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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아동 부모찾기 보다 해외입양 보냈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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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 27일, 전북 남원. 지리산 자락 아래 자리 잡은 이 도시는 평소 큰 사건이 많지 않은 곳이었다. 이웃끼리 얼굴을 알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며 놀던 평범한 지방 도시였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초등학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실종된 아이의 이름 ‘서희영’. 남원 중앙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열 살 남짓의 여자아이였다. 아이의 마지막 행적은 집에서 가까운 남원 시청 인근 놀이터였다. 해가 기울자 아이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희영이도 집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겠지만 그날 이후, 아이의 발자국은 세상에서 찾을 수 없었다.  현재 사단법인 실종아동찾기협회 서기원 대표 외동딸 서희영 양 실종사건에 관한 이야기이다.   1994년 10세 당시 실종된 서희영 양의 실종당시와 현재 추정모습의 몽타쥬. 저는 당시 젊은 나이였지만, 남원에서 제법 이름이 알려진 유지였어요. 여행사를 포함해 몇 개 사업을 운영 중이었고, 평민당 계열의 ‘연청’활동도 하면서 사람들이 ‘서 회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지역 사회에 꽤 폭넓은 인맥을 가지고 있었고, 크고 작은 행사나 모임에서도 얼굴이 많이 알려진 상태였어요. 정치권의 러브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의 실종 사건 앞에서 그 모든 것은 의미가 없었어요. 경찰에 신고가 접수됐지만, 부모의 초조함과 달리 사건은 즉각적인 수사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희 부부가 먼저 움직였어요. 우선 인쇄소를 찾아, 딸 희영이의 사진이 들어간 현수막과 전단지를 제작했습니다.”  남원 시내와 인근 지역 곳곳에 현수막을 걸었다. 전단지를 버스정류장, 상가, 시장, 학교 주변에 닥치는 대로 붙였다. 당시 경찰이 할 수 있는 방법은 한심할 만큼 제한적이었다. 지인을 통해 방송으로 사건을 알렸지만, 제보를 기다리는 방식이 주요한 수사 방법일 뿐이었다. 초동수사조차 없었던 것이다. 경찰 내부의 지역 간 공조 체계가 답답할 만큼 느슨했던 것도 문제였다. 그 사이 부모의 시간은 계속 흘렀다. 그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 그의 차량이 강원에서 제주까지 전국을 돌았다. 섬마을과 산골 마을, 대도시의 골목, 작은 역 주변, 터미널과 시장. 아이가 있을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어디든 달려갔다. 3000통이 넘는 손편지를 써서 전국의 각종 복지시설, 보호시설, 고아원 등에 보내기도 했다. 편지에는 희영의 사진과 사연을 담았다. 시간이 지나 마침내 회신이 도착했지만, 단 두 개뿐 내용마저 단순했다.   해당 아동과 같은 아이는 보호되고 있지 않습니다.”   2018년 국회에서 열린 실종아동문제 대책방안 토론회 당시 미아보호법은 8세 미만 아동이 미아가 되면 시민에 의해 파출소로 신고 되고, 경찰은 보호자가 찾으러 오면 인계하고, 만일 낮 근무자 퇴근 이전에 부모가 오지 않으면 아동일시보호소로, 이후 보호시설로 넘겨버리는 구조였다. 더욱이 고아원 등의 보호시설을 찾아가도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심지어 8세 이상인 아동이 실종되면 즉시 수사하지 않고 법조항 핑계로 3일을 기다리다 개시했다. 증거나 증인 등의 단서 없이 지연되면 미해결 사건이어도 수사를 종결해 버렸다. 생후 7개월인 영아나, 생후 36개월인 유아나, 10살 희영이가 없어져도 그저 ‘가출인’ 취급할 뿐이었다.   방송이 나간 후 엄청난 제보가 쏟아졌지만 지금처럼 경찰이 체계적인 수사가 전무했던 탓에 제보의 진위를 부모인 제가 다 파악하고 추적해야만 했습니다. 더욱이 남원이라는 소도시 특성상, 담당 경찰관(형사) 숫자마저 고작 몇 명에 불과했어요. 6개월간 전국을 돌며 희영이를 찾아 헤맨 결과는 ‘이 나라에서 실종아동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절망감뿐이었습니다. 당시 개구리소년 실종사건으로 국민들의 관심은 높아졌지만 실종아동을 찾는 우리사회의 시스템은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습니다.” 딸을 찾는 여정에서 그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 거리에서 방황하는 수많은 소년소녀 가장들을 접한 것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이 술과 담배를 가까이하고 공원이나 버려진 폐차 속에서 잠을 자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충격은 딸의 실종만큼이나 컸다. 방황하는 아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이후 그 아이들을 위해 자택 1층을 개방하여 쉼터로 내주었다. 대형TV와 비디오 시설을 갖추어 아이들이 마음껏 놀고 쉬도록 했다. 개인적인 노력이 조직적인 움직임으로 발전하여, 고향 남원의 150명에 가까운 아이들을 돕기 위한 체계적인 활동으로 성장했다. ‘소년소녀가장 돕기 청년회’를 결성하여 그 아이들을 돌봤으며. 그 아이들은 잘 자라서 지금도 일부가 찾아오기도 한다. 이러한 시민활동은 그가 실종아동찾기 운동을 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사)실종아동찾기협회는 1995년 ‘실종가족들의 모임’에서 출발한다. 이후, 전국실종아동인권찾기협회를 거쳐 2010년 현재의 이름으로 발전한다. 협회는 실종아동을 찾기 위한 수색수사 활동 및 홍보활동과 실종가족들의 경제적 심리적 신체적 문제점을 이해하고 함께 나누는 일을 하는 비영리민간단체이다. 현재 등록회원 300명과 활동회원 50명이 함께하고 있다. 서기원 대표는 2005년 협회에 본격 합류하여 현재까지 20여 년간 대표를 맡고 있다. 정부 지원이나 예산은 턱없이 부족하고, 도움보다 오히려 방해된 적도 많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실종아동법’의 제정에 막대한 역할을 했다. 2005년 12월부터 시행되었으며, 실종아동부모지원, 수색수사, 실종가족의 DNA검사를 명문화했다. 이후 몇 차례의 개정절차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만 3세에 실종된 이정훈의 실종당시 모습과 추정모습 몽타주. 박정희 정권 시절 해외입양은 북한이 남한을 조롱하고 공격하는 대상 중 하나였다. 해외로 아이를 팔아넘기지 말고 북으로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유신정권은 1985년부터 해외입양 전면중단을 선언했지만, 이후 취임한 전두환은 해외입양을 오히려 장려해 버렸다. 아시안 게임을 한 해 앞둔 1985년에는 해외입양 아동이 1만 명에 육박했다. 당시 입양기관과 아동보호 시설은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해외입양에 팔을 걷었다. 외국인에게 깨끗한 도시미관을 보여줘야 한다는 이유로 부랑아 단속도 상시적이었다. 이런 연유로 해외입양은 납치와 유괴, 미아 등 부모 잃은 아동조차 대상이 되기도 했다. 권장된 고아산업 해외입양이 사랑으로 포장되어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낯선 이국으로 팔려갔다. 실종아동이 많았던 이유는 국가가 시스템을 만들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건이 발생해도 항상 주먹구구식이었습니다. 실종자 가족이 생계를 내던지고 자녀 찾기에 나서다 보면, 경제적 육체적으로 한가정이 파탄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에는 늦어진 출생신고를 처벌하지 않았던 빈틈이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실제로 아동인신매매 조직 출신의 진술에 의하면 1970 ~ 80년대 당시 아동 1인당 300 ~ 500만원으로 거래를 했다는 것입니다. 집한 채 값이었죠. 아동거래를 통해 사적 입양 후, 뒤늦게 출생신고해도 국가는 그 (인신매매거래)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경우 실종아동이 발생하면 의학, 치의학, 법의학 등의 도움으로 10년 단위의 추정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런 시스템이 전무했다. 실종부모들의 간절하고 안타까운 사연 때문에, 협회는 미 국립 미아찾기 전문기관(NCMEC)과 업무협약을 체결하여 실종아동 18명의 현재모습 얼굴변환 몽타주를 작성하고 전국에 배포하기도 했다. 아이가 사라진다는 것은 한 가족의 시간이 멈춘다는 뜻이다. 그러나 어떤 시간은 완전히 멈추지는 않는다. 아주 느리게, 기록과 DNA와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흘러간다. 그리고 어떤 날, 그 시간은 다시 움직인다. 여기 여섯 개의 이름, 전순학, 윤시내, 조용덕, 서경희, 최원섭. 백상열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실종아이들이며, 수십 년 뒤 가족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2004년 당시 15세로 실종된 박수진 양. 1976년 여름, 여섯 살 전순학은 충남 홍성의 집을 떠나 전주역 앞에서 이발소를 하던 고모부 집에 놀러왔다. 역전은 늘 사람들로 붐볐다. 밖으로 나간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가족은 역전 골목과 시장을 뒤졌다. 경찰에도 신고했다. 그러나 당시 실종 사건은 지금처럼 체계적인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록은 몇 줄 남았고, 아이는 사라졌다. 전순학은 전주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외국으로 보내졌다. 미아가 발생되면 부모 찾기 대신 해외로 보내지던 시절이었다. 전순학씨는 실종아동법 적용을 통해 2025년 가족이 상봉한 첫 사례였다. 전주역 앞에서 사라진 아이는 미국에서 중년이 되어 있었다. 윤시내는 전남 나주의 유명한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가족의 시작은 평온하지 않았다. 부모는 혼전 동거 끝에 아이를 낳았다. 가정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어느 날 생부가 아이를 데려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외 입양 절차가 진행됐다. 하지만 생모는 너무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았다. 그때 이미 아이는 한국을 떠난 한참 뒤였다. 수십 년 뒤 해외 입양 기록을 통해 윤시내의 존재가 확인됐다. 그녀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고 있었다. 완전히 잃어버린 줄 알았던 아이였다. 전화와 연락이 이어졌다. 한때 태평양을 건너 사라졌던 이름이 다시 가족의 가슴 속으로 돌아왔다. 조용덕은 세 살 때 인천에서 실종됐다. 아이의 얼굴은 사진 몇 장으로만 남았다. 가족은 오랫동안 아이를 찾았지만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건은 잊힌 기록처럼 남았다. 그러나 과학은 기억보다 오래 버틴다. DNA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되면서 오래된 실종 사건들이 다시 조사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한 유전자 정보가 가족과 일치했다. 실종된 아이는 이제 50대 남성이 되어 있었다. 실종 당시 멀쩡했던 조용덕 씨는 현재 장애 2급 상태로 시설에서 살아가고 있다. 가족은 처음 보는 중년 남자를 껴안았다. 그 포옹 속에는 50년의 시간이 함께 들어 있었다. 부천역 앞 시장에는 늘 사람들로 가득했다. 노점과 상점 사이를 오가는 손님들 속에서 서경희의 부모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약간의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다. 어느 날 늘 다니던 하교 길에 그녀가 사라졌다. 가족은 경찰서를 오가며 수색을 요청했다. 전단지도 붙였다. 그러나 시장의 소음 속에서 그녀의 흔적은 요원했다. 시간이 흘렀다. 수색 수사가 다시 시작되면서, 인천경찰청과 보호시설에 작은 기록 하나가 연결되었다. 시설에서 성장한 후 성남 거주로 신원이 확인됐다. 이제는 중년 여성이 된 서경희 씨다. 그녀는 결혼해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최원섭 씨의 기억은 짧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남대문 가서 장난감총 사줄게.” 동네에 친절해 보이는 아가씨가 이사를 왔다. 그와 친하게 지냈다. 그 여성이 아이를 데리고 나갔다. 당시 최원섭은 네다섯 살 정도였다. 아이에게 남대문은 장난감 천국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외출은 장난감 가게로 가는 길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대로 아동 매매를 통해 입양 보내졌다. 친부모는 명문대를 나온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높은 지적 수준이 아이를 지키는 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기록과 추적은 그리움으로 연결됐다. 2018년, 마침내 상봉이 이루어졌다. 남대문으로 가던 길이 40년 만에야 마침표를 찍었다.   1977년 5세 당시 실종된 백상열씨는 해외로 입양된 후 가족이 상봉한 사례. 서울 동작구 보라매공원 근처의 골목길. 아이들은 소독차 뒤를 따라다니며 연기 속을 뛰어다니는 놀이를 했다. 다섯 살이던 백상열도 친구들과 함께 소독차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사라졌다. 시간이 흘러 아이의 이름은 해외 입양 기록 속에서 발견되었다. 백상열은 서울에서 사라진 뒤 안양의 홀트를 통해 노르웨이로 입양됐다. 가족은 자료 공개를 요구했다. 하지만 홀트 측은 관련 기록 공개를 거부했다. 2023년 가족은 상봉했지만, 소독차를 따라 뛰어다니던 그 아이는, 어떻게 해외 입양 기록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일까. 이 여섯 이야기는 서로 다른 사건이지만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그림자를 공유한다. 1970 ~ 90년대 사이 한국에서는 수많은 아이들이 실종되거나 해외로 입양되었다. 어떤 경우는 범죄였고, 어떤 경우는 가난과 제도의 빈틈이었다. 기록은 부족했고, 수사는 느렸으니, 가족들은 평생 자녀를 찾아 헤매야 했다. 이제는 DNA 검사, 실종자 기록, 해외 입양 자료가 연결되면서 수십 년 전 사라진 사람들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떤 상봉은 눈물로 끝나고, 어떤 상봉은 낯섦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이 말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서희영’을 비롯해 수많은 이름들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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