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북몰이 내면화·사법부 맹신이 부른 진보의 자해 [뉴스] 한국 사회에서 진보적인 사회 운동은 언제나 국가 권력의 억압과 보수 언론의 공격 위에서 위태롭게 걸어왔다. 그런데 외부적 탄압보다 더 큰 상처는 진보적 사회 운동의 내부 구성원들이 서로를 향해 겨누는 적대와 혐오의 칼날이다. 최근 벌어진 사건들은 이것을 가슴 아프고 참담하게 보여준다.
마녀사냥과 낙인찍기의 프레임을 진보적 활동가와 진보 언론이 스스로 받아들여 동지를 공격하는 도구로 삼을 때, 진보는 더 이상 대안 사회의 등불이 될 수 없다. 얼마 전의 두 가지 상징적인 사건을 통해, 우리 안에 깊숙이 내면화된 종북몰이의 심리학과 사법 숭배주의의 문제점을 파헤치고자 하는 이유다.
최근 민주노총과 진보당 등에서 오랜 세월 활동하다가 지병을 얻고 결국 세상을 떠난 활동가가 있었는데, 그녀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 풍경은 잔인함을 넘어 참담함을 안겨주었다. 평생을 노동운동의 현장에서 헌신해 온 고인에 대해 동료들이 주체의 혁명가 라며 추모하는 글을 올리자, 일부 ‘진보 활동가’들은 곧바로 엄청난 적개심과 혐오, 분노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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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령에 따라 구성된 지하당의 산하 조직에서 활동했던 사람 이라고 주검에 돌을 던지면서, 이런 사람들이 하루빨리 우리 사회에서 소멸하길 바란다 라는 극단적인 언사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단지 갑작스러운 돌출 행동만이 아니었다. SNS상에서 간혹 볼 수 있던 이런 멘탈리티는 주로 ‘평등파’ 계열 일부 활동가나 자유주의 지식인들에게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몇몇 있는데 가끔 그들의 글과 동조하는 이들을 보게 되면 서글프고 안타깝기만 하다. 이들이 뿜어내는 혐오와 저주에서 벗어나고 한국 사회의 지독한 낙인 구조를 피하기 위한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밟기’를 먼저 하자면 나는 자주파 출신도 아니고 북한 체제를 지지하지도 않는다.
북한식의 관료주의적 사회는 내가 지향하는 진보적 가치와 어긋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인을 비롯한 자주파 활동가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려는 이데올로기적 공세, 즉 자주파 활동가들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간첩과 같고 남한 체제의 반역자들이기에 용납할 수 없다 는 프레임에는 조금도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이 심각한 오류인 이유는 구체적인 사회적·물질적 토대나 역사적 조건들을 삭제한 채, 오직 이데올로기적 껍데기만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전광훈 교회나 민중신학이나 같은 기독교 라고 하는 것처럼 틀렸다. 진보적 사회 운동의 일부인 자주파 와 북한의 지배권력을 단순 동일시하는 것은 지독한 지적 게으름이거나 의도적인 왜곡이다.
예컨대 1930년대 소련에서 공산당은 권력을 쥐고 대중을 억압하는 지배 집단이었지만, 미국에서 공산당은 권력에 탄압받으며 연좌파업을 함께 건설한 노동운동의 일부였다. 같은 사상적 흔적을 가졌을지라도, 그것이 발 딛고 있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억압의 구도에 따라 그 운동의 성격은 완전히 달라진다.
한국의 자주파 활동가들은 분단 체제 하에서 국가보안법이라는 대표적 국가 폭력에 맞서며 기득권 체제와 권력에 저항해 온 진보적 사회 운동의 중요한 일부다. 그들의 노선에 동의하지 않는 점이 있을지언정, 그들을 반동적 집단으로 치부하며 ‘소멸’을 외치는 것은 국가 권력의 안보 논리를 고스란히 복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위 현장에 등장한 대진연 단속반 [연합뉴스]
더구나 이런 분파적 활동가나 자유주의자들은 다른 사상적 지향에 대해서는 또다른 잣대를 들이댄다. 그들은 소련식 사회주의 지지자를 볼셰비키적 투사 , 중국식 사회주의 지지자를 인민의 붉은별 , 북유럽식 사민주의 지지자를 복지국가의 개혁가 , 미국식 자본주의의 지지자를 자유사회의 수호자 라고 추모할 때는 이처럼 반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특수한 분단과 냉전 구도 속에서 이들은 이성을 잃는다. 북한식 사회주의에 우호적이던 사람을 주체의 혁명가 라고 추모하는 것에는 혐오와 적개심을 감추지 않으며 주검에 침까지 뱉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이 평소에 지지한다고 말하던 사상의 자유 , 다른 의견의 존중과 공존 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마저 내던져 버린다.
여기에는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반공주의, 내면화된 종북몰이와 마녀사냥, 주로 친북좌파를 겨냥한 국가의 탄압과 갈라치기, 자주파와 평등파의 오랜 갈등과 분열 속에 생긴 상처, 노선 차이를 딱지붙이기와 적대의식으로 발전시키는 운동사회의 잘못된 문화 등 복잡한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그것은 일부 이해할 만하지만, 결코 동의할 수 없고 매우 위험하다.
서구의 일부 신좌파가 반스탈린주의라는 도그마에 매몰된 나머지 선을 넘어 반공 냉전 전사로 변신하고, 이란과 이라크의 독재정권을 반대한다면서 미 제국주의의 침략과 정권 교체를 지지하게 된 배경에도 이런 멘탈리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도 이런 심리는 저 사람들이 사라지면 우리가 진보 운동을 대표할 수 있다 는 잘못된 믿음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국가 권력에 의한 간첩 조작과 종북몰이가 벌어질 때 마녀사냥의 응원부대가 되어서 같이 돌을 던지거나, 심지어 극우보수 세력으로 강을 건너 가면서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구실이 되기도 했다. 이번에도 조선일보는 기다렸다는 듯이 이런 논란을 낚아채어 고인, 민주노총, 노동부 장관을 한꺼번에 종북몰이하는 1타 3피 기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진보적 사회 운동 내부의 삐뚤어진 문화는 진보적 학생 운동 조직인 한국대학생진보연합 (대진연)에 대한 광기 어린 마녀사냥 속에서도 나타났다. 최근 윤어게인 극우가 주도하고 있는 잠실 개표소 봉쇄 시위 현장에서는 수많은 이들이 대진연 빨갱이 나가 라고 구호를 외치는 장면이 연출됐다.
뉴스타파 방송 화면 갈무리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극우 세력은 대진연을 낙인찍고 악마화하며 적개심을 부추겨 왔고, 실제로 노상원 수첩 에도 대진연은 내란시 체포 살해할 수거 대상 으로 올라 있었다. 그런데 더 안타깝고 서글픈 일은, 이러한 극우적 공세와 대진연 몰이 속에서 진보 매체들이 침묵하거나 일부 진보 매체는 도리어 마녀사냥꾼들에게 돌멩이를 보태 주었다는 점이다.
곽우신 기자의 음료 테러 에 사과한 개혁신당과 비교되는, 어떤 진보의 종말 기사가 대표적이었는데, 여기서 기자는 대진연 간부가 7년 전에 정의당 윤소하 의원에게 흉기와 동물 사체를 담아서 민주당 2중대 노릇 그만하라 는 협박 편지를 보낸 것을 명백한 사실로 단정하고, 보수보다 타락 한 구태 NL 활동가의 도덕적 파탄 을 맹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이 진보일 리 없다. 진보일 수 없다 고 단언한다. 그 근거는 사법부의 2심과 대법원 판결이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대진연이 한국 사회에서 악마화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물론 대진연이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저지른 것으로 지목된 사건의 알리바이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마녀사냥의 피해자는 언제나 옳고 선하다 는 기계적인 입장은 지지받기 어렵다. 중요한 것은 사건의 실체이고, 우리가 어떤 사건의 실체를 판단하려면 엇갈리는 양측의 주장과 어떤 주장이 논리와 증거로 충분히 뒷받침되는지를 철저히 살필 수밖에 없다. 법적인 판단은 하나의 참고 기준은 될 수 있지만 절대적일 수 없다.
특히나 온갖 조작 사건을 뒷받침해준 한국 사법부의 부끄러운 역사 때문에라도 판결문을 성경처럼 떠받드는 태도는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곽우신 기자의 기사를 접하고 이 사건에 대한 의구심들을 뒤집을 새로운 명확한 근거와 엄밀한 논리가 제시될 것인지 나름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그저 사법부 판단에 대한 해설과 반복뿐이다.
법원이 유죄라 했으니 유죄라는 순환논리 외에 기자가 새롭게 발로 뛰어 찾아낸 독자적인 진실 추구의 노력은 찾기 어려웠다. 따라서 이 기사는 이 사건에 대한 나의 의문을 해소하지 못했다. 7년 전에 이 사건을 처음 접할 때부터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대진연 간부의 범행 동기와 목적이었다. 합리적 행위자라면 어떤 행동을 할 때 맥락과 목적, 이익이 있어야 한다.
당시 정의당 윤소하 의원은 민주당을 비판하며 독자 노선을 걷고 있었고, 대진연은 민주당 정권의 대북 정책 등에 비판적 지지를 보내며 오히려 운동사회에서 민주당 2중대 라고 비판받던 처지였다. 그런데 그 대진연이 오히려 민주당과 거리를 두는 정의당 의원에게 극우를 가장해 민주당 2중대 하지마라 고 협박하는 편지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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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기, 맥락, 이것을 통해 얻을 이익이 어느 하나도 설명되지 않았다. 만약 그 대진연 간부가 정치적 목적에 따라 합목적적 행위와 판단을 내리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골탕 먹이고 싶어하는 이상 성격의 변태적 장난꾸러기라면 그런 쇼를 했을 가능성도 생길 수 있다. 하지만 한총련 의장까지 지냈던 활동가가 그런 자해 공갈에 가까운 행위를 했다는 것은 상식을 벗어났다.
백번 양보해서 동기가 불명확하더라도 물증이 압도적이라면 유죄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적어도 교통카드 이동 기록, 휴대폰 위치추적 등의 물적 증거를 통해 그 간부가 어디서 어떻게 그것을 보냈다는 것 등이 완벽히 입증돼야 한다. 그런데 당시 검경은 그것에 실패했다. 협박 편지와 상자에서 나온 지문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사건 당시 택배를 접수하는 CCTV에 찍힌 사람의 체격과 외모를 보고 경찰은 최초에 50대 남성 이라고 했다. 하지만 대진연 간부는 30대 청년이었다. 나중에 경찰은 말을 바꾸었지만, 국과수는 CCTV 속 인물이 피의자와 동일인인지 알 수 없다 는 조사 결과를 냈다. 본인도 수사 단계부터 지금까지 한사코 범행을 부정하고 있다.
나머지 간접적 물증들도 위법적으로 수집됐을 뿐 아니라 결정적이지 못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7년 전 언론의 요란한 피의사실 유포와 몰아가기 속에서도 1심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형사재판의 대원칙인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가 적용된 결과였다. 7년 만에 난데없이 다시 시작된 2심과 대법원에서 이것을 뒤집는 새로운 결정적 증거는 없었다.
똑같은 사실들에 대한 법원의 해석과 판단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아무리 윤석열 내란에 동조한 조희대 사법부라도 타당한 논리와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판결했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수긍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 사건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판단을 바꿀 합리적 근거를 찾기가 어렵다.
우리는 사안을 바라볼 때 국가기구의 권위를 맹신해서도, 진영 논리에 눈이 멀어서도 안 된다. 사법부가 판결했으니 무조건 옳다도, 무조건 틀렸다도 아니어야 한다. 대진연 간부가 했으니 무조건 잘못했을 것이라는 판단도, 무조건 잘했을 것이라는 판단도 아니어야 한다. 철저하게 사실과 증거, 그리고 그것이 부합하는 합리적 추정 위에 서야 한다.
하지만 곽우신 기자의 글을 보면 사법부가 판결했으니 옳다 는 기준과 구태 NL 활동가가 아무튼 잘못했을 것 이라는 편견이 더 깊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지금 잠실에서 벌어지는 대진연 낙인찍기와 색출의 마녀사냥을 못본척하면서 오히려 대진연은 이준석당보다 못하고 진보도 아니다 라며 같이 돌을 던지게 만드는 것 아닐까?
진보 내부의 정파적 차이와 노선 갈등은 치열한 토론과 논쟁으로 풀어야 할 문제다. 국가 기구의 칼날을 빌리거나 안보 논리를 가져와 동지에게 함께 돌을 던지는 시도는 진보적 사회 운동의 역사에서 늘 쓰디쓴 결과만 낳았다. 헌신 끝에 세상을 떠난 사람의 주검 앞에 침을 뱉는 진보 활동가나 학생 운동 단체에 돌을 던지는 진보 언론 기자는 같은 맹점을 공유한다.
이들은 자신들이 믿는 ‘진보의 순결성’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마녀사냥 흐름에 맞서지 않고 그냥 올라타거나 팔짱끼고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파적 선 긋기가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되, 억압 앞에서는 어깨를 거는 ‘연대의 감각’이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마녀사냥의 칼날 앞에 방치하고 함께 돌을 던진다면, 다음 차례는 바로 내가 될 수 있다.전지윤 사회운동가·연구평론가 misotoleni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