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집착은 도태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돈 벌고 집 사는 거, 그래 물론 좋지. 그런데 왜 갑자기 이렇게까지 된 거지?
2020년대 초반, 코인과 부동산 열풍이 한국사회를 휩쓸었다. 평소 경제적 가치에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까지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임의진 작가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 고민의 결과물이 숫자사회 다.
국제개발협력 전문가이자 작가인 임의진은 이 책에서 한국사회를 숫자가 전부가 된 사회 로 규정한다. 연봉, 아파트 평수, 자산 규모 등 눈에 보이는 수치만으로 인간의 가치가 평가되는 현실을 해부한 것이다.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4위에 오른 이 책의 저자에게 한국 사회의 민낯을 들었다. 다음은 지난 1월 14일부터 2월 5일까지 저자와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임의진 작가
놀이공원 패스트패스가 보여주는 자본주의의 폭력성
숫자사회 는 놀이공원 패스트패스 사례로 문을 연다. 돈을 내면 줄을 서지 않고 놀이기구를 탈 수 있는, 사실상 합법적 새치기 제도다.
비즈니스석이나 VIP 좌석과는 결이 다릅니다. 패스트패스는 기존이용자의 대기시간을 늘리는 구조죠. 그런데 이게 자본주의인데 뭐가 불만? , 부러우면 너도 돈 내 라는 반응이 쏟아졌어요.
임 작가는 이런 반응 속에서 자본주의의 폭력성을 발견했다. 문제를 지적하면 반자본주의자 딱지가 붙고, 모든 것이 개인의 능력과 책임으로 환원된다.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 (누칼협)는 표현이 그 폭력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임의진 작가
경제적 자유 에서 자가 아파트 로
임 작가는 경제적 자유 라는 개념이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급격히 변질됐다고 진단한다. 원래 돈 걱정 없이 사는 삶 을 의미하던 이 용어는 어느새 좋은 아파트를 사는 것 그 자체가 됐다.
2010년대 중반만 해도 전세 사는 게 큰 문제가 아니었어요. 천천히 돈 모아서 사면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죠. 그런데 지금은요? 집값이 폭등했는데도 사람들은 집을 사지 못해 난리입니다. 경제적 자유라는 용어마저 사라지고, 남은 건 오직 자가 아파트뿐이에요.
그는 이런 집착의 본질이 행복이 아니라 도태에 대한 두려움 과 남들과의 비교 에서 온다고 분석한다. 벼락거지 라는 신조어가 상징하듯, 실제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남들이 자산을 불린 동안 제자리에 있다는 상대적 박탈감이 문제의 핵심이다.
비교의 구조와 일상화된 불안의 언어
돈이 있으면 편해질 수는 있지만, 돈이 없다고 불편해져야 할 필요는 없다 는 책 속 문장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는 돈이 없으면 실제로 불편해질 수밖에 없다. 왜일까?
임 작가는 대안적 가치의 부재를 지적한다. 우리는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나는 수치를 비교하며 내가 남보다 낫다는 것을 끊임없이 점검하게 됩니다. 결국 모든 게 돈으로 수렴되죠.
벼락거지 , 각자도생 같은 용어가 일상어가 된 현실도 문제다. 이런 언어들이 단순히 현상을 반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사고방식과 행동을 바꾼다.
이런 용어의 유행은 남과의 비교, 타인에 대한 질시, 혼자 뒤처진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사회 전체에 팽배하다는 의미입니다. 남을 믿지 못하고, 나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인식은 건강한 개인주의가 아니라 극단적 이기주의에 불과해요.
신뢰의 붕괴와 왜곡된 공정 개념
한국사회에서 신뢰가 가장 크게 붕괴된 영역으로 임 작가는 채용과 입시를 꼽는다.
이것은 더 이상 시험 통과의 문제가 아니라 기회 에 관한 문제입니다. 삶 자체를 좌지우지할 기회를 얻느냐 마느냐의 문제로 받아들여지고 있죠.
안정적인 일자리와 자가 아파트 같은 평범한 삶 의 요건이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절차의 공정함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졌다. 문제는 공정에 대한 요구 자체가 왜곡됐다는 점이다.
성공의 문을 넓히거나 다양화하는 게 진짜 공정일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 사회가 인식하는 공정은 현 시스템 아래 정해진 규칙을 준수하는 것 뿐입니다. 시험만이 유일한 절차로 받아들여지는 이유죠. 이런 왜곡된 공정 개념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시야와 상상력까지 좁혀버립니다.
느슨한 연대 로서의 공동체
임 작가는 공동체의 복원을 중요한 해법으로 제시한다. 다만 그가 말하는 공동체는 과거의 마을 공동체가 아니다.
과거에는 국가의 사회안전망이 부족해도 공동체가 방파제 역할을 했습니다. 그것이 사라지면서 믿을 건 눈에 보이는 물질적 가치뿐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죠. 하지만 돈을 번다고 근원적인 결핍이 채워지지는 않아요.
그는 공동체를 어떻게 만드느냐 보다 결핍을 어떻게 채워줄 것인가 로 관점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안전망 구축과 함께 신뢰를 회복하려면 사람들이 많이 만나고 어울리는 경험이 선행돼야 한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한계가 있기에 국가와 사회가 주거환경이나 도시설계 차원에서 자연스럽게 개입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제안이다.
제가 제안하는 공동체는 느슨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연결망 입니다. 불안한 마음을 다독여주고 힘들 때 의지할 수 있는 안전지대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죠. 결국 숫자가 아닌 사람 이 삶을 채우는 경험을 회복하는 것이 현실적인 공동체의 최소 조건입니다.
청년에게는 혐오를 멈춰 달라 , 기성세대에게는 이것이 바라던 미래인가
2030 독자에게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을 묻자, 임 작가는 혐오를 멈춰 달라 고 답했다.
불안과 불신에서 기인한 생존 투쟁의 피로감이 손쉽게 타인에 대한 적개심으로 바뀝니다. 다른 성별, 다른 세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보다 왜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를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혐오와 비교, 분노는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기성세대에게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경제 발전과 민주화를 통해 바라고 꿈꾸었던 한국사회의 미래가 현재 보여주는 모습과 얼마나 일치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나와 우리 가족이 안정적으로 취직하고 집을 소유할 수 있다면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도 괜찮은 건가요? 그것이 그토록 갈구했던 자유와 평등, 민주화의 가치인가요?
계속 이런 식으로 살 것인가?
마지막으로 임 작가가 독자와 사회에 끝까지 붙잡고 싶었던 질문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를 벗어날 수 없고, 어느 정도는 돈을 좇을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계속 이런 식으로 살 것인가? 좁은 땅에서 치고 박고 아등바등, 시기하고 질투하며 인생 유일한 목표가 강남 자가 아파트인 채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사회를 위한 고민 없이 그렇게 평생 살아가도 좋은지 묻고 싶습니다.
숫자사회 는 진단서이자 제안서다. 한국사회가 어떻게 숫자에 포획됐는지를 냉철히 분석하면서도, 숫자 너머의 가치를 회복할 가능성을 놓지 않는다. 임 작가는 말한다.
결국 숫자가 아닌 사람 이 삶을 채우는 경험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제가 제안하는 현실적인 공동체의 최소 조건입니다.
돈과 자산이 삶의 전부가 된 사회. 그 안에서 불안과 박탈감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이 책은 묻는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그 질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설 용기가 필요한 때다.
* 임의진은 국제개발협력 전문가이자 작가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 튀니지사무소와 UN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ESCAP)에서 근무했으며, 영국 맨체스터대학교에서 개발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숫자사회 (웨일북, 2023)는 출간 당시 교보문고 정치·사회 분야 베스트셀러 4위에 올랐다. 현재 영국 서섹스대학교에서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임의진의 저서 숫자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