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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군비증강으로 평화를 살 수는 없다

군비증강으로 평화를 살 수는 없다
[뉴스]
9월 29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바라본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상공에서 철새들이 남북 사이를 가르며 날고 있다. 2026.9.29. 연합뉴스 같은 정세 인식, 충돌하는 처방 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는 지난 10월 6일 조성렬의 짙어지는 미국 패권의 그늘 속 한국의 선택”이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미국 패권의 재정적 한계와 국제질서의 재편을 분석하면서, 한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배제될 위험을 극복하고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다. 조성렬은 니얼 퍼거슨의 이른바 ‘퍼거슨 한계’와 레이 달리오의 거대 부채 사이클을 근거로 미국이 기존의 패권 유지 방식을 바꾸고 있다고 진단한다. 미국이 중국과의 충돌을 관리하고 동맹국에 더 많은 비용과 책임을 전가하는 상황에서 한국 역시 기존의 동맹 의존적 안보전략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 인식에는 공감할 부분이 적지 않다. ‘안보를 일방적으로 위탁하던 시대는 끝났다’는 진단으로 미국의 군사적 보호를 절대적인 전제로 삼아 온 통념에 문제를 제기하고, 미중 전략경쟁에 한국이 일방적으로 연루될 위험을 경고하며, 한중 전략대화와 외교적 자율성 확대를 강조한 것은 중요한 문제 제기다.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을 한국군 주도의 연합방위체제와 안보 주권 확대의 계기로 제시한 점도 평가할 만하다. 물론 조성렬은 한미관계를 안보의 기본축으로 확고히 유지해야 한다는 전제를 분명히 하고 있다.   강신철 국방부 장관이 10월  2일 경기 평택시 캠프 험프리스에 방문해 제이비어 브런슨 유엔군사령관(겸 주한미군·연합사 사령관), 김성민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과 이동하고 있다. 2026.10.2. 연합뉴스 그러나 저자가 제시하는 처방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조성렬은 한국의 조선업과 함정 유지·보수·정비(MRO), 원전 등 산업적 역량을 대미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하고, 핵추진잠수함과 우라늄 농축·사용후핵연료 재처리 관련 권한, 전작권 전환 등을 확보하여 독자적인 억제력을 강화하자고 주장한다. 여기에 중국과의 전략대화, 일본과의 투 트랙 외교를 결합하여 ‘자강평화’와 ‘다원외교’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러한 처방의 상당 부분이 이미 국가정책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25년 11월 발표된 한미 공동 팩트시트는 미국이 한국의 공격형 핵추진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 글의 비판은 조성렬 개인의 제안을 넘어 현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 방향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미국 의존에서 벗어나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자는 방향에는 동의한다. 그러나 그 자율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에 대해서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대신 한국의 군사력과 핵 관련 역량을 확대하는 것이 과연 평화로 가는 길인가? 미국 패권의 변화가 한국에 새로운 선택의 공간을 제공한다면, 그 공간을 군비증강과 핵 잠재력의 확대로 채울 것인지, 적대관계의 해소와 군비축소, 평화적 공존의 제도화로 채울 것인지가 핵심 쟁점이다. 군사적 자강은 평화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국가안보 현실주의는 군사력의 우위를 통해 상대방의 공격을 억제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정한 조건에서 군사적 억제력이 실제로 공격 가능성을 낮출 수 있다는 점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억제력의 강화가 곧 지속 가능한 평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한국이 새로운 첨단무기와 핵 관련 역량을 확보하면 조선은 이를 새로운 위협으로 인식하고 대응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역시 한국의 군사적 역량 확대를 한미일 군사협력의 강화와 연결해 해석할 수 있다. 일본 또한 주변국의 군비증강을 자국의 군사력 확대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다. 한 국가가 자국의 안전을 위해 선택한 조치가 다른 국가의 불안을 증폭시키고, 그 대응이 다시 최초 국가의 군비증강을 불러오는 안보딜레마가 반복되는 것이다. 물론 조선의 핵무장을 한국의 군비증강에 대한 대응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규모 연합훈련과 전략자산 전개, 그에 맞선 미사일 시험과 핵 고도화가 서로를 정당화해 온 상호작용의 악순환을 부정하기도 어렵다.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상대방보다 더 강력한 군사력을 확보하려는 경쟁이 아니라, 서로의 위협을 감소시키는 관계와 제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이것은 군사적 현실을 외면하는 이상주의가 아니다. 군비경쟁의 비용과 위험을 줄이면서도 실제 전쟁 가능성을 낮추기 위한 또 다른 현실주의다.   핵추진 VMF 타이푼급 잠수함. 세계에서 가장 큰 배수량의 잠수함. 위키피디아 핵추진잠수함과 핵 잠재력 확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조성렬의 처방, 그리고 이미 한미 간에 합의된 정책 가운데 특히 우려되는 것은 핵추진잠수함과 핵물질 농축·재처리 관련 권한의 확대를 전략적 자율성의 주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핵추진잠수함은 핵무기를 탑재한 잠수함과 다르다. 원자로를 추진동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핵무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민수용 우라늄 농축과 사용후 핵연료 재처리 역시 그 자체가 핵무기 개발과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술적·법적 구분이 군사적·정치적 파급효과까지 없애는 것은 아니다. 핵추진잠수함은 장기간 잠항할 수 있는 군사적 능력을 제공하며, 핵연료의 확보와 관리, 핵 안전조치, 원자로 사고에 대한 대응 등 새로운 문제를 수반한다. 농축과 재처리 기술 역시 핵물질 관리와 핵확산 위험을 둘러싼 국제적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방부는 건군 78주년을 맞아 국군이 보유한 유·무인 복합체계 신무기를 공개했다. 사진은 지난 29일 국군의날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공개한 K21. 2026.10.1. 연합뉴스 더욱이 한국은 1992년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통해 핵무기의 시험·제조·생산·접수·보유·저장·배비·사용뿐 아니라 핵재처리 시설과 우라늄농축 시설의 보유도 하지 않기로 합의한 바 있다. 조선은 2013년 1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성명을 통해 공동선언의 ‘완전 백지화, 전면 무효화’를 선포했고, 한국은 2025년 11월 한미 공동 팩트시트를 통해 농축·재처리로 ‘귀결될 절차’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확보했다. 공동선언이 남과 북 양쪽에서 형해화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의미와 한반도 비핵화의 원칙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핵 관련 역량 확대가 한반도 비핵화 원칙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주변국의 군사적 대응을 어떻게 유발할 수 있는지, 경제적·생태적 비용은 무엇인지에 대한 공개적인 검토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미 진행 중인 국가정책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과 핵추진잠수함 사업은 행정부 간 합의만으로 추진할 것이 아니라 국회의 동의와 공개적 검증을 거쳐야 한다. 특히 파이로프로세싱은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별개로 경제성, 안전조치, 방사성 폐기물 관리 등의 문제가 남아 있다. 이를 에너지 안보와 산업경쟁력의 문제로만 접근해서는 안 된다. 생명평화운동은 군사용 핵기술뿐 아니라 민수용 핵기술에 대해서도 생태적 안전성, 민주적 통제, 탈핵·에너지전환이라는 원칙을 일관되게 적용해야 한다. 핵을 통한 군사적 우위가 아니라 핵위험 자체를 줄이는 것이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을 확대하는 길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의 핵 위협에는 무엇으로 대응할 것인가. 생명평화운동이 당장 모든 억제수단의 해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군비통제와 신뢰구축이 실질적 성과를 낼 때까지 기존 한미 억제체제가 과도기적으로 유지되는 현실은 인정하되, 핵공유나 전술핵 재배치, 전략자산의 상시 배치처럼 억제를 핵 쪽으로 더 끌어올리는 조치에는 반대해야 한다. 억제는 군비통제로 넘어가기 위한 과도기적 장치여야지, 그 자체가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김정은 조선 국무위원장이 지난 10일 평양체육관에서 진행된 노동당 창건 81주년 경축공연을 관람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11일 보도했다. 이날 공연에는 김 위원장의 부인 리설주 여사와 딸 주애도 함께 관람했다. 2026.10.11. 연합뉴스 한반도 평화의 당사자인 조선은 어디에 있는가 조성렬의 논의에서 더욱 아쉬운 점은 한반도 평화의 핵심 당사자인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적극적인 구상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전략적 이해관계 변화 속에서 한국이 배제되는 이른바 ‘한반도 패싱’을 우려하면서도, 정작 한국이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인 대조선 적대관계 해소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나 한반도의 평화는 한국의 대미 협상력이나 군사적 역량만으로 실현될 수 없다. 조선은 2023년 말부터 ‘적대적 두 국가’ 노선을 제시했고, 2024년 10월에는 헌법이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2026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에서 개정한 헌법에서는 통일 관련 표현을 삭제하고,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영토 조항을 신설했다. 다만 개정 헌법에 ‘적대적 두 국가’나 ‘교전국’ 같은 표현은 담기지 않았다. 남북 관계의 성격이 적대와 공존 가운데 어느 쪽으로 굳어질지는 아직 열려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 역시 헌법의 영토·통일 조항을 조선의 실체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아 온 해석 관행, 국가보안법, 군사적 억제 중심의 대조선 정책 등에서 기존의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 구조를 충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과거의 통일 담론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는 관계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한국과 조선이 서로 다른 정치체제와 국가적 이해관계를 가진 현실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체제를 강제로 변화시키거나 흡수하려는 접근을 중단하며, 평화적 공존을 제도화하는 새로운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 조선의 개정 헌법이 상대를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로 지칭하면서 적대 표현을 자제했다는 분석은 이러한 접근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를 위해 한국은 먼저 독자적으로 실행할 수 있는 대조선 적대정책의 청산에 나서야 한다(세상을 바꾸는 시민언론 민들레, 남북 단절로 이어진 적대 구조 청산 위한 제언”, 2026년 2월 1일 자 칼럼 참조.). 2025년 접경지역 확성기의 전면 철거, 같은 해 12월 항공안전법과 경찰관 직무집행법 개정을 통한 전단 살포 제지 근거 마련, 2026년 2월 무인기 침투 사건에 대한 정부의 공식 유감 표명은 의미 있는 출발이다. 이제 이러한 조치가 정권 교체로 되돌려지지 않도록 제도화하는 한편, 국가보안법의 폐지, 민간교류와 접촉의 자유 보장, 조선을 적대의 대상으로만 규정해 온 공식 문서와 교육 내용의 정비 등 다음 단계의 정책 전환으로 나아가야 한다. 동시에 조선에도 대한민국을 적대국가로 규정하는 정책의 완화, 군사적 위협의 중단, 상호 불가침과 평화적 공존을 위한 제도적 협의를 요구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국의 선제적 긴장완화 조치와 양측의 상호적 군비통제를 구분하는 것이다. 한국이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법제와 정책은 상대방의 선행 조치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군사합의와 군비통제, 평화체제 구축은 상대방의 참여와 상호 검증이 필요한 과제다. 이러한 구분을 전제로 해야 일방적 양보라는 비판을 넘어 실질적인 평화정책을 발전시킬 수 있다. 비핵화는 장기적 과제, 상호 군비통제가 우선 조선의 핵무장과 미사일 전력 고도화는 분명한 군사적 현실이다. 이를 외면한 평화론은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핵화를 모든 대화와 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해 온 기존 접근 역시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제는 비핵화를 대화의 입구에 두기보다 핵위험 감소와 군비통제를 거쳐 장기적으로 실현해야 할 목표로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은 접경지역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하고 군사적 충돌을 예방하기 위한 독자적 조치를 취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군 통신선 복원, 군사훈련의 위험요소 조정, 우발충돌 방지체계 구축 등을 조선에 제안해야 한다. 9·19 군사합의는 조선이 2023년 11월 전면 파기를 선언하면서 사실상 효력을 잃었다. 정부가 2026년 2월 비행금지구역 설정 등 합의의 일부를 선제적으로 복원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은 의미 있는 출발이다. 감시 공백에 대한 우려는 군사활동의 상호 통보와 우발충돌 방지 장치로 보완하면서, 단순한 원상복원을 넘어 현재의 군사적 환경에 맞게 유효한 내용을 재확인하고 필요한 조항을 보완한 복원안을 조선에 공개적으로 제안해야 한다. 나아가 한미연합훈련의 조정과 조선의 핵·미사일 시험 유예, 군사활동의 상호 통보, 접경지역의 재래식 군비통제 등을 단계적으로 협의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상호 불가침과 평화협정, 핵위험 감소, 동북아 비핵무기지대 구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이 과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이 협상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으며, 미국과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이해관계도 복잡하게 작용할 것이다. 그렇다고 군비경쟁 이외의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평화는 상대방의 선의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 상호 위협을 줄이는 제도와 신뢰를 끈질기게 구축하는 과정이다.   9월 15일 강원 홍천군 육군 2군단 작전 지역에서 적 침투 상황을 가정해 실시한 봉쇄선 차단 및 탐색 격멸 작전 에서 3기갑여단 장병들이 봉쇄선을 점령, 진지에서 경계에 임하고 있다. 2026.9.15. 연합뉴스 한미관계, 군사동맹 중심에서 평화⋅생태⋅민주주의에 기초한 관계로 전환해야 한국이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의 비대칭적 구조를 재검토해야 한다. 특히 전시작전통제권 전환은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2027년 국방예산은 전년보다 8.2% 늘어난 73조 2777억 원으로 편성되었고, 2025년 11월 한미 공동 팩트시트에는 한국의 국방비를 국내총생산(GDP)의 3.5%까지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전작권 전환이 이러한 국방비 증액과 첨단무기 도입 경쟁의 명분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 주한 미군의 전략적 유연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2006년 1월 한미는 전략적 유연성에 합의하면서, 미국은 ‘한국이 한국민의 의지와 관계없이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한국의 입장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이 원칙을 실질적인 사전동의 절차로 구체화하여, 한국의 영토와 군사기지가 대만해협 등 역외 분쟁에 활용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의 명시적 동의와 민주적 통제가 보장되어야 한다. 한국의 조선업과 MRO(유지·보수·운영) 역량을 미국과의 협상 수단으로 활용하는 문제 역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미국 해군 함정의 정비와 군수지원에 한국 산업이 깊이 편입될수록 한국이 미중 군사적 대립에 간접적으로 연루될 가능성도 커진다. 산업적 협력이 곧 군사적 종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위험을 통제할 제도 없이 협력을 확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한국의 산업적 역량은 미국의 군사적 패권을 보완하는 데 집중하기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산업을 발전시키는 데 우선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조선업 역량은 친환경 선박, 해상풍력 설비, 연안 공공해운 등 기후위기 대응과 생태전환에 필요한 분야로, 제조와 기술 역량은 공공교통과 돌봄처럼 사회적으로 필요한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자는 것이 아니다. 군사동맹 중심의 관계를 평화와 생태, 민주주의에 기초한 더 대등하고 포괄적인 관계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중국·일본·러시아에 대해서도 동일한 평화원칙을 적용해야 생명평화운동의 독자성은 미국의 패권과 한국의 군사주의를 비판하는 데서만 성립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 일본, 조선에 대해서도 일관된 평화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중국과는 전략대화를 복원하고,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축을 위한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서해 해양구조물과 해양경계 문제, 대만해협의 군사적 긴장, 인권 문제에 대해서는 비판적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서해 생태계와 기후재난, 에너지전환 등에서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식민지 지배와 강제동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외교안보 협력의 대가로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동시에 일본의 군사력 증강과 한미일 군사협력의 확대가 동북아 군비경쟁에 미치는 영향을 비판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일본 시민사회의 반핵·군축·평화헌법 수호 운동은 중요한 협력 기반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민간인 피해, 조러 군사협력의 확대 역시 평화원칙에 입각하여 비판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주권과 자위권을 인정하면서 전쟁의 확대와 장기화를 막기 위한 외교적 해결을 요구해야 한다. 한국의 지원은 전쟁 확대 위험과 민간인 피해를 고려해 살상무기의 직간접 지원이 아니라 인도적 지원과 재건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러시아를 동북아 평화체제 논의에서 영구적으로 배제하는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 장기적으로 극동지역의 산림과 기후, 철도와 에너지 협력 등을 통해 다자적 관계를 복원할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어느 국가와 얼마나 가까운가가 아니다. 어느 국가의 군사주의에도 종속되지 않고, 모든 국가에 생명·평화·민주주의라는 동일한 원칙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등거리 외교와 구별되는 생명평화운동의 독자적인 국제주의다.    9월 30일 경기도 연천군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민간인통제선 지역에 지뢰 경고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이날 군과 유엔군사령부는 DMZ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 사고에 대해 북측의 정전협정 위반임을 공식 발표했다. 2026.9.30. 연합뉴스 생명평화운동도 스스로를 돌아보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안보 현실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생명평화운동의 역할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의 평화운동 역시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구도를 변화시키는 데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평화의 당위성을 반복하면서도 현실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정부의 남북관계 개선정책에 기대면서 시민사회 자신의 독자적인 평화전략을 구축하는 데 소홀했다. 통일운동의 역사적 성과를 계승하면서도 변화된 남북관계에 걸맞은 평화적 공존 전략을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점 역시 성찰해야 한다. 군비축소를 주장하면서도 국방예산과 무기체계별 문제를 구체적으로 분석하거나, 군비감축을 통해 확보할 재원을 어떤 사회적 필요에 사용할 것인지 제시하는 데는 취약했다. 이제 생명평화운동은 선언과 성명 중심의 대응을 넘어 국가의 군사·외교·경제정책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시민 역량을 조직해야 한다.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과 핵추진잠수함 사업, 농축·재처리 문제에 대해서는 국회 동의와 사회적 공론화를 요구해야 한다. 국방예산과 무기 도입, 방산 수출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고, 군비의 일부를 기후위기 대응과 돌봄, 농업, 교육, 지역공동체 회복으로 전환하는 구체적인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평화배당이 그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와 남북 민간교류의 자율성 확대, 외교안보 정책에 대한 정보공개와 시민 숙의제도의 도입 역시 중요한 실천과제다. 특히 접경지역 주민을 군사안보 정책의 수동적 대상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지뢰제거, 군사시설로 인한 생활권 침해, 접경지역의 생태계 보전, 홍수와 산불 등 기후재난 대응을 주민의 생존권과 결합해야 한다. 한국과 조선의 접경지역을 군사적 대결의 최전선에서 생명평화협력의 최전선으로 전환하는 것이야말로 평화운동의 구체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한국·조선·미국·중국·일본·러시아의 시민사회와 가능한 범위에서 협력하면서, 국가 간 군사적 대결을 완화하는 ‘동북아 생명평화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한다. ‘자강평화’를 넘어 ‘공생평화’로 미국 패권의 변화와 국제질서의 재편은 한반도에 새로운 위험과 가능성을 동시에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된다고 해서 평화가 저절로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변국들이 군사적 공백을 채우기 위해 경쟁한다면 한반도는 더욱 위험한 대결의 현장이 될 수 있다. 한국이 미국의 군사적 보호에 덜 의존하기 위해 독자적인 군사력과 핵 관련 역량을 강화하는 선택은 일정한 억제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대방의 군비증강을 유발하고 동북아 군사블록의 대립을 심화시킨다면 장기적으로는 평화를 더욱 어렵게 만들 것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자강평화’가 아니라 ‘공생평화’다. 공생평화는 군사적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낙관론이 아니다. 현실의 군사적 위협을 인정하되, 그 위협을 더 큰 군사력으로만 해결하려는 악순환에서 벗어나 상호적이고 검증 가능한 군비통제, 적대관계의 해소, 평화적 공존의 제도화를 통해 안전을 만들어가는 전략이다. 나아가 국가안보의 중심을 군사력과 영토의 방어에만 두지 않고 인간의 생존과 존엄, 생태계의 안전, 민주적 권리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 확보로 확장하는 것이다. 한반도 평화는 한국만의 평화일 수도, 조선만의 평화일 수도 없다.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와 일본의 전략적 이해관계에 종속된 평화여서도 안 된다. 한국과 조선이 서로의 존재와 체제를 인정하고, 주변국들이 군사적 대결보다 협력을 선택하며, 시민사회가 국가의 군사적 결정을 민주적으로 통제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평화의 토대가 마련될 수 있다. 생명평화운동은 바로 그 가능성을 현실의 정치적 선택지로 만들어야 한다. 정범진 사단법인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평화를 위해 더 강력한 무기를 확보해야 한다는 낡은 명제에 맞서, 우리는 적대관계를 줄이고 서로의 생존을 보장하는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자강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제시해야 한다. 군비증강으로 평화를 살 수는 없다. 평화는 무기의 우위가 아니라 적대관계의 해소와 공존을 위한 지속적인 실천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인류사의 오래된 진리를 다시 한번 되새긴다.정범진 생명평화민주주의연구소 이사장 bjj08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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