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봉쇄, 에너지 전환 가속 계기로 삼아야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호르무즈 해협 봉쇄가 현실이 되고 있다. 한국이 수입하는 원유의 약 70%가 이 해협을 경유한다는 사실은 에너지 안보의 취약성을 새삼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 위기를 단지 지정학적 돌발 변수 로만 읽는 것은 절반의 진단에 그친다.
에너지 전환의 필요성은 호르무즈 봉쇄와 무관하게 이미 확고한 구조적 흐름이다. 기후 위기, AI 시대의 전력 수요 급증, 화석연료 가격 변동성, 탄소중립 목표—이 모든 요인이 재생에너지 확대와 전력 계통의 유연성 강화를 동시에 요청하고 있다. 봉쇄 사태는 그 구조적 전환을 가속할 촉매일 뿐, 전환의 근거 자체가 아니다.
이 글은 그 구조적 전환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한다. 재생에너지의 간헐성 문제, 가스발전과 ESS의 역할, 원전의 가능성과 한계, 그리고 한국이 당장 마련해야 할 제도적 기반을 순서대로 살핀다.
어느 고속도로 휴게소 주차장의 태양광발전. 우리는 전국토에 태양광의 급속한 설치과 이를 전력계통으로 유연하게 수용하는 시스템의 구축이 급선무다. @이원영
초점 1 ㅡ 재생에너지의 간헐성은 결함이 아닌 특성, 그러나 과소평가도 안 된다
태양광 발전량이 날씨에 따라 요동치는 것은 물리적 특성이다. 이를 본질적 결함으로 규정하는 것은 강물이 흐른다는 이유로 강을 위험하다고 부르는 것과 다름없다. 석탄화력 발전소가 예고 없이 멈추거나, 원전이 계획예방정비에 들어가는 것도 넓은 의미의 변동성이다. 계통 운영자들은 오래전부터 이 모든 변동성을 예측하고 대비하는 것을 기본 업무로 삼아 왔다.
그러나 동시에 인정해야 할 것이 있다. 태양광·풍력의 간헐성은 기존 발전원의 변동성과 성격이 다르다. 석탄·원전의 출력 변동은 예측 가능한 일정표에 따라 이루어지지만, 재생에너지의 변동은 기상에 종속되어 단기 예측의 정확도 한계가 있다. 더욱이 계절적 간헐성, 즉 며칠씩 이어지는 흐린 날이나 무풍 상태는 단기 ESS(에너지저장장치)만으로는 해결이 어렵다. 이 계절적 간극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는 에너지 전환의 가장 어려운 기술적 과제 중 하나다.
결국 핵심 질문은 이것이다. 이 변동성을 우리의 전력 계통이 감당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는가? 그 설계가 아직 충분하지 않다면, 무엇을 갖춰야 하는가?
초점 2 ㅡ 스페인 정전이 가르쳐 준 진짜 교훈
2025년 4월 스페인 대정전을 두고 태양광 47% 비중 때문 이라는 단정이 넘쳤다. 한국의 일부 언론은 이를 지나치게 왜곡하여 보도했다. 그러나 스페인·포르투갈 전력당국의 공식 조사 결과는 훨씬 복잡한 구조적 문제를 지목한다.
조사에 따르면 정전은 단일 원인의 산물이 아니었다. 계통 내 강한 전압 진동, 동기발전기 비중 급감에 따른 계통관성 부족, 그리고 이것이 연쇄적으로 작용한 복합 재난이었다. 태양광 설비 9800MW가 연쇄 탈락한 것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계통관성(Grid Inertia)이란 동기발전기(원전·가스·수력 등 회전체를 가진 발전기)가 계통 주파수를 물리적으로 안정시키는 능력이다. 인버터 기반 재생에너지는 이 관성을 제공하지 못하므로, 비중이 급증할수록 별도의 안정화 장치가 필요하다.
여기에 스페인의 지리적 취약성이 겹쳤다. 스페인은 프랑스와 약 4GW, 모로코와 0.8GW로만 연계된 유럽 전력망의 사실상 섬 구조다. 비상시 주변국으로부터 충분한 전력을 공급받기 어려운 이 고립이 위기를 증폭시켰다.
역설적으로 이 사례가 주는 경고는 재생에너지를 줄여라 가 아니라 인프라 없이 속도만 내지 말라 는 것이다. 재생에너지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재생에너지와 함께 작동해야 할 유연성 자원—가스발전, ESS, 스마트그리드, 가상관성 기술—을 제때 갖추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한국도 사실상 전력망 고립국임을 직시해야 한다.
초점 3 ㅡ 한국의 재생에너지 현황과 숫자의 맥락
한국의 1인당 재생에너지 발전량은 약 1000kWh로, 독일(약 3000~3500kWh), 미국(약 2800~3000kWh), 일본(약 2000kWh)에 비해 현저히 낮다. 이 격차는 실질적이며, 재생에너지 확대가 시급하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면적이나 자연여건 주민수용성 등 제약조건이 다르므로 제약을 고려한 보다 정밀한 전략이 필요하다. 건물 옥상 태양광, 농업·태양광 병행(영농형), 해상풍력 등 국토 조건에 맞는 경로를 병행해야 하며, 단순히 남들만큼 설치량을 늘리자 는 목표 설정보다는 계통 안정성과 연계된 체계적 로드맵이 요구된다.
초점 4 ㅡ 가스발전이라는 대기 자원 의 경제적 가치를 인정하라
태양광이 전력의 절반을 담당하는 낮 시간대에 가스(LNG) 발전기가 멈추는 것을 두고 설비가 놀고 있다 고 비판하는 것은 범주 오류다. 소방관이 불이 나지 않을 때 대기하는 것을 인건비 낭비라고 부를 수 없는 것과 같다. 가스발전의 가치는 kWh 생산 실적이 아니라, 필요할 때 수십 분 이내에 출동할 수 있는 준비 상태 자체에 있다.
가스발전은 재생에너지의 가파른 출력 변화에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는 유일한 대용량 유연성 자원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구조적으로 출력을 신속하게 조절하기 어렵고, 석탄화력은 기동에 수 시간이 걸린다. 오직 가스발전만이 재생에너지의 빈틈을 단시간에 메울 수 있다.
현재 한국의 가스발전 설비용량은 46.3GW로, 원전(26.1GW)보다 훨씬 많다. 그러나 이 설비의 상당 부분이 충분히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경제적 유인의 부재다. 대기 상태를 유지하는 비용을 보상받지 못하는 구조에서는 사업자가 설비를 유지할 이유가 약해진다. 이 문제의 해법이 바로 용량시장(Capacity Market)이다. 용량시장이란 발전기가 전력을 실제 생산하는 것뿐만 아니라, 언제든 공급할 수 있는 준비 상태 자체에 대가를 지불하는 시장이다. 독일, 영국, 미국 PJM(13개 주) 등이 이미 운영 중이다. 이 시장이 도입되면 가스발전 사업자는 낮에는 쉬고 저녁·흐린 날을 대비해 설비를 유지할 경제적 유인이 생긴다.
물론 용량시장 도입에는 비용이 따른다. 대기 용량에 지불하는 비용은 전기요금이나 계통 이용료에 반영된다. 이 부담이 산업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 저소득층 가계의 에너지 비용 부담 증가 등은 충분한 사회적 논의와 함께 설계되어야 한다. 유연성의 가치를 인정하되, 그 비용을 공정하게 분담하는 제도 설계가 병행되도록 한다.
초점 5 ㅡ 원전의 역할과 한계
원전은 탄소 배출 없이 대용량의 안정적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석유화력 발전을 대체하는 기저 전원으로서의 역할은 현실적이지만 한계도 명확하다. 원전은 구조적으로 출력 조절이 어려운 경직성 전원 이다. 재생에너지 비중이 급증하는 계통에서, 수요 감소 시기에 출력을 줄이지 못하는 원전은 재생에너지의 가동을 제약하는 요인이 된다. 또한 신규 원전은 착공부터 상업 운전까지 최소 10년 이상이 걸려, 2030년대 중반 이전에 계통에 기여하기 어렵다.
SMR(소형모듈원자로)에 대해서도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일부 기업의 사업 차질이 SMR 기술 전체의 실패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현재까지 상업 운전이 검증된 SMR은 없으며, 비용 경쟁력과 허가 절차의 불확실성이 여전히 크다. 방사능폐기물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종합하면 기존 원전은 에너지 전환 과정의 다리 전원(Bridge Power) 으로서 역할할 수 있다. 다만 이는 재생에너지가 확대되면 병행되기가 어렵다. 원전 확대가 재생에너지 투자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흘러서는 안 된다.
초점 6 ㅡ ESS와 스마트그리드의 가능성과 현실적 한계
리튬이온 기반 ESS는 4~8시간의 저장이 가능해 일 단위 변동성 대응에는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저녁 첨두 시간대 방전, 새벽 잉여 재생에너지 흡수 등의 역할은 이미 현실에서 검증되고 있다.
그러나 며칠 이상 지속되는 계절적 간헐성에는 현재의 리튬이온 ESS로 대응이 어렵다. 이 간극을 채울 기술로는 그린수소, 장기 저장용 철-공기 배터리, 양수발전 확대 등이 연구·실증 단계에 있다. 당장은 이 간극을 가스발전이 메울 수밖에 없으며, 중장기적으로는 기술 성숙에 따른 저장 기술 다양화가 요구된다.
스마트그리드와 수요반응(DR)도 병행되어야 한다. 산업용 대형 소비자의 첨두 시간대 자발적 수요 감축은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작동 중이다. 이를 가정과 소상공인으로 확대하려면 스마트미터 전면 보급과 실시간 요금제 도입이 선행되어야 한다. 호주가 가상발전소(VPP) 모델로 수천 가구의 소형 배터리를 하나의 전원처럼 운영하는 사례는 한국에도 적용 가능한 모델이다.
초점 7 ㅡ 호르무즈 봉쇄와 천연가스에 대한 현실적 대안
한국이 수입하는 LNG의 공급선을 보면 호주(27.7%), 카타르(18.2%), 말레이시아(14.3%), 미국(11.1%) 순이다. 카타르를 제외한 약 3/4는 호르무즈 경로와 무관한 지역에서 조달 가능하다.
그러나 천연가스도 위험이 없지 않다. 가격 급등 시 조달 비용이 급격히 상승하고, 운송 차질이나 액화터미널 병목이 발생할 수 있다. 러시아산 LNG는 제재 리스크를 동반한다. 즉, 가스는 원유보다 공급선 다변화가 용이한 편이지만, 완전한 안전 자산은 아니다. 이 점을 인식한 가운데, 재생에너지 확대와 가스발전 유연성 강화를 병행하는 전략의 의미가 있다.
세계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독일 — 대기 설비를 제도화하다
2024년 재생에너지 비중 54.4%를 달성한 독일은 가스·바이오매스 발전을 백업 자원 으로 제도화하고, 용량시장을 통해 대기 비용을 계통이 부담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발전기의 가치는 kWh뿐 아니라 언제든 가동될 준비 상태 자체로 인정된다.
호주 — 가정의 배터리를 하나의 발전소로 묶다
호주는 정부 주도로 가상발전소(VPP)를 확대 중이다. 수천 가구의 태양광+소형 배터리를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해 저녁 첨두 시간대 일제히 방전한다. 2024년에는 분산 자원이 도매시장에 직접 참여할 수 있도록 규제를 개정했다.
미국 — 세금으로 유연성을 산다
인플레이션감축법(IRA)으로 ESS 세액공제를 최대 70%까지 확대했다. 캘리포니아는 오리 곡선 문제를 ESS+가스 백업 조합으로 체계적으로 해결하고 있다.
한국 — 에너지 섬의 특수성을 직시하라
한국은 사실상 전력망 고립국이다. 북쪽의 군사적 현실, 동·남쪽의 바다로 인해 광역 연계가 불가능하다. 스페인의 지리적 취약성이 정전을 키웠듯, 한국도 비상시 외부 전력 조달이 원천적으로 어렵다. 따라서 재생에너지의 급속하고도 대폭적인 확충과 가스발전의 유연성과 ESS 확충이 다른 나라보다 훨씬 더 절박하다. 최근 정부가 분산형 전력계통의 확충에 큰 예산을 들여 노력하는 것은 그 청신호다.
맺음말 ㅡ 구시대적 이분법을 넘어서
스페인 정전은 태양광 47% 가 공포라는 증거가 아니라, 인프라 없이 속도만 내는 것이 진짜 위험이라는 증거다.
한국이 가야 할 길은 세 가지 병행이다. 첫째, 국토 조건에 맞는 현실적 재생에너지 확대 로드맵. 둘째, 가스발전·ESS·스마트그리드 등 유연성 자원의 체계적 확충과 이를 뒷받침하는 용량시장 도입. 셋째, 기존 원전을 에너지 전환 과정의 다리 전원으로 활용하되, 원전 확대가 재생에너지 투자를 대체하지 않도록 하는 균형 있는 설계.
호르무즈 봉쇄는 이 전환을 가속할 외부 압력이다. 그러나 전환의 이유는 봉쇄와 무관하게 이미 충분하다. AI 시대의 전력 수요 폭증, 탄소중립 목표, 화석연료 가격 불안정—이 모든 흐름이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위기가 기회가 되려면, 그 기회를 잡을 제도와 인프라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