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원 첫날 의원 선서 거부, 모자 벗지 않은 조셉 피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영국 의회 역사에는 별의별 사람이 다 등장했지만, 모자를 벗지 않겠다고 버틴 의원은 흔치 않다. 조셉 피스(Joseph Pease, 1799~1872)가 바로 주인공이다. 1833년 하원에 처음 등원하던 날, 다른 초선 의원들이 얌전히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할 때 이 남자는 모자도 벗지 않은 채 나는 맹세하지 않고 확언하겠다 고 선언했다. 의회가 발칵 뒤집혔다. 그런데 결국 이긴 건 피스였다. 영국 역사상 최초의 퀘이커 하원의원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조셉 피스(위키피디아)
철도왕의 아들, 그러나 철도가 전부는 아니었다
피스는 잉글랜드 북동부 달링턴의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에드워드 피스(Edward Pease, 1767~1858)는 세계 최초의 철도 가운데 하나인 스톡턴-달링턴 철도를 밀어붙인 인물로, 후대에 철도의 아버지 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아들 조셉은 아버지를 도와 이 철도회사의 첫 사업계획서를 작성했고, 1825년 개통 이후에는 아버지 대신 회사를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퀘이커들은 원래 장사에 능했다. 전쟁도 안 하고, 술도 안 마시고, 사치도 안 부리니 남는 건 근면과 신용뿐이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피스 역시 이 전통에 충실했다. 1830년 무렵에는 영국 더럼 남부 지역 최대의 탄광 소유주가 되었고, 장인이자 동업자였던 조셉 거니(Joseph Gurney)와 함께 미들즈브러 항구개발에 뛰어들어 이 작은 어촌을 석탄수출항으로 키워냈다. (티스강 상류의 오래된 항구 마을) 야름(Yarm)은 그랬고, 스톡턴은 그렇고, 미들즈브러는 그렇게 될 것이다 라는 그의 예언은 지금도 그 도시 문장에 라틴어 문구로 남아 있다.
철도 개척자 에드워드 피스(위키피디아)
모자를 쓴 채 의회에 들어간 사나이
1832년 영국 선거개혁법이 통과된 해, 피스는 더럼 남부 지역구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문제는 등원절차였다. 신 앞에서 맹세하지 않는 퀘이커의 신앙 원칙 때문에 그는 의원선서를 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당선되고도 의석에 앉지 못할 판이었다. 특별위원회가 꾸려졌고, 결국 확언 이라는 대체 절차가 만들어져 피스는 무사히 의석을 지켰다. 이후 모자를 벗지 않는 것도 신앙적 이유였는데, 이 역시 관철시켰다. 형식을 깨뜨리지 않고도 원칙을 지킨, 제도와 신념 사이의 절묘한 줄타기였다.
의회에 들어간 그는 그레이 백작과 멜버른 경의 휘그정부를 지지하며 상원에서 주교의석을 없애자는 주장, 의회 임기단축, 비밀투표 도입 등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개혁안들을 밀었다. 무엇보다 토머스 파월 벅스턴(Thomas Fowell Buxton, 1786~1845)과 손잡고 노예제폐지 운동에 힘을 보탰다. 1841년 스스로 정계를 떠났지만, 그가 놓은 선례 덕분에 그의 동생 헨리 피스와 아들 조셉 휘트웰 피스가 잇달아 같은 지역구 의원이 되었다.
토머스 파월 벅스턴(위키피디아)
눈이 먼 뒤에도 멈추지 않은 손
말년의 피스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그러나 비서의 도움을 받아 퀘이커 서적들을 계속 출판, 배포했고, 1870년에는 조나단 다이먼드(Jonathan Dymond, 1796~1828)의 ‘도덕론’ 저작을 스페인어로 번역해 배포하는 사업까지 벌였다. 이 공로로 스페인정부는 그에게 카를로스 3세 대십자훈장을 수여했는데, 눈먼 영국인 퀘이커 사업가가 스페인 왕실 훈장을 받는 장면은 지금 봐도 꽤 초현실적이다. 1860년부터는 영국 평화협회 회장을 맡아 전쟁 반대에도 앞장섰다. 1872년, 달링턴 자택에서 심장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나단 다이먼드(Jonathan Dymond · The Burleigh Family of Plainfield, Connecticut: An Anti-Racist Abolitionist Legacy · SJSU Digital Exhibits on Omeka S)
한국에 남기는 질문
피스의 이야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제도와 정면충돌하지 않으면서도 제도를 바꿔냈다는 점이다. 모자를 벗으라는 관행, 신 앞에 맹세하라는 규정 앞에서 그는 물러서지도, 폭력적으로 저항하지도 않았다. 대신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버텼고, 결국 제도 쪽이 예외규정을 만들어 그를 받아들였다. 원칙을 지키는 소수가 다수의 제도를 설득해낸 사례다.
2024년 12월 3일 밤, 한국에서는 시민들과 국회가 절차와 형식을 무기 삼아 윤석열의 위헌적 시도를 막아냈다. 국회의원들이 담을 넘고 시민들이 계엄군 앞을 막아선 장면은, 190여 년 전 한 남자가 모자를 쓴 채 영국의회 문턱을 넘던 장면과 겹쳐 보인다. 둘 다 형식자체를 부정한 게 아니라, 형식 안에서 원칙을 지켜내는 방식을 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 하나 생각해볼 지점은 종교적 소수자, 사회적 소수자가 제도 안에 자리를 만들어가는 방식이다. 피스는 소송이나 시위가 아니라 끈질긴 의회 내 협상으로 확언제도를 만들어냈다. 한국 사회에서도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 소수종교와 신념의 자유 문제가 여전히 뜨겁다. 다수결로 결정된 제도라 해도 소수자의 신념을 수용할 여지를 만드는 유연함이 결국 그 사회의 품격을 보여준다는 사실을, 이 눈먼 퀘이커 사업가의 생애가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영국 달링턴 시내의 조셉 피스 동상(위키피디아)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