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렴과 사명감, 소신 …조봉암에 사형 언도한 판사의 말 [사람들] 2026년 봄, 영국에서 『반헌법행위자열전』 2권을 펼쳤다. 김용진(金容晋, 1914~1992) 항목을 읽다가 한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 그는 1976년 법률문화상 수상 소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청렴이 없이는 소신 있는 판결이 나올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사법권의 독립이 자주 오르내리는 것은 외부적인 요소도 있을 것이고 내부적으로도 사명감의 부족 때문이 아니겠느냐.
청렴. 사명감. 소신. 1958년 조봉암(1898~1959)에게 사형을 선고한 바로 그 판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쯤 되면 뻔뻔함이 아니라 예술이다.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한 가지 구조가 선명하게 보인다. 권력에 약점을 잡힌 사람이 권력의 요구를 충실히 수행하면서도 스스로는 소신 이라 부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소신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것.
김용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평안남도 강동 출생, 남북 양쪽에서 판사를 지낸 사람
김용진은 1914년 7월 평안남도 강동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40년 조선변호사시험, 1941년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가네야마 요진(金山容晋). 1942년 평양에서 변호사를 개업했다.
해방 후 그는 북한에서 판사로 임용됐다. 북한 정권은 조선총독부 판검사 출신을 배제하고 변호사 출신들을 판사로 선발했다. 친일의 때가 덜 묻은 변호사 김용진은 그 기준에 부합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져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그는 뒤늦게 월남했다. 같은 평안도 출신 반공검사로 유명했던 오제도의 주선으로 1950년 12월 서울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됐다. 남과 북에서 모두 판사를 지낸 특이한 이력이다.
그런데 이 이력 자체가 그의 약점이었다. 비슷한 시기 월남한 위청룡은 검찰국장까지 올랐다가 5·16 쿠데타 후 간첩죄로 수사 받던 중 중앙정보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북에서 법관으로 일한 경력이 언제든 덫이 될 수 있었다. 이승만(1875~1965) 정권이 그 덫을 쥐고 있었다. 정치권력에 약점이 잡힌 판사는 강할 수 없었다.
김용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세계사 속의 동류, 약점 잡힌 법관의 비극
영국에서 이 장면을 들여다보면 비슷한 구조의 인물이 떠오른다. 소련의 로만 루덴코(Roman Rudenko, 1907~1981)다. 스탈린(1878~1953) 치하에서 대숙청 재판의 검사를 맡았다. 그는 두렵지 않아서 그 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체제의 압박 앞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처형대로 보냈다. 약점을 잡힌 자가 생존하는 방법은 체제가 요구하는 일을 무조건 개처럼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었다.
동독의 에리히 밀케(Erich Mielke, 1907~2000) 슈타지 수장도 비슷하다. 그는 체제 유지를 위해 수많은 사람을 감시하고 탄압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파괴했다. 김용진과의 차이는 규모뿐이다. 구조는 같다. 권력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서 그 틀이 요구하는 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소련 수석 검사였던 R.A. 루덴코.(위키피디아)
1958년 조봉암 사형, 증거가 번복됐어도 소용없었다
김용진의 반헌법 행위는 1958년 진보당 조봉암 사건 2심에서 정점에 달한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200만 표를 얻은 조봉암은 이승만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1958년 1월 진보당 간부들이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기소됐다. 1심에서 판사 유병진은 조봉암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간첩죄는 무죄였다. 이승만은 격분했다. 자유당 정치깡패들이 법원에 난입해 용공판사 유병진을 타도하라 고 외쳤다. 유병진은 법관 연임에서 탈락했다.
2심 재판장이 김용진이었다. 변호인단은 즉각 기피신청을 냈다. 월남 경력이 있는 그가 이승만 권력의 압박에 취약할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기피신청은 기각됐다. 재판이 진행됐다.
결정적인 장면이 있었다. 검찰이 조봉암에게 간첩죄를 적용한 유일한 증거는 양명산(양이섭)의 자백이었다. 그런데 양명산이 2심에서 1심 진술을 전면 번복했다. 특무대에서 알 수 없는 주사를 맞고 몽롱한 정신상태로 누운 채 신문을 받으며 계속 네네 라고 답했다 고 폭로했다. 더 나아가 변호인단은 양명산이 남파간첩이 아니라 대북침투기관 정보사령부 육상특임대(HID)의 이중공작원이라는 사실까지 밝혀냈다.
김용진 판사가 재판장이었던 진보당 사건 항소심 재판부가 1958년 10월 25일 죽산 조봉암 등에 대한 선고를 언도하던 순간 많은 피고인들이 서서 판결 내용을 듣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증거가 사라진 것이다. 유일한 증거였던 자백이 번복됐다. 그런데도 1958년 10월 25일 김용진은 조봉암과 양명산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심에서 무죄를 받았던 피고인 17명도 전원 유죄로 뒤집었다.
당시 언론과 법조계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1심 배석판사 이병용은 훗날 2심 공판은 양명산의 자백 번복에 대해 충분히 심리하지 않는 등 억압적인 분위기였으며 형식적인 재판이었다 고 증언했다. 변호인 김춘봉은 이승만 정권의 입김이 재판부에 미쳤다 고 진술했다. 당시 법정에 있던 피고인들의 회고는 더 생생하다.
김용진 재판장은 지극히 사무적인 태도로 일사천리식 심리를 진행시켰다. 배석 판사 중 한 사람은 그린 듯이 앉아만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천장을 쳐다보다가 눈을 감고 부처님이 되어버렸다.
부처님이 된 배석 판사 두 명. 일사천리로 심리를 밀어붙인 재판장 김용진. 이 세 사람의 서명이 조봉암의 사형 판결문에 올라갔다. 1959년 7월 31일 대법원의 재심 기각. 그 다음날 사형이 집행됐다. 유일한 증인 양이섭은 이틀 전 이미 처형된 상태였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조봉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52년이 걸렸다. 재판부는 뒤늦게나마 재심 판결로서 그 잘못을 바로잡는다 고 했다. 그러나 사과나 유감은 표명하지 않았다. 김용진은 1992년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물론 살아 있었더라도 사과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용진(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소신 있는 판결 이라는 말의 뻔뻔함
2심 판결 이후 김용진은 조봉암에게 사형을 선고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록상의 자백과 조봉암이 양명산에게 진보당 관계 문건을 준 것을 인정하는 등 간첩으로 인정돼 사형을 선고한 것이다. 양명산이 1심 공판정에서 이야기한 사실들은 당연히 증거능력이 있는 것이었다. 또 조봉암이 형무소에서 양명산에게 전한 쪽지가 다소 모호하기는 했지만 판결에 소신을 주는 증거가 되었다.
소신을 주는 증거. 이 표현이 걸작이다. 증거가 소신을 뒷받침한 것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향해 가는 소신에 증거를 끼워 맞춘 것이다. 그리고 그 끼워 맞춘 소신으로 한 사람이 교수대에 올랐다.
1971년 사법파동 때 변호사 김용진은 사법권 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1976년 법률문화상을 받으며 청렴과 소신을 강조했다. 한국 사법사에서 치욕의 3대 판결로 꼽히는 조봉암 사법살인 판결의 장본인이 사법권 독립과 청렴을 이야기한 것. 이것이 이 글에서 유머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장면이다. 다만 그 유머의 무대에 조봉암의 싸늘한 시신이 있다.
2004년 2월 13일 방영된 KBS 인물현대사 진보 사형당하다, 조봉암 방송 화면 갈무리
영국에서 2026년을 생각한다
영국에서는 정치적으로 편향된 판결이 역사적으로 검증될 때 해당 판결을 내린 판사의 행적을 함께 기록한다. 단죄까지는 아니더라도, 그 판결이 왜 잘못됐는지를 역사가 설명한다. 조봉암의 무죄가 확정된 2011년, 그 판결을 이끈 판사 김용진은 이미 19년 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역사적 책임은 기록으로만 남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1960~ )의 비상계엄 선포를 영국에서 생중계로 보며 나는 1958년 조봉암 재판을 떠올렸다.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는 이렇게 썼다.
윤석열 내란에 동조하거나 내란범들을 적극 비호한 조희대(1957~ ) 사법부가 사법권 독립을 부르짖는 것은, 조봉암 사법살인 판결의 장본인이 사법권 독립을 운운하는 것의 선구적인 모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조금씩 다른 형태로.
역사의 법정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그리고 그 법정의 방청석에는 우리가 앉아 있다.
참고문헌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2026, 『반헌법행위자열전 1~4』, 사회평론아카데미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김성수 시민기자 wadans@empa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