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죽음? 지금 당장 살아가는 게 중요하지 않아?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굶어 죽지 않는다는 보장과 지루해서 죽는다는 확신을 맞바꾸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1968년 프랑스 68혁명 때 나왔던 슬로건이다. 국내에서 별다른 예고 없이 불쑥 개봉된 듯한 모양새의 영화 을 보고 있으면 기이하게도 오래전 시위 때 나왔던 문구가 겹친다.
그렇다고 이 그런 정치성을 지닌 영화인가, 하면 겉으로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일종의 멜로물이고 최루성 순애보 영화이다. 더 정확하게는 주인공 여성의 난소암 투쟁기이다.
서른네 살의 알무트(플로렌스 퓨)는 막 이혼한 남자 토비아스(앤드류 가필드)와 만나 열애에 빠지지만, 곧 암에 걸린 것을 알게 된다. 영화는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 함께 병을 극복하려는, 극히 상투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마치 죽음과 진부함을 맞바꾸지 않겠다는 ‘68의 태도’같은 것이 느껴질 만큼 형식과 내용에 많은 노선변경을 시도한 작품이다.
각본을 닉 페인이 썼다. 영국은 영화보다 연극의 ‘문화 지배력’이 더 높은 나라이고 닉 페인은 현재 연극계의 젊은 스타로 주목받고 있는 인물이다. 앤드류 가필드(), 플로렌스 퓨( 시리즈 등) 등 글로벌 스타들이 선뜻 이 영화를 선택한 것은 닉 페인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화장실에서 딸아이를 낳은 난소암 환자의 행복
영화의 특이성은 무엇보다 제목에서 나온다. 제목 ‘위 리브 인 타임’은 직역하면 ‘우리는 시간 속에 산다, 혹은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일 것이다. 그러나 이건 ‘시간’의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따라 의미 부여가 달라지는 것이다. 단순히 ‘현재를 살아가라’라는 메시지를 넘어서 어떤 관계의 측면에서는 ‘시간 속에서 함께 한 기억을 안고 살거나 죽어간다’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알무트는 연인인 토비아스(둘은 끝까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남는다)에게 절규하듯 이렇게 말한다. 내 딸이 엄마를 그냥 환자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는지 알아주길 원해!”
둘은 알무트가 투병에 집중하지 않는 문제로 격렬하게 싸운다. 아무리 사랑한다 한들, 늘 방법과 노선 문제가 둘을 부딪치게 만든다. 토비아스는 알무트가 1차 방사선 치료와 수술, 2차 방사선 치료에 주력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일은 무조건 쉬어야 한다. 그러나 알무트의 생각은 다르다. 이번이 2차 발병이다. 재발이다. 그녀는 이미 한차례 방사선 치료, 수술, 또 한 번의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그때 그녀는 자궁을 적출하고 난소와 난관을 다 들어내는 ‘안전한 수술’ 대신, 난소 하나만을 제거하고 임신 가능성을 열어두는 쪽을 택한다. 알무트는 원래 내 인생에 아이는 없다 주의자였지만 토비아스와 살면서, 그리고 난소암을 겪으면서, 아이를 가지려고 한다. 딸 아이 엘라는 그렇게 태어난다.
알무트가 엘라를 낳는 곳이 주유소에 딸린 편의점의 직원용 화장실이라는 것도 특이하다. 마치 아기 예수의 탄생처럼 가장 뜻하지 않은 곳에서 토비아스는 알무트의 몸으로부터 딸아이를 꺼낸다. 두 연인, 편의점 직원 둘 그리고 전화로 출산 과정을 코치해 준 응급차 요원 등 모두 기적 같은 행복을 느낀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이고, 가장 요란하며, 가장 행복한 장면이다.
아이는 알무트의 몸에서 간신히 나왔지만, 전화상의 구급요원은 토비아스에게 2차 진통을 준비하라고 한다. 아직 태반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 다음 컷은 알무트가 갓난아이를 안고 구급차를 타는 장면이다. 보는 사람들까지 실로, 고난 후의 안도감을 느낀다. 이 산고의 전 과정을 잘 찍었다. 그 디테일이 뛰어나다.
변화추구형 여성 셰프와 안정지향형 대기업 남자의 사랑
알무트 브뤼엘은 유명 셰프이다. 정통 알프스 요리를 현대 유럽식으로 재해석해 이른바 앵글로 바이에른 스타일의 퓨전 요리로 만드는 것이 알무트의 전공이다. 한 마디로 덩어리 고기 위주의 독일식 음식을 세련된 미식 요리로 바꾸는 것이다. 영화에서 알무트가 자주 선보이는 예술적인 플레이팅은 일반 관객들에게는 다소 과해 보일 정도이다.
자신의 레스토랑을 처음 방문한 토비아스에게 알무트가 대접한 음식은, 홀 매니저가 줄줄 외는 대사에 따르면, ‘레몬 머스터드 젤을 곁들인 초소형의 바이스부어스트’이다. 바이에른식 소시지다. 어쨌든 그냥 작은 소시지이다. 토비아스는 그녀에게만큼, 그녀의 요리에 반한다.
토비아스 듀랜드는 위타빅스의 IT팀에서 데이터 관리 책임자로 일한다. 위타빅스는 영국의 국민 시리얼 회사이다. 영국 국민 절반 이상이 아침에 이 시리얼을 먹는다. 1932년에 가족회사로 시작해 글로벌 다국적 기업이 됐다. 그럼에도 위타빅스는 여전히 가족 경영 방식을 앞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토비아스는 영화 초반에 회사 홍보 영상을 촬영한다. 저는 이 회사가 가족 같은 분위기여서 좋습니다.”라고 말한다. 토비아스는 안정적인 생활을 추구하고 알무트는 새로운 것을 찾아 늘 실험하는 캐릭터임을 보여 준다. 첫 장면에서 알무트는 집이 있는 도시 근교 써리(Surrey)의 오솔길을 달리면서 꽃과 나뭇잎 이것저것을 따온다. 그녀는 집에 돌아와 아침 요리로 ‘전나무 향 파르페’를 만든다. 알무트는 잠든 토비아스를 흔들어 깨워 한 숟가락 먹이려 한다. 자기 의견이 필요해.”
둘은 그런 관계다. 실험과 안정. 한 사람은 무언가를 하려고 하고 한 사람은 변화에 앞서 그 토대를 지키려 한다. 둘이 꾸리는 가정은 그렇게 다른 듯 같으며 같은 듯 다르다.
멸망 직전 세상에서 미래를 준비한다고?
영화 은 미래를 준비한다는 따위의 위선적 용어가 사라진 세대의 영화라는 느낌을 준다. 베이비부머 세대는 늘 앞일을 걱정하고 준비하며 살았다. 학교는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었고 직장은 결혼을 위한 것이었으며 결혼은 안정적인 가정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자녀 교육을 위해서는 가정의 안정이 우선이었고 적금과 보험을 들며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는 것이 지금 세대의 세계관으로 보인다. 세상은 환경오염으로 거의 다 파괴된 수준이 됐고 거듭된 전쟁으로 갑작스러운 대량 살상을 겪게 되었으며 타락한 정치와 양극화된 부의 편중은 사람들의 정신적 위화감과 상실감을 극대화했다. 세상은 부서지고 지구는 멸망 직전이다.
그러니 이런 상황에서 현재를 잘 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건 어쩌면 매우 자연스럽고 이치에 맞는 얘기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니까 ‘위 리브 인 타임!’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현재(의 관계) 속에서 (열심히 사랑하고 무언가를 이루려고 애쓰며) 살아가고 있다, 라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 이 궁극으로 말하고자 하는 얘기로 느껴진다.
영화의 주요 배경은 런던 도심이다. 이스트 런던으로 보인다. 알무트의 레스토랑은 런던에 있다. 둘이 사는 곳은 써리이다. 영국 중산층의 전형적인 생활 공간이다. 토비아스를 처음 만났을 때 알무트는 34살이었다. 이후 약 10년에 걸친 기간이 그려진다. 지금의 30~40대 곧 1980~90년대생들의 현재적 삶이 그려진다. M세대, 곧 밀레니얼 세대의 연애담이자 사랑관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인 셈이다.
이들은 동성과 이성간 사랑을 자유롭게 오가기도 한다. 알무트는 토비아스를 만나기 전 에이드리엔이라는 여성 동료와 진지한 관계였으며 그녀의 보조 셰프 제이드도 상당히 중성적이다. 그들의 사랑은 유연하다. 고리타분하지 않다. 현재가 과연 어떤 식으로 바뀔지 모르는데 진부할 시간이 없다는 주의이다. 현실이 붕괴하고 있는 상황에 미래를 준비한다는 건 어불성설의 일이다.
알무트가 난소암 3기임에도 불구하고 조수인 제이드와 함께 보퀴즈 도르(Bocuse d Or)에 나가려고 맹훈련하는 이유이다. 보퀴즈 도르는 세계적인 요리 대회다. 현실을 즐기되 무엇을 이루려거든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이 현실에서 이루려 해야 한다고 알무트는 생각한다. 남자 토비아스도 그걸 받아들인다.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이란 허위 이데올로기의 종언
안정적인 중산층 가정이라는 허위의 이데올로기는 이제 끝났다. 영화 은 죽어가는 여성의 삶을 통해 현실의 삶에 충실하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한 세상이 되었음을 역설하는 작품이다. 지금의 세상과 새로운 세대에 대해 뜻밖에 눈뜨게 하는 작품이다. 2024년 9월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초청, 공개됐으며 2024년 북미 개봉, 2025년 영국에서 개봉됐다. 국내에서는 2026년 들어 지난 4월 8일 전국 개봉됐다. 많은 극장을 점유하지는 못했다. 의미 있는 영화들이 늘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