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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농 유해, 왜 지금도 다른 나라에 묻혀 있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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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용 문화비평가·언론인 정부는 1949년 4월 27일 대통령령 제82호로 건국공로훈장령을 제정 공포하고 그해 광복절에 이승만 대통령과 이시영 부통령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독립유공자 1만 8776명에게 대한민국장(33명), 대통령장(90명), 독립장(823명), 애국장(4527명), 애족장(6461명), 건국포장(1571명), 대통령표창(5271명)을 수여했다. 지난 77년 동안 서훈 대상자 공적 평가를 비롯해 훈격의 적격성, 심사기준과 절차, 수훈자 및 유족에 대한 예우 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뒤늦게 사료와 증언 등이 나와 훈장이 박탈되거나 훈격이 바뀌는가 하면, 정권의 코드에 따라 심사 잣대가 달라진다는 지적도 잇따랐고, 후손 등 관련자들이 법적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대표적 사례가 30여 년째 논란을 빚고 있는 동농 김가진이다. 국가보훈부가 지난 6월 23일 서울 용산구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개최한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와 포상 심사기준 공청회’에서도 거론됐다. 심사 당시 자료와 연구가 부족했던 1970년대 이전 대통령장(2등), 독립장(3급) 수훈자 12명의 훈격 조정안에 관해 각계 의견을 수렴하는 자리였지만 토론자로 나선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김가진 서훈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해 관심을 모았다.   6월 23일 백범김구기념관에서 국가보훈부 주최로 열린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와 포상 심사기준 공청회’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는 학계·관계·시민단체 인사들.(동농문화재단)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에 심사 맡길 수 없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독립유공자 서훈에 소극적이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자신의 친일 전력을 의식한 듯 이듬해 삼일절에 208명에게 건국공로훈장(지금의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이준, 안중근, 손병희, 김좌진, 안창호, 윤봉길, 한용운, 김구, 신익희 등 우리가 익히 아는 인물들도 그제야 독립유공자 반열에 올랐다.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은 한동안 할아버지에 대한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지 않았다. 생전에 김자동(2022년 별세)은 언론 인터뷰에서 정통성 없는 군사정권에 심사를 맡길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김자동은 1961년 박정희 정권에 의해 발행인 조용수가 사형(2008년 재심에서 무죄 및 국가배상 판결)당한 민족일보의 기자였다. 김자동이 포상 신청서를 낸 것은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6월 14일이었다. 한중 수교가 이뤄져 중국 상해에 묻혀 있던 임시정부 요인 박은식·신규식·노백린·김인전·안태국 지사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한다는 보도를 보고 상해 만국공묘(현 송경령능원 외국인묘원)에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도 모셔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지원 없이 개인적으로 김가진 유해를 모국에 송환하는 것은 불가능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   (왼쪽부터) 임시정부 요인 유해 5위의 국내 봉환을 추진한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1993년 5월 28일 자 23면. 유해 발굴과 안장 소식을 소개한 조선일보 1993년 8월 5일 자와 11일 자 1면.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셋째 아들 김의한(1900~1964)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납북된 뒤 북한에서 숨져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고, 1982년 애국장을 받은 셋째 며느리 정정화(1900~1991)와 1977년 건국포장을 거쳐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된 손자 김석동(1923~1983)은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돼 있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상태다. 김자동은 심사 관계자로부터 대통령장에 추서될 것이라는 축하 인사까지 미리 받았으나 발표 직전에 국가보훈처(2023년 국가보훈부로 승격)로부터 보류 결정을 통보받았다. 일부 심사위원이 충남 관찰사로 재직할 때 의병을 탄압했다”고 주장하며 서훈에 반대한 것이다. 반박과 해명 자료를 첨부해 다시 신청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공적 심사 때마다 새로운 논란이 불거져 모두 7차례에 걸쳐 서훈이 무산됐고, 2024년 12월 27일 8번째로 낸 신청이 계류 중이다.   중국 상해 만국공묘에 세워진 김가진 묘비. 묘비는 문화혁명 때 파괴됐고, 만국공묘는 송경령능원으로 바뀌었다(위 왼쪽). 북한 평양 애국열사릉에 있는 김의한 묘소. 2006년 김자동·김숙정 부부가 성묘하면서 묘비에 정정화 사진을 올려놓고 기념사진을 찍었다(위 오른쪽). 국립대전현충원의 정정화 묘소와 묘비(아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동농문화재단, 대전시) 노론 권신 김가진을 미워했던 『매천야록』의 남인 황현 김가진의 서훈을 반대해온 이들이 문제 삼는 대목은 크게 세 가지로 ▲의병 탄압 ▲일제 작위와 은사금 ▲이토 히로부미 찬양이다. 의병대장 민종식은 1906년 5월 충남 홍주성(현 홍성시)을 점령하는 등 한때 기세를 떨쳤으나 일본군에게 패해 붙잡힌 뒤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종신유배형으로 감형돼 진도에 유배됐다가 특사로 석방됐다. 민종식의 사촌 처남인 이남규는 민종식을 숨겨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돕다가 아들 이충구와 함께 일본군에 체포됐다. 이남규 부자는 공주감옥에서 한 달 만에 풀려났으나 이듬해 일본군에 의해 살해됐다. 일부 의병 연구자들은 김가진이 민종식을 체포하고 이남규 부자를 죽게 만드는 등 의병을 탄압했다”고 주장한다. 경술국치 소식을 듣고 자결한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민종식이 패전 후 사방으로 숨어다니며 재기하기 위해 이남규 집을 왕래하고 있을 때 김가진은 충남 관찰사로 있으면서 은밀히 그를 추적하고 있다가 결박해 사령부로 송치했다”고 기록했다. 이에 대해 ‘대동단 총재 김가진’을 쓴 장명국 내일신문 대표는 고종은 각 고을 수령에게 의병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동농은 소극적으로 임했다”면서 의병을 상대하고 민종식을 체포한 것은 일본군”이라고 주장했다. 한홍구 교수도 김가진은 일본군이 체포한 이남규 부자를 석방했을 뿐 아니라 피살 4개월 전인 1907년 4월 충남 관찰사에서 물러났으므로 의병 탄압과 무관하다”고 지적했다. ‘매천야록’은 제목 그대로 정사가 아닌 야사인 데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이 아니라 전해 들은 내용을 기록한 것이어서 잘못 기술된 부분이 적지 않다. 김자동의 사위인 류희인 동농문화재단 운영위원장은 매천은 남인 계열의 재야인사여서 노론 계열의 권신인 동농을 곱게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실제로 『매천야록』에는 남인 최우형은 수레를 타고 북촌에 도착해 코를 가리며 ‘노론의 냄새가 어찌 이리 고약한가’라고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가진 행적을 두고도 과거에 급제해 청직(淸職)에 있으면서 온갖 교활한 짓을 다해 일시 간사한 무리의 괴수가 되기도 했다”고 깎아내렸다. 은사금 받았으면 대례복 팔아야 할 만큼 곤궁했을까 일제는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하면서 황족과 고위 관료 76명에게 후작(6명), 백작(3명), 자작(22명), 남작(45명) 등 귀족 작위를 내렸다. 거부한 이도 있고 중간에 반납하거나 박탈당한 이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고맙게 받았다. 김가진이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고종과의 군신(君臣)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1905년 일본 화가 덴카이가 유화로 그린 김가진 초상화. 2등 칙임관 대례복을 입고 오른손으로 흰색 장식털을 두른 대례모를 들고 있다. 왼쪽 가슴, 목, 오른쪽 가슴에는 각각 훈2등 팔괘장, 훈3등 팔괘장, 고종 황제 등극 40주년 기념장 등을 패용하고 있다. 훗날 김가진은 생활이 어려워 이 대례복을 전당포에 맡겼다가 팔아야 했다. (동농문화재단) 지금까지는 일제가 내린 작위가 합방에 기여한 대가로 알려졌으나 『조선 왕공족』 저자인 일본 역사학자 신조 미치히코는 2026년 3월 ‘국제교류 연구’에 기고한 논문 ‘조선 귀족의 서작(敍爵) 기준과 약력’에서 대한제국 시기의 지위와 황실에 대한 공로를 인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홍구 교수도 합방을 청원한 일진회 간부 대부분이 작위를 받지 못한 것을 봐도 그간의 통념과 달리 친일 공로로 작위를 수여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이태룡 인천대 독립운동사연구소장처럼 김가진이 끝까지 작위를 유지한 것을 문제 삼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일제 감시망을 뚫고 중국으로 망명해야 하는 처지에서 작위를 반납한다면 의심을 받아 위험했을 것”이라는 반론도 있다. 일본에서 조선인 유학생들과 비밀 항일단체를 조직했다가 옥고를 치러 2009년 애족장이 추서된 민태곤도 증조부 민종묵으로부터 4대째 세습한 남작 작위를 죽을 때까지 갖고 있었다. 김가진은 작위는 뿌리치지 못했으나 은사금은 받지 않았다. 심재욱 동국대 산학협력단 선임연구원은 2004년 『사학연구』에 실은 논문 ‘1910년대 조선 귀족의 실태’에서 일제는 남작에게 채권 2만 5000원의 이자 5%를 1년에 두 차례 지급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매달 209만 원가량이다. 일제는 은사금 채권 이자를 수령할 때 반드시 본인 도장을 찍도록 했는데 김가진이 받았다는 도장은 어디에도 없다. 며느리 정정화도 『장강일기』에 내가 시집온 후 시댁은 생활 형편이 날로 영락해졌다. 기미년에는 체부동의 작은 집으로 옮겼으나 시아버님은 작위에 따라 주어지는 연금은 끝내 받기를 거부했다”고 적었다. 김가진은 아들 의한에게 대례복을 전당포에 맡길 때 받은 표가 어디 있느냐? 오늘 살 사람이 나타났으니 즉시 보내라”는 편지를 부치기도 했다.   1910년대 초 서울 신교동 백운장에서 찍은 사진. 김가진은 이 집을 빼앗겨 체부동 작은 집으로 이사해야 했다. (동농문화재단) 이토 생일 축하시 뜻은 찬양 아닌 조롱” 김가진은 대한협회 회장을 맡고 있던 1908년 5월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내는 한시를 대동학회 잡지에 실었다. ‘赫赫勳名蓋世英 前身應是富士精(빛나는 공훈을 세운 이름은 세상을 덮는 뛰어남이요, 전생의 육신은 필시 후지산의 정기를 받았음이라)’로 시작된다. 이토의 공훈을 치켜세우며 67회 생일을 축하하는 내용이어서 친일 행위의 결정적 증거로 알려졌으나 새로운 해석이 나왔다. 『동농 평전』 필자인 언론인 이상국은 칭송이 아니라 조롱한 것이며, ‘20년 전 평화를 약속하더니 이제 와서 병탄을 획책하느냐’고 꾸짖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89년 주일공사 시절 김가진이 에노모토 다케아키 체신대신 별장에서 이토 추밀원 의장과 만나 주고받은 한시의 맥락에서 풀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이토가 ‘解紛不用干戈力(분쟁을 푸는 데 무기는 필요 없다)’ 운운하는 칠언절구를 읊자 김가진은 ‘倚君一語作長城(그대 말씀에 의지해 만리장성을 쌓겠다)’으로 맺으며 화답했다. 김가진 서훈을 지지하는 관계자들은 상해 임시정부와 북로군정서가 고문으로 모시고 1923년 서거 당시 항일운동가들이 너나없이 추모한 인물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당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홍구 교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국로(國老)로 예우한 인물에 대해 서훈을 거부하는 것은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명시한 헌법 정신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1921년 상해에서 열린 3·1 독립선언 2주년 기념식. 단상 정면 가운데 김가진이 앉아 있다. (경기도박물관) 대동단 단원 83명이 독립유공자, 정작 총재는 빠져 일제 병탄 전후의 혼란기에 김가진의 친일 여부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김가진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없다. 설사 친일 행위가 있었다 해도 학계에서나 정부에서는 ‘선항일 후친일(先抗日 後親日)’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반면 ‘선친일 후항일’은 인정하므로 서훈에는 큰 문제가 없다. 대동단 단원 가운데 독립유공자가 83명에 이르지만 정작 총재를 맡았던 김가진은 빠져 있다. 김의한·정정화 부부의 망명도 김가진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아들 며느리만 훈장을 받았다. 대동단원이나 김가진 후손 입장에서는 송구한 마음이 들 만도 하다.   1934년 김의한·정정화 부부가 임시정부 요인들과 찍은 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자동(당시 6세)을 안고 있는 정정화. 뒷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구, 여섯 번째가 김의한이다. (동농문화재단) 김자동은 김가진기념사업회를 꾸리자는 말이 나오자 할아버지만 기념할 게 아니라 대동단 전체를 기념하자”며 2002년 조선민족대동단기념사업회를 만들었다. 2004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를 창립한 것도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후손 가운데 선조를 알릴 만한 형편이 되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친일파로 몰리는 것이 후손으로서 죄송스럽다” 2024년 출범한 동농문화재단의 김선현 이사장(김자동의 둘째딸)은 증조부의 공적을 인정받고 싶어서라기보다 친일파로 몰리는 것이 너무 억울하고 후손으로서 죄송스럽다”면서 이번만큼은 기대했던 결과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바람을 털어놓았다. 이종찬 광복회장도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APEC 정상회의에서 만난 시진핑 중국 주석에게 항일운동가 유해 발굴과 봉환 필요성을 역설하고 긍정적 답변을 들었다는 소식을 언급하며 지금까지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서훈이 보류된 김가진 선생에 대해 제대로 된 평가와 서훈이 이뤄져 유해 발굴 봉환이 꼭 실현되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종찬 광복회장(오른쪽)이 김선현 동농문화재단 이사장의 안내로 2024년 7월 26일 서울 예술의전당 서예관에서 열리고 있는 동농 김가진 서예전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동농문화재단) 독립유공자들의 희생과 헌신을 기리고 반민족행위자들을 처벌하는 것은 민족정기를 선양하고 나라의 기틀을 바로잡는 일이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반민특위를 와해시켜 친일 청산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독립유공자 서훈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아 지금까지 후유증을 겪게 만들었다. 사료는 뒤늦게 발굴되기도 하지만 사라지는 것이 더 많다. 만일 임정 요인 다수가 생존해 있고 증언과 자료가 많이 남아 있던 그 당시에 공적 심사가 이뤄졌다면 김가진은 과연 어떤 평가를 받았을까. 김가진 서거 당시 호상(護喪)을 맡은 7명의 이름(이발·박은식·이동녕·이시영·홍진·김인전·김철)이나 조문객 명단(김구·안창호·김시현·안정근·신숙 등)만 봐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이희용 줌렌즈 hoprav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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