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침묵, 일본을 곤경에 빠뜨리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중국과 일본의 갈등이 한 달을 넘겼습니다. 말싸움을 넘어 경제 보복과 군사적 긴장으로 확대되며 파장이 커지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를 통해,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합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가운데)가 11월 12일 도쿄 국회에서 열린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2025.11.12. AFP 연합뉴스
이번 갈등의 발단은 분명합니다.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지난 11월 7일 국회에서 대만 유사시 일본이 개입할 수 있다는 취지로 발언했습니다. 그는 중국이 대만에 무력을 사용할 경우 이를 일본의 존립 위기 사태 로 판단할 수 있으며, 집단적 자위권 행사도 가능하다는 인식을 드러냈습니다.
중국은 대만을 별개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며 중국 영토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대만 문제는 중국의 핵심 이익이라고 표현하죠. 그런데 일본 총리가 중국-대만 갈등에 개입할 수 있다고 발언했으니, 중국은 이 발언을 중대한 안보 도전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요.
중국은 치밀하게 대응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인의 일본 여행을 제한하고, 일본산 수산물 수입을 통제하는 등 경제·사회적 압박을 가했습니다. 갈등이 길어지자 압박 수위를 끌어올렸습니다. 중일 양국 군용기가 근접 비행을 벌이고, 중국 군용기가 일본 군용기에 사격통제 레이더를 조사하는(비추는) 상황까지 벌어졌습니다. 레이더 조사는 상대 항공기를 레이더 과녁에 조준하고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르기 직전 단계까지 가는 행위입니다. 중국과 러시아 함정과 전투 항공기가 일본 열도를 에워싸듯이 항진하고 비행하기도 했습니다. 군사력 시위는 경제 사회적 압박보다 심각한 행동이죠.
지난해 6월 중국 주하이 항공쇼에 등장한 중국 공군의 J-15 전투기들. 게티 이미지. BBC 12월 7일
다카이치 총리를 비롯한 일본 수뇌부는 나름대로 계산했을 겁니다. 일본은 미·일 동맹을 믿고, 일본이 대만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행동해도 되리라고 본 듯합니다. 미국이 대중국 견제 기조를 유지하고 있으니, 이렇게 나가면 일본이 자연스럽게 국제적 역할을 강화할 수 있으리라고 본 거죠. 다시 말해 일본은 ‘미국이 결국 나설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중국과 긴장 국면에 들어섰습니다.
미국은 일본이 기대한 대로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트럼프 2기 행정부 들어서 미국의 동맹관은 달라졌습니다. 동맹국이 안고 있는 안보 부담이나 우려를 공식적으로는 존중하되, 그것을 자동으로 미국이 떠안지는 않겠다고 합니다. 대신에 미국의 이익과 비용을 먼저 따지고 있습니다. 중일 갈등과 관련해 미국이 일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중국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내놓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경제신문(닛케이)이 최근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일본 특파원이 중일 갈등과 관련해 미국 국무부의 입장을 듣고자 거듭 논평을 요청했지만, 국무부는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국무부가 논평을 낸다면 중국을 편들 수 없고 동맹국인 일본을 편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기 싫다는 것이죠.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다카이치 일본 총리와 통화했지만, 이 문제에서 편을 들어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이 이번 사안에 개입하지 않고자 계산된 침묵을 선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은 중국과의 갈등을 사실상 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중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압박 강도와 수단을 조절하며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대항할 수단이 마땅히 없습니다. 갈등이 길어질수록 일본은 비용과 부담이 늘어날 것입니다. 일본은 선택지가 좁아지고 있습니다.
31일 오전 서울 광화문 이순신 동상 앞에서 자주통일평화연대 관계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한미일 안보협력 프레임워크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2024. 07.31 연합뉴스
한국도 외교안보 전략 차원에서 이번 중일 갈등을 면밀히 주시해야 합니다. 이번 사태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동맹의 현실 등과 관련성이 깊죠.
한국 언론에 사태를 잘못 보는 견해가 등장하는데요. 일부 언론인과 안보 전문가는 중일 갈등이 심각해지면 한국에 유탄이 튀고 한국도 피해를 볼 거라고 진단합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거죠. 중일 갈등이 벌어지자 중국이 한중일 3국 문화관광 장관 회의 불참을 선언해 이 회의가 무산된 일을 이들은 논거로 듭니다. 일부 논객은 20세기 초 청일 전쟁이 벌어졌고 그 결과 조선이 일본에 먹히면서 최대 피해자가 됐음을 상기시킵니다.
이런 주장은 틀렸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은 청일 전쟁 시기처럼 고래들이 싸우는데 중간에 낀 새우 와 같은 존재가 이제 아닙니다. 일본도 청일 전쟁 때는 떠오르는 아시아 최대 강자였지만, 지금은 그것이 아니죠. 흔히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를 묶어 4대 강국, 4강 외교, 4강 주재 대사라는 말을 쓰는데요. 일본 전문가인 김현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얼마 전 세미나에서 4강이란 말을 그만 쓰고 미국 중국 러시아 위주로 3강이라고 부르자”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두 나라가 다투는데 우리가 이득을 취하자고 달려들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중일 갈등 때문에 우리가 피해자가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 상황에 따라서는 한중일 정상회의 같은 테이블을 열어 갈등을 관리해보자고 한국이 제안할 수도 있죠. 이렇게 하면 한국의 국제정치 역할이 되레 커질 수도 있습니다. 국제질서와 미국의 동맹관 변화 등을 고려하면서 우리도 대응 전략을 잘 연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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