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 중’인 세계질서 속 한국 외교가 가야 할 길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성렬 경남대학교 초빙교수
독일에서 열린 제62회 뮌헨안보회의(MSC, 2026.2.13~15)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비관적이었다. 회의 직전 발표된 연례보고서의 제목인 「해체 중(Under Construction)」은 현 국제질서가 처한 참담한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보고서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80여 년간 세계 평화와 번영을 지탱해 온 자유주의 국제규범과 다자주의 협력체제가 단순히 흔들리는 수준을 넘어, 기득권 패권국과 파괴적 정치세력에 의해 조직적으로 해체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1945년 체제의 설계자였던 미국이 이제는 그 질서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는 통렬한 비판은 우리가 마주한 불확실성이 얼마나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뮌헨안보회의 미국 동맹국들 앞에 험난한 바다 놓여”」 이유, 시민언론 민들레, 2026.02.10.)
이러한 지구촌 미래의 불확실성은 동북아시아에서 더욱 날카로운 물리적 충돌과 전략적 균열로 치닫고 있다. 동북아 안보지형은 기존의 단순한 ‘진영 대결’ 구도를 넘어, 각국의 국내 정치적 필요와 전략적 실리가 복잡하게 얽힌 ‘고차방정식’의 양상을 띠고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실용적 대중 접근과 일본 다카이치 내각의 강성 우경화 기조,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중국의 다자주의 공세가 맞물리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전략적 불확실성은 임계점에 도달했다. 우리는 지금 강대국들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적대적 공생’과 ‘전략적 충돌’ 사이를 오가는 기묘한 재편기를 목격하고 있으며, 이 거대한 파고 속에서 국익의 항로를 지켜낼 정교하고 능동적인 ‘공간 창출’의 숙제를 안고 있다.
가치 동맹을 버린 트럼프의 거래주의적 실용외교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미국의 대중 전략 기조다. 최근 미 국방부가 발표한 「2026 국방전략서(NDS)」는 중국을 향해 ‘괜찮은 평화(Decent Peace)’라는 파격적인 담론을 제시했다. 5번이나 반복된 이 용어는 과거의 이상주의적 접근을 폐기하고, 중국의 체제 붕괴나 완전한 굴복을 목표로 삼기보다 미국의 핵심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공존을 모색하겠다는 ‘유연한 현실주의’ 선언이다. 물론 이 평화의 전제는 ‘거부에 의한 억제력’을 통한 압도적 군사 우위에 있지만, 담론의 무게중심이 ‘무한 대결’에서 ‘관리된 경쟁’으로 옮겨갔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2월 14일 독일 뮌헨에서 열린 뮌헨 안보회의에서 연설하고 있다.2026.2.14. AP 연합뉴스
이러한 전략적 선회는 뮌헨안보회의에 참석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의 연설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루비오는 미국의 우선순위는 명확하다”면서, 동맹국들에게 무조건적인 보호를 약속하는 대신 각자의 방위 분담과 역할을 강조하는 이른바 ‘최후통첩성’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유럽이 스스로의 안보를 증명하지 못하면 미국은 떠날 수 있다”며 안보 공약의 조정을 시사했고, 중국에 대해서도 미국의 기술 패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면 경제적 협조의 공간을 허용할 수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인플레이션 억제와 공급망 안정을 위해 중국의 경제적 협조를 얻으려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이 담겨 있다.
결국 미국의 정책은 안보적으로는 강경한 억제를 유지하되, 정치·경제적으로는 중국을 이용해 국내 위기를 돌파하려는 ‘양면 전술’에 기초하고 있다. 이는 미국이 동맹국들에 요구해 온 ‘디커플링’ 기조가 트럼프 특유의 ‘거래주의 외교’에 의해 언제든 유연하게 변모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루비오의 연설은 동맹을 가치 중심이 아닌 거래와 분담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트럼프 행정부의 실용주의적 외교관을 상징하며, 우리 외교가 미국의 강경 수사에만 매몰되어 그 이면의 ‘거래적 속성’을 놓쳐서는 안 되는 명확한 이유를 제시한다.
일본 자위력이 동북아 평화 핵심이라는 고이즈미 방위상
미국이 실용적 유연함을 보이는 사이, 일본은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지난 2월 초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다카이치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은 단독으로 3분의 2를 넘는 316석을 확보하며 압승을 거두었다. 이는 전후 일본 정치사에서 유례없는 기록으로, 다카이치 총리는 이제 헌법 개정과 방위비 증액, 이른바 ‘전쟁 가능한 국가’로의 이행을 위한 강력한 추진력을 얻게 되었다. 다카이치 정권은 이 압도적 지지를 발판 삼아 ‘3대 안보 문서’를 조기에 개정하고 일본판 CIA인 국가정보국 창설을 서두르는 등 우익적 정책 전반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일본의 이러한 강성 기조는 뮌헨안보회의 현장에서도 고스란히 묻어났다. 회의에 참석한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동북아의 군사 균형이 급속히 변하고 있다”며 중국의 해양진출을 ‘힘에 의한 일방적 현상 변경 시도’로 규정하고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유럽국가들과의 방위 협력을 모색하며 일본의 군사적 역할을 국제적으로 승인받으려 하고 있다. 특히 다카이치 총리가 언급한 ‘대만 유사시 개입’ 가능성을 뒷받침하며, 일본의 자위 능력이 동북아 평화의 핵심이라는 논리를 설파하고 있다.
일본의 이 같은 행보는 미국의 안보 분담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는 모양새를 띠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아베 신조의 유산을 계승하여 ‘보통국가화’를 완성하려는 전략적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일본은 미·중 갈등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선명한 대중 견제의 전위부대를 자처함으로써 자국의 몸값을 높이고 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역내 긴장을 고조시키고 한국의 전략적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고 있다. 특히 일본 내부의 극우적 역사관이 정부 정책에 노골적으로 반영될 경우, 이는 한일 관계의 리스크를 넘어 동북아 전체의 안보딜레마를 심화시킬 우려가 크다.
안규백 국방장관이 지난 1월 30일 도쿄 요코스카 지구에 위치한 일본 해상자위대 본부에서 고이즈미 신지로 일본 방위상과 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2026.1.30. 로이터 연합뉴스
중국의 반격과 왕이 부장의 ‘레드라인’ 경고
중국은 일본의 우경화와 미국의 압박에 맞서 한층 날선 반응을 보이며 다자주의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뮌헨안보회의에서 왕이 외교부장은 다카이치 총리의 대만 관련 발언을 ‘광언(狂言)’이라 지칭하며, 이는 전후 국제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군국주의 유령을 불러내는 행위라고 맹비난했다. 왕 부장은 유럽과 국제사회를 향해 일본의 재군사화 행보에 강력한 경고를 보낼 것을 촉구하며, 일본을 과거 침략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는 ‘불량 행위자’로 부각시키는 국제적 고립 작전을 펼쳤다.
미국에 대해서도 중국은 공존의 의지를 내비치면서도 명확한 한계선을 그었다. 왕 부장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대화 가능성과 미국의 ‘거래적 제안’에 촉각을 세우면서도, 대만 문제나 주권 사안에 있어서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는 ‘레드라인’을 확인했다. 그는 미국 내 일부 세력이 대만을 이용해 중국을 분열시키려 한다면 이는 필연적으로 ‘충돌’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중국은 오는 11월 미국의 중간선거 국면을 활용해 경제적 숨통을 틔우려 하면서도, 안보의 핵심적 이익 앞에서는 배수진을 치고 있다.
중국의 입장은 명확하다. 미국의 ‘거래주의’에는 실리로 화답하며 경제적 실익을 챙기되, 일본의 ‘군사주의’에는 역사적 정당성과 국제규범을 무기로 맞대응하는 것이다. 특히 ‘진정한 다자주의’를 표방하며 유럽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미국의 동맹 체제 내에 균열을 내려는 외교적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의 다목적 포석은 미·중·일 관계가 단순한 대립을 넘어 고도의 수싸움과 이합집산의 국면에 진입했음을 의미하며,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외교적 시험대가 되고 있다.
왕이 중국 외교부장이 2월 14일 독일 남부 뮌헨에서 열린 제62회 뮌헨 안보회의(MSC)에서 연설하고 있다. 2026.2.14. AFP 연합뉴스
한반도 파급영향: 좁아지는 입지와 가중되는 위협
이러한 미·중·일의 각축전은 한반도에 직접적이고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엇보다 큰 위협은 미국의 ‘거래주의적 동맹관’과 ‘괜찮은 평화’ 담론이 자칫 한반도 안보공약의 약화로 이어질 가능성이다. 루비오 국무장관이 언급한 ‘안보 자산의 효율적 재배치’는 주한미군의 위상이나 연합훈련의 성격 변화를 의미할 수 있으며, 이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상시화된 상황에서 우리에게 심대한 안보 공백을 초래할 수 있다. 미국이 본토 방어와 대중 억제에만 집중하며 ‘한국 방어의 한국화’를 추진하려는 의도가 뚜렷해짐에 따라, 우리는 전례 없는 자강력 확보를 요구받고 있다.
둘째로, 일본의 급격한 군사대국화는 동북아의 군비경쟁을 가속화하고 우리 외교의 자율성을 침해한다. 다카이치 내각이 추진하는 헌법 개정과 공격적 안보정책은 북한의 군사력 강화를 정당화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중·일 간의 긴장을 높여 한반도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위험 수위까지 끌어올리게 된다. 특히 일본이 미·일 동맹의 하위 파트너를 넘어 독자적인 지역 패권국으로서의 목소리를 높일 경우, 한국은 한·미·일 안보 협력이라는 틀 안에서 일본의 전략적 의도에 ‘연루’되거나 끌려다닐 위험이 크다.
셋째로, 중국과 러시아의 밀착과 북한의 전략적 이득 취득이다. 세계 질서가 ‘해체 중’인 상황에서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을 대미 견제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며 대북 제재의 무용화를 꾀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강대국 간의 균열을 틈타 핵 능력을 일상적인 억제 수단으로 안착시키려 하며, 오는 제9차 당대회와 최고인민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법제화함으로써 통제 불능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위기 구조는 우리 외교가 단순한 가치 중심의 동맹 외교만으로는 돌파하기 어려운 거대한 벽을 형성하고 있다.
한국 외교의 대응: ‘연루’ 아닌 ‘전략적 자율성’으로
이러한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한국 외교가 취해야 할 최우선 과제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휩쓸려 가는 ‘연루(Entanglement)’의 위험을 차단하는 것이다. 특히 다카이치 내각의 강성 기조에 무비판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우리의 대중 관계를 파탄 낼 뿐만 아니라,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일본에 내주는 악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일본의 방위력 강화가 역내 불안을 가중시키지 않도록 한·미·일 협력의 틀 안에서 정교하게 속도 조절 을 요구하고, 우리의 주권적 목소리를 분명히 내야 한다.
또한, 미국의 ‘괜찮은 평화’ 담론을 한반도 정세 안정의 지렛대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미국이 중국과 공존의 길을 모색한다면, 우리 역시 안보와 경제를 분리하여 중국과 실용적인 협력 채널을 가동할 명분과 공간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는 단순히 양자택일을 피하는 차원을 넘어, 미·중 간의 ‘거래’ 국면에서 한국의 국익이 희생되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움직이는 것을 의미한다. 루비오가 제시한 ‘거래적 동맹관’에 대응하여, 우리 역시 한미 동맹의 가치를 유지하되 실리적 차원에서의 분담과 기여를 명확히 함으로써 ‘자립형 동맹’으로 재정립해야 한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념적 편향성을 탈피하고 오직 국익이라는 단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전략적 자율성’ 확대이다. 미·중·일이 각자의 국내 정치와 실리를 위해 국제 규범을 ‘해체’하며 움직이는 이때, 한국 외교 또한 ‘가치’라는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기보다는 격변하는 정세의 틈새를 찾아내는 유연함과 담대함을 보여야 한다. 「9·19 군사합의」의 정신을 되살리고 남북 대화의 채널을 복원하려는 노력은 단순히 민족적 과제를 넘어, 강대국들의 각축전 속에서 우리가 ‘페이스 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략적 수단이다. 그것이 ‘해체 중’인 세계질서라는 거친 바다에서 평화의 키를 쥐고 주권국가로서 대한민국이 생존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