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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아버지의 땅 익산에서 농부로 제 2의 삶

아버지의 땅 익산에서 농부로 제 2의 삶
[사람들]
카세트테이프 제작까지 끝냈다. 그가 할 일은 다 마쳤다. 임계치까지 치솟았던 긴장감이 일거에 꺼졌다. 허탈할 정도였다. 그러나 돌아서는 순간 더 큰 괴물이 그를 덮쳤다. 극도의 긴장과 집중 속에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은 올 것이다. 이번엔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친북, 용공, 간첩, 고문, 조작, 실종, 의문사….” 깜박이는 백열등의 불빛 속에서 남산 지하실, 보안사 밀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유년 시절, 백열전등마저 꺼지고,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어둠을 찢곤 하던 그때 그 지하 방공호 속의 공포가 밀려왔다. …하지만 이미 각오했던 것. 숨을 곳도 없었지만, 숨을 생각도 없었다. 그건 카세트테이프 앞면에 버젓이 작사, 작곡자로 ‘김민기’ 석 자를 명기했을 때 세상에 알린 것이었다. 게다가 그답지 않게 선동적인 격문까지 보태지 않았던가. ‘초판’ 2천 개가 다 소진됐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런데도 그들은 오지 않았다. 그 테이프들이 새끼를 치고 또 쳐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갔다. 채희완 등이 공연의 본보기를 만들기로 하고, 연습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러면 이제는 올까? 어둠 속 어딘가에서 지켜보고만 있을 그들의 침묵이 그의 목덜미를 짓눌렀다. 제가 당할 고초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처럼 더 속을 태우고 있을, 그를 도와준 친구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앞뒤 안 가리고 모든 걸 내던지다시피 나섰던 이들이었다. 김민기는 공장의 불빛 카세트테이프 제작을 마친 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풀려 났다. 1978년 12월 어머니의 권유로 서울을 떠나 아버지의 고향인 익산으로 내려갔다.  사진은  김민기가 익산에 머물던 1979년 겨울 기타반주에 맞춰 상록수를 부르고 있는 모습. 사진을 제공한 여장수 전 백제고 교장의 증언에 따르면 노래를 부른 날짜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이 열린 11월 3일이라고 한다. 사진출처:서울신문( 여장수 제공 )     저만 당하면 될 일, 아니 제가 잡혀가야 끝날 일이었다. ‘오려거든 속히 오라.’ 기다리던 그들이 찾아온 것은 1979년으로 넘어가던, 지독하게 춥던 날이었다. 이번에도 그들은 그의 눈을 가린 채 승용차에 싣고는 어디론가 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미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지나 계단을 한참 내려가 차가운 쇳소리가 났다가 다시 닫힌 뒤에야 그들은 눈가리개를 풀었다. 눈이 부셨다. 천장 중앙에 백열전구가 빛나고 있었고, 전등 밑 철제 책상 하나가 달랑 있는 방이었다. 구석엔 세면대도 하나 있었다. 더는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까짓거, 서소문 ‘범진사’에서도 당한 일 아닌가? 그때 그 일을 생각하며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러나 곤봉이나 발길질이 날아오지 않았다. ‘앉으라’는 한마디에 눈을 떴다. 철제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수사관이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범진사와는 달랐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위압적이었지만, 폭력의 광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수사관은 책상 위에 두툼한 책자 한 권을 던졌다. 사내는 다시 턱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읽으라’고 했다. 첫 장에는 김민기의 인적 사항과 행적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한 장씩 넘겼다. 본문 왼쪽에는 악보와 가사가 있었고 오른쪽 페이지에는 해설이 있었다. 제목만 안 달렸을 뿐, ‘김민기 노래 해설집’이었다. 그런데 해설의 수준이 하품 날 정도였다. 그 책자에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불리던 독립군가와 빨치산 노래까지 ‘김민기 작’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곧 알게 되겠지만, 그건 김민기를 여차하면 용공 혹은 간첩으로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범죄 혐의 목록이었다. 그 내용은 이런 식이었다. ‘아침이슬’ 항목을 보면, 가사의 첫 낱말인 ‘긴 밤’에 밑줄이 쳐져 있었고 오른쪽엔 ‘유신체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해설이 있었다. ‘긴 밤’ 외에도 묘지, 태양 등에 밑줄이 쳐져 있었고, ‘태양이란 김일성 체제를 뜻’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붙어 있었다. 이 노래에 대한 전체적인 평가와 결론은 이랬다. 긴 유신체제의 밤을 마감하고 민족의 태양이신 김일성을 열렬히 맞이하자는 취지의 노래!” 그래서였을까? 이 기이한 해설집이 나오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공교롭게도 북한에선 ‘아침이슬’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북 정권은 이 노래를 ‘김일성 찬가’쯤으로 알고 보급했나 보다. 물론 북한 정권의 ‘아침이슬’ 사랑은 곧 식었다. 이 노래가 남쪽의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이자, 한 청년의 치열한 자기 성찰과 모색 그리고 결단과 출발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언젠가부터 모든 노래책에서 슬그머니 삭제됐다. 인민의 입에서도 일제히 사라졌다. 김민기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왔나 보다. 기관원의 기분이 상했나 보다.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1971년 11월 발매된 앨범 김민기. 세상 밖으로 나와 시대의 어둠과 맞섰다.  사진은 2025년 11월 발매한 앨범 김민기 복각 LP 판 이미지. 출처 :학전 제공 그러면 뭔가?” 그냥 제 심경을 표현한 것뿐입니다.” ‘긴 밤’은 유신체제를 뜻하고, ‘붉은 태양은 김일성을 뜻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아닙니다.” 유신이 빨리 망하고 김일성이 내려오길 기대하는 것 같은데.” 아닙니다.” 그럼, 무언가?” 저 노래는 1970년에 작곡했고, 1971년에 음반에 실렸습니다.” 그런데?” 유신이 언제 됐죠? 1972년 아닌가요?” ….” 다음은 ’작은 연못‘. 그건 실소에 부치고 말 정도의 해설이 아니었었다. (노래 속의 물고기) 두 마리란 남과 북 아닌가?” 그냥 연못에 사는 물고기인데요.” 분단이 남쪽 책임이라는 것 아닌가.” 예?” 떠오른 한 마리는 남쪽을 이야기하는 것 아닌가? 북한이 통일했으면 좋겠다는 것 아닌가?” 이건 ‘공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럼 싸움 이야기는 왜 나오나?” 숨이 턱 막혔다. 문득 삼진통상에서의 경험이 떠올랐다. 공해 기업이 오염된 물을 방류하면, 물을 쓸 수 없는 농민과 공장이 싸우지 않습니까.” 유독 화학물질을 다루는 근로자가 유독물질에 중독돼 죽기도 하지 않습니까? 환경 개선을 위해 사업주와 다투기도 하고요?” 수사관의 심문은 악착같지 않았다. 사실 그때는 ‘공해’란 말이 일반화되기도 전이었다. 더군다나 환경운동연합 전신인 ‘공해추방운동연합’이 탄생하지도 않았다. 수사관은 처음엔 날을 세우는 듯했지만, 금방 사무적으로 변했다. 준비된 것만 건성건성 따졌다. 그래서 수사관과 김민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했다. 조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김민기는 이틀 뒤 승용차에 실려 어딘가에 내려졌다. 기관원은 돌아갈 차비까지 주며 이 한마디만 했다. 여기서 있었던 이야기 어디서도 하지 말 것.” 김민기는 훗날 심문할 때 봤던 그 ‘해설집’에 대해, 당시 정보기관이 관련 공무원과 기관원을 교육하는 교재였고, 새마을연수원 같은 곳에서 정신교육 참고 자료로 쓰였던 것 같다고 추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형이 새마을연수 교육에 다녀와서는 동생(김민기)에게, 수사관이 물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질문을 하더란다. 사실 아무리 타작한들 더 나올 것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노래 ‘아침이슬’이나 ‘작은 연못’을 김일성과 북한에 대한 찬송이고, ‘공장의 불빛’을 사회주의 체제에 찬가라고 떠들면 도대체 누가 믿을까? 가뜩이나 비웃음을 사고 있던 중앙정보부인데, 얼마나 더 조롱받을까. 주리를 틀어 ‘딴따라’ 간첩단을 조작한다고 하자. 세상은 또 얼마나 코웃음 칠까? 김민기가 훗날 전해 들은 이야기도 그와 같았다. 이른바 상층부에선 ‘김민기’를 ‘제2의 김지하로 키워선 안 된다’라는 쪽으로 정리했다는 것이다. 김지하의 ‘오적’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오만 법석을 다 떨며 세기적인 필화로 키웠다가, 국제적인 비난과 망신만 샀다. 제대로 혼내지도 못하고, 김지하를 세계적인 문인, 세계의 양심으로 띄워주기만 했다. 어머니는 몸져누워 있었다. 그동안 지켜볼 뿐 말씀이 없었던 어머니가 이번엔 달랐다. 막무가내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서울에서 떠나라!’ 1973년 봄 ‘모택동 노트’ 때문에 한밤중 방문을 걷어차고 들어와 김민기를 연행한 일 때문에 심장병까지 얻은 어머니였다. 막내가 서울에 있다가는 당신이건 막내건 누군가 제명에 못 갈 것 같으셨던가 보다. 홀로 전쟁도 이겨내고, 홀로 9남매를 나름 훌륭하게 키웠는데, 유복자로 태어난 막내를 먼저 보낼 순 없었다. 몇 년간 조용히 살아라. 너 죽는 꼴 나는 못 본다.” 김민기가 1978년 겨울 고향 익산으로 내려가 농삿일을 배웠던  석임리 살림집. 월간 마드모아젤은 1987년 8월호 사진설명에서 김민기가 처음으로 농촌 생활을 경험한 익산 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사진출처: 오마이뉴스 (월간 마드모아젤 제공) 김민기는 두말하지 않고 서울을 떠났다. 그리고 이리(지금의 익산)로 갔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버지가 떠올랐다고 한다. 아버지의 묘도 그곳에 있었다.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지 말자. 가서 손톱에 피가 날 때까지 내 손으로 땅을 파서, 먹고 살자.’ 1978년 12월이었다. 이리로 간 그는 소작이라도 부쳐 먹을 땅이 마련될 때까지 형수의 친척 집에 머물렀다. 그렇게 1979년을 맞았다. 2월 박형규 목사가 인도하는 서울제일교회에서 채희완 선배가 이끌던 마당극 단체 ‘한두레’의 기획과 안무로 을 공연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지었던 작품이라 직접 관람하고 싶었다. 서울 중구 오장동 서울제일교회로 갔다. 교회 주변엔 이미 사복 경찰이 깔려 있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김민기는 그로부터 1년 가까이, 해송어린이집 설립 기금 마련 콘서트를 기획하고 공연할 때까지 서울 발길을 끊었다.곽병찬 언론인 chankb19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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