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혁당 8인 사법 살인 역사의 심판 안 이뤄졌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1998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내가 활동가로 일하던 서울 명동의 ‘천주교 인권위원회’ 문을 열고 50대 후반의 아주머니 서너 분이 들어섰다. 내가 말로만 듣던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1975년 4월 9일 사형된 8인의 가족들과 만나게 된 인연의 시작이었다.
공안 검사들이 기소장 서명 거부한 ‘1차 인혁당 사건’
1964년 8월 14일, 지금의 국가정보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이하 ‘중정’)는 ‘북괴의 지령을 받고 국가 변란을 기도한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며 이른바 ‘인민혁명당 사건’을 발표한다. 당시 중정은 ‘대한민국을 전복하라는 북괴 지령에 따라 반국가단체인 인민혁명당을 구성하여 각계 인사를 포섭하려한 혐의’로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하는데, 훗날 이 사건을 ‘1차 인혁당 사건’이라 부른다.
하지만 중정의 공안몰이는 실패하고 만다. 간첩단 발표 직후부터 실체에 대한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국민적 동의 없이 추진하다 들통이 나서 비난받게 된 한일회담을 무마하려고 조작한 것 아니냐는 논란이 달아올랐다.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한일협정 반대운동. ‘매국적 외교를 결사 반대한다’ 등의 피켓을 든 시위대가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고 있다. 역사 자료사진
실제로 이 사건은 당시 양심적인 서울지검 검사들에 의해 망신당하게 된다. 중정으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간첩 혐의에 대해 확인한 결과 변란을 기도했다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구속기간 만료일인 1964년 9월 5일,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은 재판에 붙일 가치조차 없다”며 기소장 서명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사건을 발표했던 중정은 난리가 났다. 중정은 당시 검찰총장 신직수를 압박하여 검사에게 기소할 것을 강요했으나 누구도 응하지 않았다. 결국 검찰 역사상 ‘부끄러운 오점’으로 남을 일이 그날 벌어진다. 양심상 혐의 입증을 할 수 없는 기소를 할 수 없다며 버틴 수사 검사 대신 사건 내용도 모르는 그날 밤 당직 검사가 영문도 모른 채 기소장에 서명케 한 것이다.
이렇게 억지 기소된 사건이니, 그 뒤도 중정의 뜻대로 될 리 없었다. 간첩 혐의로 중정이 구속했던 41명 중 재판에 억지 기소된 이는 겨우 26명이었다. 그런데 그중 오병철, 서정복을 비롯한 피고인 14명 마저 같은 해 10월 15일자로 ‘공소 취소’ 결정을 받아 석방된다. 결국 중정의 물고문, 전기고문으로 조작된 이 간첩 사건에서 5명만 가벼운 반공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나머지 8명은 집행유예 등으로 석방된다. 그야말로 중정의 완패였다. 이렇게 1차 인혁당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10년 후 이루어진 중정의 복수극 ‘인혁당 재건위 사건’
하지만 중정은, 그때의 치욕을 잊지 않았다. 그날로부터 10년 후인 1974년 4월 3일. 이번엔 유신 독재자 박정희가 직접 나섰다. 그는 2년 전인 1972년, 유신 쿠데타로 사실상의 영구집권을 선언한 상태였다.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화되고 또한 1973년 12월 장준하 선생 등이 중심이 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민심이 동요하며 위기감이 고조되던 중이었다. 그는 유신체제를 반대하는 대학생 조직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 ‘민청학련’)을 적발했는데 배후에 ‘인민혁명’을 획책하는 조종세력이 있다고 주장한다. 마치 2024년 윤석열이 12.3 내란 쿠데타의 정당성을 떠들면서 ‘반국가세력’ 운운하던 것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박정희의 담화 직후 중정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전복을 획책하던 지하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한다.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었다. 이때 체포된 이들이 도예종(삼화토건 회장), 서도원(전 대구매일신문 논설위원), 하재완(무직), 이수병(일어학원 강사), 김용원(경기여고 교사), 송상진(양봉업), 우홍선(무직), 여정남(전 경북대 총학생회장) 등이었다. 이들에 대한 재판은 가족 면회가 일체 불허된 상태에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조작한 대표적 공안 사건인 인혁당 재건위 사건 의 재판 장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대법원 판결 하루도 안돼 사형장으로 끌려간 이들
그리고 1년여 만인 1975년 4월 8일, 형식적인 재판 과정은 모두 끝난다. 이날 대법원은 ‘인혁당을 재건하여 국가전복을 기도한 혐의’를 인정하여 기소된 도예종 등 8인에게 사형을 확정했다. 사법부의 일말의 양심을 기대했던 변호인과 가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지만 곧바로 재심 청구를 준비할 작정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속자와 면회가 이뤄질 것을 기대했다. 구속 후 내내 불허됐던 구속자 면회가 이젠 재판도 끝났으니 막을 이유가 없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더욱 충격적인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 구속자 면회를 위해 찾아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가족들은 대법원 선고 18시간 만인 그날 새벽 4시, 이미 여덟 명 모두에게 사형이 집행되었음을 알게 된다. 중정에서 허위 자백을 받기 위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문을 가해 탈장과 반신불수로 만신창이가 된 그들이 세상에 말을 할까 영원히 입을 닫아버린 것이다. 그렇게 사형수 여덟 명은 4월 9일 새벽 4시부터, 복도에서 울려오는 교도관들의 발자국 소리를 차례로 듣게 된다. 한 명, 한 명, 푸른 여명이 채 걷히지 못한 그 새벽에 모두 사형장 이슬로 사라져 간 것이다.
서대문형무소 밖에서 사형 소식을 듣고 울부짖는 유족들. 4.9평화통일재단 제공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묶은 사형수의 아들
1998년에 천주교 인권위로 찾아온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의 부인들을 통해 내가 듣게 된 이후 남은 가족들의 사연은 너무나 가슴 아팠다. 아버지가 사형된 것도 원통한데, 간첩죄 사형수의 아들과 딸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참혹했다. 사형수 하재완 선생의 부인이 들려준 사연이었다. 어느 날 저녁 늦도록 네 살 아들이 돌아오지 않아 마을을 돌아다니며 찾았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 입구 당산나무에 아들이 묶여 있고 거기에 마을 아이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는 것이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철없는 마을 아이들이 나무에 묶인 아들에게 네 아버지가 빨갱이라서 죽었으니 너도 총살되어야 한다”며 총살시키는 장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빨갱이를 같은 동네에 살게 둘 수는 없다”며 나가라는 마을 사람들에게 사정하며 살아가던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화도 낼 수 없어 그저 묶인 줄을 풀고 아들을 집으로 데려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너무나 서러워서 돌아오는 길에서 아들을 붙잡고 울었다는 그 어머니의 말에 나 역시 눈물을 금할 수 없었다.
하재완 선생의 단란했던 가족 사진. 4.9평화통일재단 제공
24년 만에 열린 추모식에서 흘린 서러움과 기쁨의 눈물
이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의 부인들은 이제라도 우리 남편의 억울함을 밝혀 달라”며 호소했다. 1998년 2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섰으니 이제라도 조작된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데 천주교 인권위가 앞장 서 달라는 요청이었다. 인권위는 이 호소에 화답하기로 했다. 인권위 운영위 결정에 따라 나는 실무자로서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대책위원회’ 구성에 박차를 가했다. 1975년 사형 집행 후 처음으로 인혁당 재건위 사건 관련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첫 기구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서 1999년 4월 8일, 인혁당 사형 집행 24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적인 추모 행사가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대강당에서 열리게 된다. 이날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족을 비롯하여 200여 명이 참석하여 희생자들을 처음으로 추모했다. 그날 유족들은 남몰래 억눌러왔던 서러움과 또 다른 의미의 기쁨으로 연신 눈물을 흘렸다.
인혁당사건 명예회복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02년 9월 12일 의문사위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은 중정의 고문으로 조작되었다’며 정부에 재조사를 권고한다. 이에 인혁당 사건 재심 변호인단은 같은 해 12월,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게 된다.
그리고 2007년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각 무죄!”
2005년 12월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스스로의 잘못을 고백했다. 진실발전위는 ‘유신체제에 대한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한 박정희 정권이 학생 시위 배후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는 인상을 심어주고자 조작한 국가 형벌권의 남용’임을 명확히 했다. 마침내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3부는 재심 선고 공판을 열고 1975년 4월 9일 새벽 4시부터 30분 간격으로 사형된 8인의 사형수 이름을 다시 호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재판장 문용선의 판결 주문.
피고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송상진, 우홍선, 여정남에 대해 판결을 선고합니다. 원심을 모두 파기합니다. 피고 각 무죄.
하지만 사건을 조작한 가해자들의 역사적 심판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51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희생자들의 부인 등 많은 유가족, 관계자들이 돌아가셨다. 최근에는 유시민 작가가 사형수 우홍선 선생의 부인 강순희(93세) 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직접 듣고 책으로 내기도 했다.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 강순희 말하고 유시민 듣다’유시민 인터뷰·글, 김세라 기록, 4·9통일평화재단 엮음, 도서출판 은빛
올해로 51주기를 맞이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 희생자 8인을 추모하며 유족 분들에게 깊은 위로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