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속 나의 소원 은 누가 쓴 글인가 [사람들] 1. 백범은 문화국가론을 펼칠 사상가가 아니다?
치하포 의거가 백범 김구의 삶을 바꾸어 놓은 출발점이었다면, 「나의 소원」은 그의 사상과 삶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리즈 ⑥에서 살펴본 치하포 의거는 일제의 침략에 맞서 평생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한 알파였습니다. 그렇다면 『백범일지』의 마지막에 실린 「나의 소원」은 평생의 투쟁과 사색을 마무리하며 조국과 민족에게 남긴 오메가라 할 수 있습니다.
백범은 이 글을 통해 긴 투쟁을 이어온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담담하게 고백합니다. 칠십 평생을 독립이 없는 나라의 백성으로 서러움과 부끄러움과 애타는 마음을 가졌던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은 완전하게 자주독립한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보다가 죽는 일이다. 나는 일찍이 우리 독립 정부의 문지기가 되기를 원하였는데, 그것은 우리나라가 독립국만 된다면 나는 그 나라에서 가장 미천한 자가 되어도 좋다는 뜻이다.”
1947년 12월 『백범일지』가 국사원에서 처음 출판될 때 이 글은 책의 마지막에 실렸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가장 널리 읽히는 김구의 글이 되었습니다. 특히 다음 대목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가 비전 가운데 하나로 손꼽힙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백범은 군사력으로 세계를 제압하는 강국도, 경제력만 앞세우는 부국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문화와 인의(仁義)로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하는 나라를 이상으로 제시했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정치인과 교육자들이 이 대목을 인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사진 1)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1945년 11월 3일 중경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임정 요인들. 현관 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환국기념’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그 아래 두 개의 태극기가 펼쳐져 있다. 1919년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26년간의 망명 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음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순간이다.
사진 2) 사진 1의 인물 위치를 설명한 사진.
그런데 이처럼 널리 알려진 「나의 소원」이 백범이 직접 쓴 글인가를 둘러싸고 몇 년 전부터 논란이 제기되었습니다. 일부 연구자와 필자들은 「나의 소원」이 단순히 이광수의 윤문을 거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광수가 창작하거나 대필한 글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나아가 백범은 행동하는 독립운동가였을 뿐 세계와 인류를 이야기하는 문화국가론을 펼칠 만큼의 사상가는 아니었다”고까지 말했습니다.
비판자들의 논리는 대체로 비슷합니다. 「나의 소원」의 원고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진짜 저자를 확인할 수 없으며, 글의 수준과 문체로 보아 이광수가 새롭게 썼거나 대폭 손질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광수 창작설’, ‘대필설’, ‘가필설’이 잇달아 제기되었습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나의 소원」은 백범 사상의 결정체가 아니라, 이광수의 문장으로 포장된 작품이 됩니다. 더 나아가 오늘날 우리가 백범의 국가 비전이라고 믿어온 문화국가론 자체도 다시 평가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과연 그럴까요. 「나의 소원」은 정말 이광수가 대신 써 준 글일까요? 아니면 평생 독립운동과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백범 자신의 사상과 문장이 응축된 결실일까요? 최근 새롭게 확인된 자료는 이 논쟁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2. 「나의 소원」 원본이 존재한다
위 필자들의 「나의 소원」 대필설이 설득력을 얻었던 가장 큰 이유는 원본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구가 직접 쓴 초고가 남아 있지 않으니, 이광수가 윤문을 넘어 상당 부분 새로 썼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여러 갈래로 뻗어나갔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 논쟁의 전제가 흔들리는 자료가 확인되었습니다. 황태연 동국대 명예 교수는 2026년 2월 고서를 조사하던 중 엄항섭이 1948년 10월 간행한 『김구 주석 최근 언론집』 부록에서 「나의 소원」 원본을 확인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신간 『김구의 치하포 의거와 문화강국비전』(솔과학)에서 려중동, 김원모, 방민호, 김상구, 도진순, 정병진, 조형근 등의 주장을 검토한 뒤, 어느 것도 학술적 논변이 갖추어야 할 경험과학적 엄정성을 갖추지 못했고, 심각한 오류를 안고 있다”고 정면으로 공격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장이자 평생 김구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좌했던 엄항섭은 1948년 10월 『김구 주석 최근 언론집』을 간행하면서 부록에 「나의 소원」을 함께 실었습니다. 이 글은 1947년 12월 국사원판 『백범일지』에 실린 「나의 소원」과 같은 내용이지만, 자세히 대조해 보면 여덟 곳에서 차이가 납니다. 차이는 오기(誤記)를 바로잡거나, 일부 문장을 누락하거나, 표기법과 문단을 정리한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엄항섭은 왜 이미 『백범일지』가 널리 판매되고 있는데도 다시 「나의 소원」을 따로 실었을까요. 황 교수는 엄항섭이 국사원판에 만족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구가 남긴 원래의 글을 후세에 보존하려 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미 출판된 글을 불과 열 달 만에 다시 실은 것은, 단순한 중복 출판이라기보다 원문을 남기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증거는 김구 그의 마음 속에 들어 있습니다. 1949년 『대조』 3·4월호에 발표한 「마음속의 38선이 무너져야―민족통일의 재구상」에서 백범은 「나의 소원」의 약 3분의 1을 다시 인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일부 표현이 빠진 국사원판이 아니라, 엄항섭이 보존한 판본과 일치합니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글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민족통일에 관한 나의 신념이나 주장은 과거에나 현재에나 미래에나 죽는 날까지 변함이 없다.” 이 말은 단순한 서문이 아닙니다. 백범은 자신의 ‘변하지 않는 신념’을 밝힌 뒤, 그 신념을 설명하는 글로 「나의 소원」을 다시 실었습니다. 만일 「나의 소원」이 이광수가 대신 써 준 글이었다면, 김구가 이를 자신의 불변의 신념이라며 다시 인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대목은 「나의 소원」을 둘러싼 논쟁에서 가장 무게 있는 증거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본의 존재와 김구 자신의 재인용은, 이 글이 백범의 사상과 문장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하나의 의문이 남습니다. 일부에서는 「나의 소원」과 이광수의 「내 나라」가 내용상 매우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이광수가 원작자일 가능성을 제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발표 시기를 따져 보면 순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나의 소원」이 먼저 세상에 나왔고, 「내 나라」는 그 뒤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황 교수는 이렇게 분석합니다. 「나의 소원」이 「내 나라」를 빌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광수가 「나의 소원」의 영향을 받아 「내 나라」를 집필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해석이 옳다면, 그동안 제기되어 온 ‘대필설’은 설 자리를 잃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연구와 해석은 앞으로도 학계의 검증을 계속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확인된 자료만 놓고 보면, 「나의 소원」을 이광수의 창작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제 관심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누가 썼는가’보다 ‘김구가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가’입니다. 문화국가와 세계평화, 인류 공동체를 이야기한 김구의 사상이 1947년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었을까요. 아니면 오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경험 속에서 오랫동안 다듬어 온 백범의 일관된 철학이었을까요.
3. 「나의 소원」은 오랜 경륜의 소산이다
만일 「나의 소원」에서 드러난 문화국가론과 세계평화 사상이 1947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라면 대필 논란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각이 이미 오래전부터 백범의 연설과 논설 속에 일관되게 나타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나의 소원」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한 명문장이 아니라, 평생의 사색과 실천이 응축된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흔적은 임시정부 시절부터 확인됩니다. 1940년 3월 1일 발표한 「한국독립과 동아평화」에서 백범은 독립운동의 목적을 단지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에만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아시아와 세계가 어떤 질서 위에 서야 하는가를 함께 고민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동방문화는 서구에 비하여 우세한데, 그 원인은 도의관념이 공리주의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강자가 약자를 돕고, 불의를 보면 용기를 내어 바로잡는 것이 인류가 지켜야 할 기본 원리”라고 설명합니다. 힘으로 남을 지배하거나 다른 나라의 위기를 기회로 삼는 제국주의는 결국 문명이 아니라 야만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은 「나의 소원」에서 말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의 철학과 정확하게 이어집니다. 백범이 꿈꾼 문화국가는 국력이 약한 나라를 뜻한 것이 아니라, 힘보다 도덕을 앞세우는 나라였습니다. 같은 해 8월 발표한 「한국독립당의 건립과 광복운동의 장래」에서는 그 생각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글에서 백범은 한국독립당이 추구하는 목표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하며, 나아가 세계가 한 집안이 되는 노선을 향하여 나가는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세계가 한 집안이 된다’는 표현은 「나의 소원」에서 말한 인류 공동체의 이상과 같은 맥락입니다. 다시 말해 문화국가론은 1947년에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상이 아니라, 이미 임시정부 시절부터 일관되게 발전해 온 백범의 국가철학이었습니다.
백범의 민주주의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같은 글에서 한국 공산주의자들이 일제에 맞서 싸운 점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대한민국이 지향해야 할 체제는 계급 독재가 아니라 전민평등(全民平等) 의 민주국가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우리는 전민평등의 정치를 열렬히 환영할 것이다.”
이 글에는 백범이 꿈꾸었던 나라의 방향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어느 한 계급이나 특정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는 국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정치와 경제, 교육의 기회가 국민 모두에게 고르게 열려 있는 민주공동체를 꿈꾸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일각에서 제기하는 ‘용공주의자 김구’라는 평가는 그의 글과는 거리가 멉니다. 백범이 좌우합작을 추진한 이유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분단을 막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정치적 선택이었습니다. 그의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족의 자주를 함께 지향하는 민주주의였습니다.
광복 후 귀국한 백범은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구체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1945년 12월 중앙방송을 통해 발표한 「독립자주통일의 조국을 건설합시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기초로 한 새로운 민주국가를 건설합시다.”
이 연설은 민주주의를 단순히 선거 제도로 이해하지 않았다는 점이 눈에 띕니다. ‘정치적 자유뿐 아니라 경제와 교육의 기회까지 함께 보장되는 사회’, 그것이 백범이 말한 민주국가였습니다. 이처럼 1940년의 동아평화론, 한국독립당의 건국이념, 1945년의 민주국가론은 서로 따로 존재하는 글이 아닙니다. 하나의 사상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조금씩 성숙해 가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그 사상의 결실이 바로 1947년 「나의 소원」이었습니다.
사진 3) 해방 후 조국에 돌아오기 위해 중경을 출발해 1945년 11월 5일 상해 장완비행장에 도착한 김구 주석(중앙)을 비롯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환영나온 상해 교민, 광복군 및 중국측 인사들. 임정 1진은 상해에서 18일간 머물다가 11월 23일 미군 수송기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사진 왼쪽은 김규식 부주석, 오른쪽에서 눈물을 닦는 이는 이시영이다. 앞줄 가운데 태극기를 든 남아는 이종찬(현 광복회장).
4. 세월이 흐를수록 돋보이는 문화 국가비전
1947년 「나의 소원」은 백범이 평생 품어 온 국가 비전의 완성판이었습니다. 그는 강한 나라보다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여기서 ‘아름답다’는 말은 단순한 감성적 표현이 아닙니다. 군사력과 경제력만으로 평가되는 국가가 아니라, 문화와 도덕으로 세계의 존경을 받는 나라를 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이 한 문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줍니다. 백범은 우리 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우리의 부(富)는 국민의 삶을 넉넉하게 할 만큼이면 족하고, 우리의 힘은 침략을 막을 만큼이면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힘을 과시하기보다 평화를 지키는 힘, 그것이 백범이 말한 국력이었습니다.
그가 말한 문화는 국민의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존중하고, 공동체가 조화를 이루며, 정의와 양심이 사회를 움직이는 상태, 그것이 백범이 꿈꾼 문화국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의 소원」에서 문화국가를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여러 가지 나무가 어울려서 위대한 삼림을 이루고, 백 가지 꽃이 함께 피어 봄들의 풍성한 경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보다 더 아름답게 문화의 다양성과 조화를 표현한 문장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백범이 생각한 문화국가는 획일적인 국가가 아니라,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공동체였습니다.
그 철학의 바탕에는 동양의 오래된 이상인 ‘대동’(大同) 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대동’이란 사리사욕을 버리고 공공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천하위공(天下爲公)의 경지를 뜻합니다. 강자가 약자를 돕고, 약자가 강자에게 협력하는 상생의 협화(協和) 속에서 사랑과 정의를 구현하는 인의(仁義)의 대동(大同) 세계가 열립니다. 이는 공자 학파의 후학들이 편찬한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연원을 둔 말입니다. 백범의 사상적 고민은 바로 이 지점에 닿아 있었고, 그 고뇌의 결실이 바로 「나의 소원」입니다. 백범의 문화국가에서 문화의 주체는 개인과 대소(大小)의 연대적 공동체였습니다.
식민지 시기 민족을 폄하하고 일본 제국에 협력했던 이광수의 사상과, 인의와 대동을 바탕으로 문화국가를 꿈꾸었던 백범의 철학은 출발점부터 다릅니다. 이광수는 1921년 상해 임정을 등지고 일제와의 타협 속에서 귀국해 일제 치하에서 생존하기 위해 민족성을 근본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한 자학적 민족개조론(1922)자입니다. 더 나아가 그는 「젊은 조선인의 소원」(1928)에서 현재의 조선인은 모래알처럼 흩어진 개인들이 무슨 한 원리로 조직되고 통일된 민족은 아니다”라고 썼습니다.
천하를 대도(大道)로 움직이는 공공의 세계로 바라본 백범의 대동 철학과 달리, 이광수는 문화를 왕조나 군국주의의 사유물로 인식한 ‘소강(小康)’의 담론에 갇힌 지식인이었습니다. 이렇게 대척되는 생각을 지닌 사람이 문체를 다듬을 수는 있어도, 사상의 뿌리까지 대신 만들어 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나의 소원」을 이광수의 창작으로 보는 주장은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백범은 끝내 완전한 자주독립과 통일조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분단을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이다가 흉탄에 쓰러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이 모두 좌절된 것은 아닙니다. 오늘의 대한민국은 세계가 주목하는 경제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 역시 국제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K-컬처는 음악과 영화, 드라마, 문학을 통해 세계인의 공감을 얻으며 문화의 힘이 국경을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물론 아직도 백범의 소원은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남과 북은 여전히 갈라져 있고, 우리 사회 안에도 갈등과 분열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향한 그의 꿈은 지금도 우리에게 국가가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하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나의 소원」은 단순한 글이 아닙니다. 우리 역사 최고의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가 평생에 걸쳐 써 내려간 삶의 결론이며, 오늘도 대한민국이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지를 묻는 살아 있는 국가 비전입니다. 임순만 언론인 ysm@mindl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