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도나 폭탄선언과 메시 한 달 버티기 힘든 국민들 [뉴스] 아르헨티나가 경기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마라도나와 메시 펼침막. AFP 연합뉴스 자료사진
1986년 멕시코월드컵 우승을 이끌고 귀국한 디에고 마라도나는 귀국 기자회견에서 마리오 켐페스 등과 함께 74일간 이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자국이 허망하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때까지 많은 이가 갈티에리 군사독재 정권의 거짓 선전에 속아 영국군과 싸워 이겼다 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갈티에리는 실각했고, 그 뒤 여러 차례 대통령이 바뀌는 진통 끝에 레이날도 비그노네를 끝으로 아르헨티나에 군정이 종식됐다.
축구의 신 리오넬 메시가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월드컵 준결승에서 잉글랜드에 2-1 역전승을 거둔 직후 모국의 어려운 경제 현실을 언급한 것은 마라도나 등의 폭탄 선언을 약간은 닮아 보인다. 물론 아르헨티나 정부는 발끈하고 공개 반박에 나섰다.
메시는 지난 15일(현지시간) 결승 진출을 확정한 뒤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상황이 어렵거나 일자리가 없고, 월급으로 월말까지 한 달을 버티기 힘든 (No llega a fin de mes)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며 비록 잠시 동안일지라도 이런 기쁨을 국민들께 선물할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며 이것이 우리 대표단을 매우 행복하게 만든다 고 말했다. 월말까지 한 달을 버티기 힘든 이란 표현은 아르헨티나 보통사람들이 먹고 살기 힘들다는 것을 비유할 때 흔히 쓰이는 관용구라고 한다.
그는 이번 잉글랜드전 승리는 단순한 한 번의 승리가 아니라 아르헨티나 모든 국민이 간절히 원했던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며 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부터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고 소감을 밝혔다. 준결승 킥오프 직전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자국 국가를 목놓아 함께 부르는 모습으로도 눈길을 끌었다.
메시는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최고의 모습을 보여왔고, 오늘도 그 누구도 우리에게 아무것도 거저 주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며 우리가 이뤄낸 모든 것은 경기장에서 스스로 싸워 얻어낸 결과 라고 강조했다.
메시의 경제난 언급은 오랜 기간 물가 상승 및 경기 침체 속에서 생활고를 겪는 아르헨티나 국민의 현실을 지적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큰 관심을 모았다. 그는 2021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과 2022년 카타르월드컵 우승 직후에도 경제난을 겪는 국민에게 기쁨과 위로를 전할 수 있어 뜻깊다는 취지의 소감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이 발언은 세 자릿수에 달했던 물가상승률을 두 자릿수로 낮추며 경제 개혁이 성과를 내고 있다고 자평하는 하비에르 밀레이 정부의 인식과 배치되면서 정치적 논란으로 번졌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실 아드리안 라비에르 대변인은 17일 인터뷰에서 정부는 국민들이 월급으로 한 달을 버티기 힘들다는 진단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 공개적으로 반박에 나섰다. 이어 제2의 트럼프란 힐난을 들어 온 밀레이 대통령은 라디오 인터뷰에서 메시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축구 선수들이 경제를 얼마나 아느냐 는 취지의 발언을 하면서 또 다른 논란을 낳았다.
밀레이 정부는 2023년 12월 출범 이후 강도 높은 긴축 정책을 추진해 연간 세 자릿수였던 물가상승률을 최근 연간 30% 안팎까지 낮췄고, 지난해 경제성장률 4.4%를 기록하는 등 거시경제 지표에서는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다만, 낮은 실질임금에 소비 위축이 이어지면서 서민이 체감하는 경제 상황은 여전히 어렵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아르헨티나 국기로 장식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건물 [AFP 연합뉴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짚어볼 점이 있다. 마라도나가 활약하던 40년 전보다 경제난과 정치적 대립 등 하나도 나아진 것이 없고 악화만 된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왜 월드컵만 되면 온 국민이 하나로 결집하는 것일까.
아르헨티나 매체 암비토는 18일(현지시간)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의 분석을 통해 대표팀이 스포츠를 넘어 국가 정체성과 집단 기억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고 진단했다. 국립과학기술연구위원회(CONICET)의 사회학자 옥타비오 스타키올라는 대표팀을 정치·경제적 갈등으로 분열된 사회를 이어주는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월드컵 기간 대표팀은 공유된 우리 를 만들어내는 몇 안 되는 공간 이라며 축구는 아르헨티나인들이 국가 정체성을 상상하고 표현하는 핵심 언어 라고 말했다.
대표팀에 대한 열정은 특정 정부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정치적 입장과도 별개의 문제라고 그는 강조했다. 스타키올라는 정부를 강하게 비판하는 사람도 대표팀을 향해서는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다 며 대표팀은 정치 제도가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을 상징한다 고 분석했다.
그는 또 국가적 위기가 오히려 이런 결속을 더욱 강하게 한다고 봤다. 축구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기쁨과 자부심을 경험할 수 있는 집단적 공간을 만들어 준다 는 것이다. 심리학자 이그나시오 수아레스는 대표팀을 향한 애착이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는 학습된 정체성 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표팀은 단순한 축구팀이 아니라 공유된 역사의 상징 이라며 사람들은 어린 시절부터 무엇을 자랑스러워하고 어떤 순간을 함께 기억해야 하는지를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고 말했다. 경제위기와 사회적 갈등이 심할수록 이러한 심리가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어 90분 동안 수백만 명이 자신보다 더 큰 공동체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한다 며 이러한 공유된 감정은 다른 어떤 사회적 활동보다 강한 소속감을 만들어낸다 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대표팀이 국민적 상징으로 자리 잡는 과정에는 역사적 경험도 큰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잉글랜드를 상대로 활약한 마라도나는 말비나스(포클랜드) 전쟁 이후 국민감정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반면 메시는 대표팀 선수로서 오랜 실패와 좌절을 극복한 끝에 2022년 카타르월드컵 우승을 이끌며 인내와 회복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스타키올라는 잉글랜드전처럼 특정 경기는 역사적 기억을 다시 불러내는 역할을 한다 며 축구는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단순한 스포츠가 아니라 역사와 기억을 재확인하는 무대 라고 말했다.
모두가 10번, 리오넬 메시의 반려 팬들. AP 연합뉴스
이번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보여준 잇따른 역전승도 국민적 결속을 더욱 강화한 요인으로 꼽힌다. 수아레스는 한 팀이 반복적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경험하면 집단적 신뢰가 형성된다 며 신뢰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 경험이 축적되면서 학습되는 결과 라고 했다.
아르헨티나는 2014년 월드컵과 2015·2016년 코파 아메리카 결승에서 잇따라 좌절했지만 이후 코파 아메리카와 피날리시마, 카타르 월드컵 우승을 차례로 일궈내며 황금기를 열었다. 전문가들은 이런 회복의 역사가 현재 대표팀을 향한 국민적 신뢰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는 20일 오전 4시(한국시간) 미국 뉴저지주의 뉴욕/뉴저지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 월드컵 2연패와 함께 통산 네 번째 우승에 도전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펠리페 6세 스페인 국왕과 페드로 산체스 총리가 직접 경기장을 찾아 직관할 예정이다. 반면 밀레이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직접 관전하면 대표팀이 패배한다는 징크스를 의식하고, 이번 대회 자신이 관저에서 지켜본 덕에 대표팀이 결승에까지 올랐다며 관저에서 자신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찔러준 기업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응원한다.
트럼프 대통령이 고집을 부려 월드컵 결승전 사상 최초로 결승에 진출하지도 않은 개최국 미국의 국가가 연주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다. 미국 프로 스포츠 관례를 좇아 월드컵 결승전에 하프타임 쇼가 펼쳐진다. 방탄소년단(BTS)이 마돈나, 샤키라, 저스틴 비버와 나란히 무대에 설 예정이라 한국인들로선 놓치기 어려운 장면일 것 같다.
미국 프로 스포츠를 따라 월드컵 우승 반지가 주어진다. 결승 직후 임시 반지를 나눠주고 우승팀의 국가 정체성을 좇아 맞춤 제작해 나중에 진짜를 건네고 2026개를 만들어 나머지 반지는 판매한다. 개당 우리 돈으로 2억 원이 넘는 값에 판매할 계획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아르헨티나에 결승행을 양보한 잉글랜드의 토머스 투헬 감독이 왜 해리 케인 같은 골잡이를 수비 위치로까지 끌어내리는 지휘를 했느냐고 타박해 오만가지 일에 끼어든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임병선 에디터 byeongseon1610@mindl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