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의 아버지인가, 학살의 최고책임자인가? [사회혁신] 두 개의 명찰, 하나의 권력욕
이승만(1875~1965)에게는 두 개의 명찰이 붙어 있다. 하나는 ‘건국의 아버지’, 다른 하나는 ‘민간인 학살의 최고책임자’다. 그러나 두 명찰을 나란히 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가 무엇을 이루었는가 못지 않게, 무엇을 짓밟았으며 누구를 희생시켜 권력을 지켰는지 물어야 한다.
영화 (2024)이 이승만을 건국의 영웅으로 치켜세웠지만, 역사는 홍보영화의 대본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독립운동 경력과 박사학위가 대통령의 모든 행위를 면죄해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독립을 외쳤던 사람이 해방된 나라에서 국민의 생명과 민주주의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따져야 한다.
1905년 이승만(위키피디아)
감옥에서 박사까지, 독립운동에서 권력투쟁까지
이승만은 1899년 투옥되어 1904년 풀려났으며, 옥중에서 을 썼다.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시 총장은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이었다. 그의 학력과 외교활동은 분명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공로가 정치적 정당성을 무한정 보장하지는 않는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된 이승만은 상하이에 오래 머물지 않고 주로 미국에서 활동했다. 임시정부와의 갈등이 깊어지자 1925년 임시의정원은 그를 탄핵했다. 독립운동 진영의 신뢰를 잃은 사실은 그를 무조건적인 건국영웅으로 떠받들기 전에 살펴야 할 대목이다.
1919년의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통령 김규식(위키피디아)
친일파를 살리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배신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농지개혁, 초등 의무교육의 확대는 평가할 만한 성과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출발부터 친일청산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외면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는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들을 처벌하려 했지만, 이승만은 조사활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특위의 권한을 약화시키는 데 앞장섰다. 1949년 6월 6일 경찰은 반민특위를 습격해 반민특위 소속의 특별경찰대를 무력화했다. 이어서 친일혐의로 체포된 인사들도 처벌을 피했다.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를 탄압했던 경찰은 새 나라에서도 자리를 지켰다. 그 가운데 노덕술(1899~1968) 같은 친일경찰이 있었다. 과거의 가해자를 청산하지 않은 결과, 국가폭력을 행사한 인력이 반공이라는 새로운 명분 아래 살아남았다.
같은 달 26일에는 김구(1876~1949)가 안두희의 총탄에 쓰러졌다. 김구 암살의 배후와 이승만 정권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은 남아 있지만, 사건의 진상을 충분히 규명하지 못한 채 권력의 안정이 우선시된 역사는 무겁다. 독립운동의 이름으로 세운 나라가 독립운동의 정신을 배반한 셈이다.
서거 당시의 김구(1949.6.26.)-백범기념관 게시 사진
국민을 적으로 만든 국가
이승만 정권의 가장 어두운 유산은 국가폭력이다.
제주 4·3 사건에서는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어진 무력진압과 국가폭력 속에 약 2만 5천~3만 명이 생명을 잃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재소자들이 적법한 재판도 없이 끌려가 처형됐다. 희생규모는 적게는 수만 명에서 많게는 2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1951년 거창에서는 민간인 719명이 군에 의해 살해됐다.
이 모든 사건에 이승만이 직접 서명한 단일한 학살명령서가 존재하는지는 별도의 사료문제다. 그러나 대통령이 군과 경찰을 통솔하는 국가의 최고 권력자였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정부의 조직과 명령체계 아래 벌어진 대규모 민간인학살을 이승만의 책임 바깥에 둘 수는 없다.
반공은 이승만정권의 만능 방패였다. 의심받는 국민은 적으로 취급됐고, 적으로 분류된 사람에게는 재판과 생명권마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국가가 보호해야 할 국민을 국가가 학살했다는 사실, 이것이 이승만을 평가할 때 결코 비켜 갈 수 없는 핵심이다.
1950년 7월 대전 인근에서 한국군에 의한 처형을 앞두고 사람들이 땅에 엎드려 있다(위키피디아)
국민에게는 남으라 하고, 자신은 몰래 도망쳤다
1950년 6월 27일, 서울이 북한군의 위협에 놓인 상황에서 이승만은 서울을 지키겠다는 녹음방송을 내보내면서 이미 대전으로 도망갔다. 이튿날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면서 피란길에 오른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폭파의 구체적인 경위와 희생자 수에는 자료상 차이가 있지만, 이승만이 시민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은 채 피란과 생존의 길을 막았다는 비판은 무겁다.
국민에게는 서울을 지키라고 해 놓고 이승만은 몰래 도망갔다. 전쟁 중 국민이 감당한 희생과 권력자가 취한 행동 사이의 간극은 이승만의 민낯을 드러낸다.
이승만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권력 강화에 몰두했다. 1954년 대통령의 중임제한을 없애려는 개헌안이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 135표에 그쳐 부결되자, 이승만은 사사오입이라는 기괴한 논리로 가결을 선언했다. 헌법을 자신의 필요에 맞춰 비틀었다.
1958년 12월 24일에는 무술경위들이 국회에서 야당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처리했다. 1959년에는 진보당을 이끌던 조봉암(1898~1959) 전 대선후보가 간첩혐의로 사형 당했다. 대법원은 2011년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정적을 제거하는 데 국가의 수사와 사법권력이 동원됐다는 사실은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얼마나 자주 정치적 무기로 쓰였는지 보여 준다.
KBS 인물현대사 – 진보 사형당하다, 조봉암 / KBS 20040213 방송
부정선거가 무너뜨린 독재
1960년 3월 15일 대통령·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이어 가기 위해 조직적인 부정선거가 자행됐다. 이기붕(1896~1960)을 부통령으로 만들려는 사전투표와 공개투표 등 부정행위가 벌어졌다. 마산에서 시작된 항의는 전국으로 번졌고, 경찰발포로 시민과 학생들이 목숨을 잃었다. 4·19혁명 과정의 사망자 수는 집계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이승만이 국민의 저항을 총탄으로 억누르려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마침내 이승만은 4월 26일 하야를 발표했다. 5월 29일 하와이로 도망갔고, 1965년 7월 19일 그곳에서 죽었다. 이기붕 일가는 4월 28일 목숨을 끊었다.
독립운동가로 출발한 이승만은 대통령이 된 뒤 헌법을 훼손하고, 부정선거로 권력을 연장하려 했으며, 국민의 저항 앞에서 물러났다. 그의 몰락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짓밟은 권력이 시민의 저항으로 심판받은 사건이었다.
[KBS 역사저널 그날] 그날 비화, 1960년 3.15 부정선거ㅣ KBS 200414 방송
건국의 공로가 학살의 책임을 지우지는 못한다
이승만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공로를 내세워 책임을 덮는 일이다. 농지개혁을 했다고 민간인 학살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독립운동을 했다고 친일청산을 가로막은 책임이 없어지지도 않는다. 국가를 세웠다는 사실이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강요할 권리를 주지는 않는다.
프랑스에서는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1890~1970)이 이끈 해방 이후의 체제 아래 나치 협력자들을 처벌하고 숙청하는 작업이 진행됐다. 그 과정의 한계와 논쟁도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반민특위가 무너지고 친일청산이 좌절되면서 과거의 가해자들이 새 국가의 권력기관에 남았다. 그 대가는 오랫동안 이어졌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국회에 투입한 사건은 헌법과 민주주의를 권력자의 도구로 삼을 때 어떤 위기가 닥치는지 다시 보여 줬다. 국회에 무력을 들이민 전례가 1958년에도 있었다는 점은 결코 가볍지 않다. 시민의 저항과 헌법재판소의 2025년 4월 4일 파면결정은 권력이 헌법 위에 설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승만 정권의 국가폭력 역시 과거형으로 끝나지 않았다.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 국가의 사과와 배상, 관련자료의 공개가 계속되어야 한다. 노무현(1946~2009) 대통령이 2003년 제주 4·3에 대해 국가 차원의 사과를 했지만, 사과 한마디로 희생자와 유족의 고통이 모두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전에 물어야 한다. 그는 누구의 자유를 지켰고, 누구의 목숨을 희생시켰는가. 독립운동의 공로는 기억하되, 권력욕과 국가폭력의 책임은 더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건국의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은 한 인물을 영웅으로 만드는 데 있지 않다. 그가 짓밟은 죄없는 사람들의 이름과 삶을 역사 속에 되돌려 놓는 데 있다.
역사의 법정에는 공로를 이유로 한 면죄부도, 권력자를 위한 공소시효도 없다.
1939년의 이승만(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