부의 결정적 오판, 소련이라는 함정
여기서 웹 부부의 이야기는 씁쓸한 반전을 맞는다. 1930년대, 노년의 부부는 소련을 방문한 뒤 『소비에트 공산주의: 새로운 문명인가?』라는 책을 펴낸다. 스탈린(Iosif Stalin, 1878~1953)이 대숙청으로 수백만 명을 처형하고 있던 바로 그 시기에, 두 사람은 소련체제를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범이라 극찬했다. 평생 통계와 사실을 무기로 삼아온 사람들이 정작 눈앞의 참혹한 사실 앞에서는 눈을 감은 셈이다. 팩트 체커의 대명사였던 부부가 생애 마지막에 가장 큰 팩트 체크를 실패한 것이니,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스탈린 1943년(위키피디아)
한국에서 시드니 웹을 읽는다면
웹의 삶은 한국 진보정치에도 여러 갈래의 질문을 던진다.
첫째, 그의 페이비언주의는 구호와 선언 대신 정책설계와 제도구축을 택했다. 광장의 함성만큼이나 지루한 회의록과 통계작업이 사회를 바꾼다는 사실을, 웹은 몸소 증명했다. 촛불 이후 한국정치가 자주 놓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정권을 바꾸는 일과 제도를 바꾸는 일은 다른 것이다.
둘째, 웹 부부의 소련 오판은 뼈아픈 반면교사다. 오래 싸워온 진영일수록, 권력을 쥔 동료나 우호세력의 잘못에는 눈 감기 쉽다. 한국 진보진영 역시 내 편의 부패나 독선 앞에서 침묵한 적이 없는지 돌아볼 대목이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그 이후 벌어진 일들을 두고도, 진영을 떠나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태도가 다시금 중요해졌다.
셋째, 웹은 이론과 행정을 오가며 평생 제도를 다듬었다. 지금 한국에 필요한 것도 어쩌면 뜨거운 구호보다 차가운 실무, 즉 법과 예산과 행정을 끈질기게 고쳐나가는 페이비언식 인내심일지 모른다. 혁명은 짧지만 제도는 오래 간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시드니 웹의 회의록도, 그리고 그의 침묵도, 결국 역사는 다 기록해두었다.
1895년 함께 일하는 베아트리스와 시드니 웹(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