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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바로가기 : 총 없이 전장 누비며 아이들을 먹인 루스 프라이

총 없이 전장 누비며 아이들을 먹인 루스 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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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 루스 프라이(Anna Ruth Fry, 1878~1962)는 영국의 퀘이커교도 작가이자 평화주의자이며 평화 운동가였다. 이름도 낯설고 종교도 생소하다. 그런데 이 여자, 보통사람이 아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사이를 오가며, 굶주린 아이들에게 빵을 날랐고, 전쟁 반대를 외쳤으며, 83세를 살다 1962년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화려한 수식어도, 노벨상도, 동상도 없다. 그냥 일했다. 묵묵히, 끝없이. 너는 학교에 가기엔 몸이 너무 약해 , 그래서 세계를 누볐다 루스 프라이의 아버지는 퀘이커교도 판사 에드워드 프라이 경이었으며, 부모들이 학교에 가기에 너무 허약하다고 생각해 그녀는 런던 하이게이트의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학교 문턱도 못 밟은 아이가, 훗날 러시아 대기근 현장을 세 차례 방문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들을 직접 돌아다니며 구호활동을 벌인다. 부모님이 무덤에서 놀랄 일이다. 아버지 에드워드 프라이 경은 1907년 헤이그 재판소에서 협상가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판사이자 법률가였다. 집안 자체가 평화와 정의를 업으로 삼은 집안이었던 셈이다. 그 유전자(DNA)가 딸에게 고스란히 흘렀다.   루스 프라이 1938년(위키피디아) 보어 전쟁에서 러시아 기근까지, 쉬는 날이 없었던 삶 1904년, 그녀는 성공회 신자인 에밀리 홉하우스(Emily Hobhouse, 1860~1926)가 세운 보어 가내공업 및 구호협회 의 재무를 맡았는데, 이 단체는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으로 생계를 잃은 여성과 어린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곳이었다. 에밀리 홉하우스는 영국군의 집단수용소 참상을 세상에 알린 인물로, 루스 프라이의 첫 번째 스승 격이었다. 1914년, 그녀는 새롭게 재건된 친우회 전쟁피해자 구호위원회(FWVRC) 의 총무로 임명되어 1923년까지 그 직책을 맡았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달려간 것이다. 그것도 총 대신 구호상자를 들고. 당시 한 동료는 그녀를 이렇게 묘사했다. 물자 조달, 행정, 인사 관리, 홍보, 모금, 지도력, 영감 부여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사업을 책임지는 일종의 총사령관이자 병참장교 총사령관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무기 없는 총사령관. 21세기 표현으로 하면 인도주의 운동의 최고경영자(CEO) 쯤 되겠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동안 루스 프라이는 직접 전장을 돌아다니며 현장을 눈으로 확인했다. 학교가 병원으로 바뀌어 있었고, 이가 옮기는 전염병을 막으려면 비누와 깨끗한 침구가 절박했다. 식량은 극도로 부족해 퀘이커교도들이 가져온 통조림이 사치품처럼 여겨졌다. 비누가 사치품인 세상. 그 세상에 루스 프라이는 직접 뛰어들었고, 영국에 돌아와서는 위험하고 역겨운 일을 맡을 사람들을 공개 모집했다.   에밀리 홉하우스 1902년(위키피디아) 러시아 대기근, 그곳에도 그녀가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번엔 기근이었다. 1921년, 그녀는 러시아 기근 구호기금의 초대 의장을 맡았다. 1921년과 1922년 겨울, 그녀는 언론인 친구 에블린 샤프(Evelyn Sharp, 1869~1955)와 함께 러시아 부줄루크까지 여행했다. 당시 에블린 샤프는 인구 과밀 상태의 고아원과 얼어붙은 땅에서 매장을 기다리는 수백 구의 시신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1921년 말까지 주민의 90%가 풀이나 나무껍질로 만든 빵을 먹고 있었다. 1922년 출범한 소비에트연방 정부는 구호 활동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구호물품 빵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쓰일 수 있는 선전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념을 따지고, 루스 프라이는 아이들 밥을 챙겼다. 둘 중 누가 옳은지는 역사가 답했다. 구호 활동이 탄탄하지 않다는 의심도 있었지만, 루스 프라이는 직접 러시아로 건너가 조사하고, 물자 유용이 다른 구호활동과 비교해 특별히 심각하지 않다고 증언했다. 비판이 있을 때 숨지 않고 현장에서 답을 찾은 것이다. 1922년부터 1925년 사이, 그녀는 소련을 세 차례 방문했다.   에블린 샤프(위키피디아) 전쟁 반대를 글로 써 싸운 사람 현장 활동이 전부가 아니었다. 전쟁 반대 국가위원회 총무(1926~1927), 전쟁 저항자 인터내셔널 런던지부 재무(1936~1937), 화해 친우회 학술지 《화해》 편집위원(1935)을 역임했으며, 반전과 비폭력 실천에 관한 다수의 소책자와 전단을 발행했다. 대표작 《퀘이커의 모험(A Quaker Adventure)》(1926)은 9년 간의 구호 활동 기록이다. 전쟁 영웅 회고록이 아니다. 현장 기록이다. 거창한 전쟁 명분에 가린 굶주림과 공포와 질병을 낱낱이 기록했다. 1925년 이후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주로 글쓰기에 전념했다. 몸이 무너질 때까지 현장에 있었고, 그 뒤에는 책상 위에서 싸웠다.   루스 푸라이(https://www.quakersintheworld.org/) 한국에서 이 이름을 꺼내는 이유 루스 프라이를 지금 한국에서 소환하는 건, 그냥 착한 외국여자 소개 가 아니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사회는 이상하게 닮은 풍경을 보여준다. 이재민 구호 현장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이 제도의 빈틈을 메우고, 참사 피해자 가족들은 진상 규명을 외치며 거리에 선다. 반면 이념을 따지지 말라 는 말은 항상 이념적 의도를 가진 사람들 입에서 나온다. 소련 정부가 빵을 선전 무기로 봤듯이. 루스 프라이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 첫째, 시민사회의 독립성이다. 그녀는 영국 정부의 허가나 지원 없이 움직였다. 퀘이커교도들은 국가권력과 거리를 두면서도 그 어떤 국가기관보다 빠르게 현장에 도달했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이 정부 보조금에 묶여 목소리를 잃어가는 현실과 겹쳐 보인다. 둘째, 기록의 힘이다. 루스 프라이는 현장을 보고 책을 썼다. 에블린 샤프는 고아원을 보고 기사를 썼다. 기록이 없었다면 역사는 지워졌을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록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록이 쌓여야 한다. 셋째, 젠더와 무관한 실력이다. 루스 프라이는 여성이지만 활약했다 가 아니라, 그냥 활약했다. 제도적으로 여성이 배제되던 시대에, 퀘이커공동체는 성별과 관계없이 역량을 일 앞에 세웠다. 한국에서 아직도 여성 리더십 이라는 말이 특별한 수식어로 따라다녀야 하는 이유를 이 맥락에서 다시 생각해볼 만하다.   루스 프라이(National Portrait Gallery) 총사령관의 무기는 비누였다 루스 프라이는 화려하지 않았다. 노벨평화상을 받은 것도 아니고, 교과서에 실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녀가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아이들이 있었고, 기록되지 못했을 현장이 있었고, 전달되지 못했을 비누상자들이 있었다. 권력은 이름을 남기고, 사람은 사라진다. 루스 프라이는 그 반대였다. 이름보다 사람을 먼저 챙겼다. 지금 이 나라에서도 이름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루스 프라이다.   루스 프라이(Marginal Mennonite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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