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다, 이제 ‘(우주)생명학’이다 [카테고리 설정이 아직되어 있지 않습니다.] 주요섭 (사)밝은마을 생명사상연구소 대표
지난 글에서는 ‘각비의 생명운동’을 이야기했다. 이번엔 ‘각비의 (우주)생명학’이다. 꼭 집어 말하면, 김지하의 ‘(우주)생명학’이다. 한국에서, 아니 전 세계적으로 (우주)생명학을 일관되게 논의한 이는 오로지 한 사람 김지하(1941-2022)뿐이었기 때문이다. ‘나홀로 (우주)생명학’을 펼친 셈이다. 오늘 그 첫 번째 이야기를 시작한다. ‘운동’이나 ’사상’이 아니라, ‘학(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난세의 사상, 빅 카오스 시대의 학문
난세(亂世)다. 어지럽다. 혼란스럽다. 불편하고 고통스럽다. 기후재난, 생태위기만이 아니다. AI의 폭주와 트럼피즘의 폭력에 온 세계가 어질어질하다. 우리가 알던 세상이 무너져내린다. 기존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청년시절 내 머리에 새겨졌던 가치 기준들도 무의미해진다. 민주/독재, 공익/사익, 자연/인공과 같은 이분법도 흐물흐물해진다.
난세에는 ‘난세의 사상’이 출현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제자백가가, 19세기 조선 말에는 동학을 비롯한 후천개벽사상들이 나타났다. 그런데, 김지하에게 오늘의 혼란은 난세의 그것과 차원이 다르다. 김지하에게 오늘날의 세계는 ‘빅 카오스(big chaos)’, 대혼돈의 시대이다. 동학을 빌려 말하면, ‘오만년 다시개벽’의 시대이다. ‘인류세’ 담론으로 말하면, 1만 2천 년 홀로세의 인류문명이 종말을 고하는 인류사적 대전환기이다. 그러니 당연 그에 부합하는 학문체계가 필요한 것이다. ‘사상’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김지하. 나무위키
생명은 귀중하다, 고양이를 살려라, 다람쥐를 살리자, 동물을 보호하자 그러죠. 다 좋아요. 다 좋은데 그것만 가지고는 한 발짝도 못 나가요. 생명 나름의 독특한 문법을 터득해야 돼요. 생명 나름의 독특한 문법이란 무엇일까요?”(김지하, 『흰 그늘의 미학을 찾아서』(2005))
김지하에게 빅 카오스 시대 생명의 문법은 ‘흰 그늘’과 ‘육체적 영’과 ‘불연기연(不然其然)’, 그리고 ‘카오스모스(chaosmos, 혼돈적 질서)’가 시사하듯 이중적이고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다. 생명과 평화 역시 카오스모스다. 김지하에게 생명의 진면목은 혼돈”이며 참다운 평화란 혼돈 그 자체의 살아 생동하는 균형과 질서”이다.
빅 카오스의 시대에는 빅 카오스의 학문이 필요한 것이다. ‘사상’이 아니고 ‘학문’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사상’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론적 체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제 ‘생명사상’이 아니고 ‘생명학’이다. 김지하에게는 빅 카오스 시대의 학문이 곧 ‘(우주)생명학’인 것이다. 김지하는 2003년에 『생명학1, 2』를 출간했고, 2018년에 『우주생명학』이라는 이름으로 마지막 저서를 펴냈다.
(2007년 김지하와 함께 ‘생명학회’를 창립한 바 있는 철학자 이기상은 또 다른 감각으로 동·서의 철학을 융합해 자신만의 독특한 ‘생명학’을 정립코자 했다. 2010년 『글로벌 생명학』을 펴냈다.)
2016년 11월 11일, 아델리펭귄 한 마리가 남극 맥머도 기지 인근 뉴 하버 연구 기지에 도착했다. 기후 변화의 최전선에 있는 남극의 펭귄들이 번식기를 기록적인 속도로 옮기며 적응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가 2026년 1월 20일 동물생태학 저널(Journal of Animal Ecology) 에 발표되었다. 2025.1.20. AFP 연합뉴스
왜 ‘생태학’이 아니고 ‘생명학’인가?
오늘날, 생태학(ecology)은 난세의 학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생태학은 ‘심층생태학’으로, ‘사회생태학’으로 심화·발전되어 왔다. 최근엔 ‘신유물론의 생태학’과 ‘인류세의 생태학’, 나아가 ‘어두운 생태학’(티머시 모턴)까지 진화를 거듭하며 생태파국시대를 구원할 ‘난세의 사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생태학만으로는 부족했다. 적어도 김지하에게는 그랬다. 김지하는 생태학을 존중하면서도, 동시에 (특히 과거의 생태학의 경우) 한계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생태학이 ‘관찰의 학’이라면, (우주)생명학은 ‘직관의 학’이다. 이때 직관이란 의식적 경험 이전 깊은 몸의 경험이다(우리가 흔히 ‘내면’이라고 말하는 그것이다.). 주관적 의식 이전에 우주생명인 인간과 또 다른 우주생명인 뭇 생명들이 감응한다. 생태학이 유기체와 그 환경에 관한 ‘객관적 관찰’을 의미한다면, 생명학은 ‘육체적 영’의 감응을 의미한다. ‘무기물에도 영성이 있다’는 김지하의 진술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이해도 다르다. 생태학이 인간 역시 생태계의 일부”라는 점을 강조한다면, (우주)생명학은 인간의 ‘생명성’에 주목한다. 사회적 인간, 이성적 인간도 중요하지만, (우주)생명학의 인간은 무엇보다 ‘(우주)생명’ 인간이다. 먹고 자고 고통스럽고 즐거운 몸을 가진, 그러나 동시에 우주와 감응하는 ‘영성적 생명’의 인간, ‘육체적 영’의 인간에 주목한다. 그러므로 (우주)생명학의 관점에서,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bio-polictics)는 엄청난 통찰이지만 동시에 생물학적(biological) 인간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김지하에게 ‘살아있는 경험(lived experience) 은 육체적이면서 동시에 영적(靈的)이다. 고통스러우면서도 동시에 거룩하다.
그렇다면, 김지하는 왜 생태학의 한계를 강조하는가?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김지하에게 그것은 삶의 고통/해방과 관련된 문제이고, 인류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며, 지구 공생체의 안위가 걸린 절박한 현실의 문제이다. ‘가시적으로 드러난 질서’에 대한 연구나 학적 체계만으로는 파국적 생태위기의 현실을 회생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주의 기운과 숨겨진 질서에 대한 직관적 경험과 앎이 없이는 다시개벽의 인류사적 대전환기에 응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김지하는 ‘생명학’이 ‘혼돈학’, 혹은 ‘지기학(至氣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제 김지하의 생명학은 ‘우주생명학’이 된다. 이때 ‘우주생명’이란 곧 ‘지극한 기운’이다. 우주생명, 즉 ‘지기’는 심리와 물리, 인간과 사회를 관통하는 숨겨진 질서의 원천이 된다. 그러므로 김지하의 우주는 차라리 ‘( )’이다. 공(空)이다. 텅빈 채로 살아 있다. 김지하는 일찍이 생명을 ‘활동하는 무(無)’라고 정의한 바 있다.
수운 최제우. 나무위키
김지하의 각비, ‘이성의 학’에서 ‘영성의 학’으로
요컨대, ‘드러난 질서’의 학문만으로 오늘의 인류사적 문제들에 응답할 수 없다는 말이다. 김지하에게 ‘각비(覺非)’란 이에 대한 깨달음이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생태학을 비롯한 서양의 학문이 ‘이성의 학’이라면, 김지하가 생각하는 새로운 학문은 ‘영성의 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의 원천은 수운 최제우였다.
김지하에 따르면, 조선의 성리학적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최제우는 기존의 공부법이었던 비흥법(比興法)을 포기하고 흥비법(興比法)으로 ‘대전환’ 한다. 쉽게 말해, 사실의 ‘비교’보다 ‘감흥’의 체험을 앞세우는 것이다. 김지하의 해석에 따르면, ‘비흥’은 눈에 보이는 ‘드러난 질서’를 근거로 하여 보이지 않는 ‘숨은 질서’를 설명하려는 방식이다. 그러나, 비흥법으로는 조선 말 난세를 풀어나갈 지혜를 얻을 수 없었다. 기존의 문법으로는 보이지 않는 생명세계의 역동성을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지하의 해석이다.
그리하여, 수운은 ‘비흥(比興)’을 ‘흥비(興比)’로 뒤집어엎는다. ‘흥비’는 ‘비흥’과 반대로, 보이지 않는 ‘숨은 차원(후천개벽/혼돈)’에 대한 직관과 체험(흥)을 먼저 전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해석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이다. 감흥과 영감과 직관을 비교와 추론과 서사의 전제조건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귀납법이나 연역법이 아닌, 귀추법(abductive)이나 발견법(heuristics)과 비슷한 문제의식으로 보인다(김지하는 주역의 추연법(推衍法)에 대해 천부경의 묘연법(妙衍法)을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비흥’에서 ‘흥비’로의 전환은 기존의 기존 방법론의 전복을 의미하지만, 다시 말하면 무게 중심의 이동을 통한 방법론의 ‘재-통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수운 최제우의 인식론이라 할 ‘지기도이수기지(知其道而受其知)’를 김지하식으로 재해석하는 데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김지하에게 ‘지기도’는 서구의 분석적 ‘검증 과학’이고, ‘수기지’는 동양의 직관적 ‘계시 체험이다. 이 둘 어느 쪽도 버릴 수 없으며, 통합과 균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물론, 무게 중심은 ’계시적 앎‘에 있다.
김지하가 (우주)생명학의 인식론적 방법이나 생성의 논리라고 주장하는 ‘불연기연(不然其然)’ 개념도 마찬가지다. 김지하에게 ‘불연기연’은 ‘아니다(不然)’와 ‘그렇다(其然)’의 두 차원이 순환하고 서로 중첩되면서 변화하는 과정을 포착하는 ‘차원 변화’의 문법이자 ‘생성 논리학’이다. 또한, 김지하는 ‘불연기연’에서 ‘0(불연)’과 ‘1(기연)’ 디지털의 숨은 차원, 생동하는 이진법”(『우주생명학』)의 비밀을 발견한다.
일론 머스크의 우주, 김지하의 우주
디지털 문명의 AI 폭주시대, 2026년은 일론 머스크의 세상이다. 오늘도 나는 ‘2026년 거대한 전환의 시작! 인류 문명의 다음 단계’라는 제목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있다. 우리는 ‘머스크의 우주’에서 살고 있다. 화성 이주뿐만 아니다. 머스크는 생명과 의식의 우주적 확장을 강조하며 ‘다행성 문명(Multi-planetary Civilization)’을 주장하고,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비롯한 그의 회사들은 디지털·AI기술을 통해 인류문명의 운영체계를 새롭게 구축하고 있다.
우리는 머스크와 기술주의 우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투자자로, 사용자로, 숭배자로 머스크 제국의 신민(臣民)이 되었다. 대한민국도, 대한민국의 민생(民生)들도 그의 기술과 방법과 생각을 뒤쫓아가느라 정신이 없다.
각비는 하고 있으나 무능력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에게는 김지하의 ‘(우주)생명학’이 있다. 문명사학자 이병한이 말했듯이, 21세기 한국에서 일론 머스크에 버금가는 우주론을 제창한 사상가는 김지하가 유일하다. 개별 문명의 전환이 아니라, 인류문명 전체의 다시개벽을 주장한 사상가는 김지하뿐이다. 한국에서 디지털과 에코를 통합하고, 유목(노마디즘)과 정착을 융합하는 대서사의 비전을 제시하는 ‘대(大)구라꾼’은 김지하가 유일하다. 김지하는 일찍이 1982년 판소리 형식의 우주적 대서사인 『대설(大說) 남』을 썼다.
물론 김지하는 일론 머스크와 같은 기술주의자와 다른 전망을 제시한다. 생태주의자들의 반기술주의 편향을 우려하며 ‘에코-디지털’ 문명을 주장했지만, 디지털 편향에도 분명하게 반대했다. ‘계산 만능’과 ‘추론 만능’에 명백히 반대했다. 김지하의 대답은 불연기연이 그렇듯, ‘디지털-에코’의 이중성이었다. 김지하는 오늘의 양자컴퓨터를 떠오르게 하는 ‘신령-컴퓨터’를 제안하기도 했다.
김지하의 우주는 각비(覺非)의 우주다. 김지하의 우주는 ’( )‘의 우주다. 무어라 규정할 수 없어 아무런 언급을 남기지 않는 ’노코멘트의 우주‘다. 예측 불가능하고 분별 불가능한 미결정과 비구별의 지대이다. 신령하고 거룩한, ’묘연(妙衍)‘의 세계다. 그리고, 실천적 결론은 이것이다. ’창조화‘. 산업화와 민주화를 껴안고, 정보화와 생태화를 통과하여 ’창조화‘의 우주에 이른다. 단, 이때 ’창조화‘는 거대한 우주를 덮는 거대한 하나의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제각각 제 나름으로 아름다운, 천(千) 떨기 꽃으로 피어난다(萬年枝上花千朶, 만년 생명 진화 나무에 천 떨기 꽃이 피네). 백화제방(百花齊放)의 화엄개벽이다.
지난 글에서 나는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분했다. 그러나, 이는 방편이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도 방편으로 말씀하셨을 것이다. ‘불연/기연’이 그렇듯이, ‘성/세속’도 둘이면서 하나다.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은 둘이면서 하나다. 그러나, 인류사적 대전환의 분기점에서 선 오늘, ‘계산지능 우주’, ‘AI우주’와 다른 ‘비-계산지능 우주’, ‘비-AI우주’를 질문해야 한다. 영화 듄 세계관에서 보여주는 ‘기술주의의 익스 가문(House Ix)’과 ‘영성주의적 정신 수련’의 베네 게세리트(Bene Gesserit) 대결 구도에서 시사점을 얻을 수도 있다. 물론 결이 많이 다르지만.
목성. NASA의 주노 탐사선에 탑재된 주노캠 장비의 원시 데이터를 사용하여 색상을 보정한 목성 이미지가 2022년 4월 21일 공개되었다. 목성의 위성 가니메데의 그림자가 왼쪽에 드리워진 모습을 보여 준다. 2022.4.21. 로이터 연합뉴스
(우주)생명학,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제 인간의 무의식과 우주와 사회의 변동이 통합적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은 큰 ‘생명의 치유’를 가져올 것입니다. 이것을 우선 ‘생명학’ 이라 부르겠습니다.”(『생명학1』)
김지하는 ‘(우주)생명학’이 대문자 생명과 소문자 생명 모두를 치유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이렇게 바꿔 물을 수도 있다. 오늘의 현실에서 ‘(우주)생명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첫째, (우주)생명학은 감성적이면서 이성적이고, 사적이면서도 공적이며, 신체적이면서도 영적인 삶의 다중성 속에서 ‘생명’이라는 화두를 붙들게 한다. 니클라스 루만의 생명-의식-사회의 삼중 복잡체계 인간론으로 보면, ‘생명’에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한다는 언명이기도 하다. 자산계급과 비자산계급으로 이중화되는 오늘의 경제적 현실, ’부자되세요‘의 이재명 정부 버전인 코스피 5천시대, ’극단적인 양극화‘는 ’극단적인 저항‘을 낳을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은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우주)생명학은 그 순간 ’생명‘의 관점에서 다시 묻는다. 뭐가 중한디?”
둘째, (우주)생명학의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은 개개인의 삶에서도 ’다시 개벽‘을 요구한다. 분명의 기존의 준거와 서사는 효력을 다했다.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우리는 ’준거 그 자체의 준거‘를 의심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공허와 허무가 삶의 일부가 된 시대를 살고 있다. 우주에는 의미가 없다. 진화에는 목적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우주)생명학이 제안하는 제 나름의 개성적 ’창조화‘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셋째, 새로운 서사다. 인류사적 대전환기에 부합하는 담대한 우주적 대서사다. 나는 영화 ‘듄‘과 영화 ’아바타‘에서 보았던 새로운 서사와 세계관을 일론 머스크에게서 발견한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나는 김지하의 (우주)생명학에서 또 하나의 우주적 대서사와 세계관을 경험한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일론 머스크에게 ‘육체적-기술’의 우주론이 있다면, 김지하에게는 ‘육체적 영성’의 우주론이 있다. 20여 년 전 김지하는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라는 슬로건으로 하는 생명문화운동 단체를 창립한 바 있다.
지난 1월 30일 전주에서 ‘생명학 콜로키움’이라는 이름으로 ‘(우주)생명학’을 공부하는 작은 모임을 가졌다. 3월 말엔 ‘생명평화 전환 한마당’에서 ‘(우주)생명학과 난세 읽기’라는 주제로 세션 하나를 진행할 예정이다. 가을엔 (우주)생명학 축제를 하고 싶다. ‘궁궁/태극(弓弓/太極)’의 아키타입(archetype)을 경험하고 ‘혼돈적 질서’의 패러다임을 토론하며, ‘모심과 님’의 윤리를 연습하는 ‘(우주)생명학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