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잠식하는 음모론의 정치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본 칼럼은 음성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와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 MBC뉴스 화면 갈무리
최근 일부 온라인 공간과 유튜브 방송, 댓글 여론에서 김어준이 뒤에서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을 조종해 ‘문어게인 공작’을 벌이고 있다”, 정청래가 그 지령을 충실히 따른다”, 최종 목표는 조국의 차기 대권이다”라는 식의 주장이 확산되고 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그 과정에 유시민 작가가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런 흐름이 결국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는 경고까지 덧붙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 과격한 표현으로 X죽일 놈”이라는 말까지 동원되며, 마치 의병이 들고일어나 나라를 구해야 하는 상황처럼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런 주장들이 과연 사실에 근거한 것인지, 아니면 정치적 불신과 감정이 빚어낸 서사에 가까운 것인지 차분히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정치 음모론의 전형적인 특징은 ‘보이지 않는 설계자’를 상정하는 데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정치 행위자들 뒤에 더 강력하고 은밀한 조종자가 있으며, 모든 사건과 발언은 그 설계자의 큰 그림 속에 있다는 식입니다. 이런 서사는 복잡한 현실을 단순화합니다. 여러 이해관계, 우연, 개인의 판단, 정책적 차이, 권력 다툼 등 복합적 요인을 한 인물의 의도와 지령으로 환원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김어준이라는 인물은 오랜 기간 정치 팟캐스트와 방송을 통해 영향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 영향력을 과대평가하거나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민주당 의원들을 조종한다’는 식의 주장은 구체적 증거가 뒷받침되지 않는 한 정치적 해석을 넘어선 단정에 가깝습니다. 특정 정치인의 발언이나 노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 배후에 ‘누군가의 지령’을 상정하는 것은 쉬운 길이지만, 그만큼 위험합니다.
이 방식은 과거 극우 진영에서 즐겨 사용하던 논리와 닮아 있습니다. 누군가를 종북의 배후”, 비선 실세”, 보이지 않는 조종자”로 설정하고, 모든 현상을 그 프레임으로 설명하는 방식 말입니다. 지금 제기되는 주장 역시 구조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대상만 바뀌었을 뿐, 논리의 골격은 동일합니다.
정청래 대표나 조국 대표를 둘러싼 평가 역시 지지와 비판이 극명하게 엇갈립니다. 당내 노선 차이, 전략적 판단, 차기 권력 구도에 대한 전망은 언제나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를 곧바로 ‘공작’이나 ‘반란’으로 규정해 버리면, 정치적 토론의 공간은 사라지고 적대의 언어만 남게 됩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수행을 위태롭게 한다”는 식의 주장에는 강한 충성 프레임이 깔려 있습니다. 대통령을 옹위하는 것이 곧 정의이고, 그에 비판적이거나 다른 구상을 말하는 사람은 잠재적 배신자라는 구도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대통령과 여당, 그리고 그 내부 인사들은 단일한 의지로 움직이는 군대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해석과 전략이 공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유시민 작가와 김어준 총수. 겸손은 힘들다 화면 갈무리
정치적 동지였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다른 노선을 택할 수 있고, 비판적 거리를 둘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곧바로 역적”, 죽일 놈”으로 치환하는 순간, 민주주의적 언어는 사라지고 전쟁의 언어가 등장합니다. 질문 속 표현처럼 내란이 성공했으면 제일 먼저 죽었을 사람들”이라는 말은 한국 정치의 극단적 대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실제로 한국 현대사는 쿠데타와 탄압, 블랙리스트, 정치적 보복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역사적 경험이 집단적 상상력에 남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 합니다. 과거에 누군가가 탄압의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었다고 해서, 지금 그들을 향해 죽어야 할 사람”이라는 언어를 되돌려 쓰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의 씨앗이 됩니다. 폭력적 상상은 언제든 현실 정치의 토양을 오염시킬 수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각 진영은 상대를 민주주의의 적으로 규정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하지만 상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사고가 굳어질수록, 정치적 타협과 제도적 해결은 어려워집니다.
왜 이런 주장들이 등장하고, 또 일정 부분 호응을 얻을까요? 단지 몇몇 과격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그 배경에 구조적 요인이 적지 않습니다.
첫째, 정치적 불신이 오래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정당과 정치인에 대한 신뢰가 낮을수록, 공식 브리핑이나 제도권 언론의 설명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늘 저 말 뒤에 무엇이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정책 결정 과정이 복잡할수록, 그리고 당내 갈등이 공개적으로 드러날수록, 유권자는 그것을 투명한 토론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거래’의 결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이 불신은 단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닙니다. 반복된 공천 갈등, 계파 싸움, 정치적 입장 변화, 인사 논란 등은 시민에게 정치는 결국 자기들끼리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공개된 설명보다 ‘비공식적 뒷이야기’가 더 진실에 가깝다는 심리가 자리 잡습니다. 음모론은 바로 그 틈을 파고듭니다. 복잡한 현실 대신 누가 뒤에서 조종한다”는 단순한 설명은 오히려 심리적 안정감을 줍니다. 세상이 무질서하게 흘러가는 것보다 누군가가 설계하고 있다는 서사가 더 견딜 만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온라인 플랫폼의 구조가 자극적인 서사를 증폭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정치 담론은 텔레비전 토론회보다 유튜브, SNS, 커뮤니티를 통해 더 빠르게 확산됩니다. 알고리즘은 ‘사실 여부’가 아니라 ‘반응’을 기준으로 작동합니다. 분노, 공포, 배신감 같은 강한 감정을 자극하는 콘텐트일수록 더 많은 클릭과 공유를 얻습니다. 누가 누구를 조종한다”, 비밀 공작이 진행 중이다”, 곧 큰 배신이 터질 것이다” 같은 문장은 정보라기보다 드라마의 예고편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점 때문에 강력합니다. 시청자는 관객이 아니라, 음모를 먼저 간파한 ‘각성한 시민’이 된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감정적 보상은 반복 소비를 낳고, 반복 소비는 확신을 강화합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 검증은 뒷전으로 밀린다는 점입니다. 출처가 불분명해도, 정황이 모호해도, 그럴 듯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확산됩니다. 특히 같은 성향의 이용자들이 모인 공간에서는 반론이 잘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의 가설이 곧 ‘상식’처럼 굳어지기도 합니다.
셋째, 지지자 내부의 권력 재편에 대한 불안이 작용합니다. 차기 대권 구도, 당내 주도권, 정치적 상징 자산을 둘러싼 경쟁이 가시화될수록 지지자들은 민감해집니다. ‘우리 진영’ 안에서도 누가 중심이 될 것인지, 누가 주변으로 밀려날 것인지에 대한 긴장이 생깁니다. 이때 가장 손쉬운 전략은 상대를 정책적 경쟁자가 아니라 ‘음모의 주체’로 설정하는 것입니다.
노선의 차이가 아니라 뒤에서 다른 목표를 추진한다”는 의혹을 덧씌우는 순간, 그 사람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라 경계와 배제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효과를 낳기도 합니다. 공동의 적을 상정할 때 집단은 더 단단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결속은 취약합니다. 조금만 결이 달라도, 과거 발언이 현재의 기조와 어긋나도 ‘순도’가 의심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진영 내부에서 끊임없는 충성 경쟁이 벌어집니다. 누가 더 강하게 옹호하는지, 누가 더 날카롭게 배척하는지가 정치적 정당성의 기준이 됩니다.
또 하나의 조건은 정치의 ‘영웅화’입니다. 특정 지도자를 절대적 상징으로 세울수록, 그 주변의 모든 움직임은 충성 또는 배신으로 해석됩니다. 지도자의 성공은 곧 공동체의 구원이고, 지도자의 실패는 곧 재앙이라는 서사가 자리 잡으면, 내부 비판은 쉽게 용납되지 않습니다. 이때 음모론은 배신 서사와 결합합니다. 정책적 견해 차이나 전략적 판단을 다른 큰 그림을 위한 계산”으로 재해석하는 것입니다. 영웅을 중심으로 한 정치일수록, 주변 인물들은 조력자 아니면 방해자로 이분됩니다. 중간지대는 사라집니다.
사회 전반의 불안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경제적 양극화, 세대 갈등, 국제 정세의 불안정성은 시민의 일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줍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원인을 특정 인물이나 집단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구조적 문제를 설명하는 것보다, 구체적 ‘책임자’를 지목하는 것이 심리적으로 더 쉽기 때문입니다. 음모론은 바로 그 욕구를 충족시킵니다. 복잡한 경제 구조 대신 ‘배후 세력’을, 정책 실패 대신 ‘은밀한 공작’을 제시합니다. 이렇게 하면 불안을 잠시 해소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더 큰 불신을 낳습니다.
하지만 이런 서사가 반복될수록 정치적 공동체는 점점 더 파편화됩니다. 상대 진영은 물론, 같은 진영 내부에서도 ‘순도’ 경쟁이 벌어지고, 조금만 결이 달라도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그 결과, 정책과 비전의 경쟁은 사라지고, 누가 더 적을 잘 찾아내는지가 정치적 역량처럼 오인됩니다. 결국 음모론은 단순한 주장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묶는 방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가르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그리고 그 균열은 한 번 생기면 쉽게 봉합되지 않습니다.
현재까지 공개적으로 드러난 바에 따르면, 김어준이 민주당 의원들에게 조직적으로 지령을 내려 특정 대권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정치 평론가나 방송인이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옹호하는 발언을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조종’이나 ‘공작’으로 곧장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정청래 대표나 다른 민주당 인사들의 발언과 행보 역시 각자의 정치적 판단과 전략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타당합니다. 그 판단이 옳은지, 당과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지는 비판하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 비밀 지령이 있다고 단정하는 순간, 검증 가능한 영역을 벗어나 추측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갈등의 장입니다. 그러나 그 갈등을 어떤 언어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공동체의 미래가 달라집니다. X죽일 놈”, 역적”, 죽을 팔자” 같은 표현은 분노를 순간적으로 해소할 수는 있어도, 정치적 설득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대 진영이 사용해 온 과격한 언어와 닮아가며, 서로를 거울처럼 비추는 적대의 구조만 강화합니다.
만약 정말로 이재명 정부의 국정 수행이 중요하다면, 필요한 것은 내부의 다른 목소리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공개적 토론과 제도적 조율을 통해 전략을 정교화하는 일일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충성 경쟁이 아니라, 합의와 비판의 균형 위에서 작동합니다.
질문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주장들이 과거 극우 진영의 음모론 논리와 닮아 있다는 느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치적 위치가 달라도, 사고방식이 음모론의 얼개를 공유한다면 결과는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어느 진영이든 우리 편의 지도자를 지키기 위해 내부의 이견을 제거해야 한다”는 사고에 빠지는 순간, 민주주의는 약해집니다. 그리고 그 피해는 결국 국민 전체에게 돌아옵니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누군가를 ‘죽일 사람’으로 상정하는 상상력이 아니라, 주장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고, 과장과 선동을 걷어내며, 서로 다른 정치적 선택을 제도 안에서 경쟁하게 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음모론은 언제나 매력적이지만, 그것이 남기는 것은 더 깊은 불신과 분열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