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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쓴 글, 교수대에서 완성한 신학자 본회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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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저항의 얼굴, 교수대에서 완성된 삶 1945년 4월 9일 새벽, 독일 플로센뷔르크 수용소. 한 남자가 조용히 무릎을 꿇고 기도를 마친 뒤 교수대에 올랐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히틀러(1889~1945)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불과 23일 전이었다. 조금만, 딱 23일만 더 버텼다면 살 수 있었다. 역사란 참으로 얄궂다. 그 남자의 이름은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신학자였고, 목사였고, 저항운동가였고, 결국 순교자가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에서도 가끔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인데, 정작 그가 왜 죽었는지, 무엇에 저항했는지를 제대로 아는 이는 드물다. 이름은 익숙하되 삶은 낯선, 그야말로 진열장 속 성인(聖人) 이 되어버린 셈이다.   1939년, 디트리히 본회퍼.(위키피디아) 금수저 신학자, 그러나 강단에서 교수대로 본회퍼는 1906년 독일 브레슬라우(Breslau, 현재 폴란드 브로츠와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카를 본회퍼(1868~1948)는 당대 독일 최고의 신경정신과 의사였고, 어머니 파울라 폰 하제(1876~1951)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여덟 남매 중 여섯째. 요즘 말로 하면 전형적인 금수저 다. 열일곱 살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 입학해 스물한 살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것도 최우등으로. 심지어 스물다섯에는 교수 자격 논문까지 통과했다. 주변에서는 저 친구, 나중에 독일 신학계를 이끌겠구나 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촉망받는 청년 학자의 앞날에 역사가 끼어들기 시작했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 총리에 취임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 본회퍼는 라디오 방송에서 독일 국민들이 지도자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위험성을 경고하는 강연을 했다. 방송국은 강연 도중 송출을 끊어버렸다. 권력의 귀는 불편한 진실을 오래 듣지 못하는 법이다. 예나 지금이나.   본회퍼가 시온교회 신자들과 함께 1932년의 어느 주말 수련회를 보내는 모습.(위키피디아) 싸구려 은혜 를 팔지 마라 본회퍼가 남긴 가장 날카로운 개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값싼 은혜 다. 그의 명저 『제자도』(1937년 출간)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회개도 없고, 변화도 없고, 십자가도 없이 그냥 믿기만 하면 천국 간다 고 하는 것, 그게 싸구려 은혜다. 이것을 오늘날 한국 대형 교회에 대입해보면? 요즘 일부 교회 강단에서 나오는 말들이 본회퍼가 분류한 싸구려 은혜 목록과 상당 부분 겹친다. 이건 풍자가 아니라 신학적 사실이다. 반면 본회퍼가 제시한 값비싼 은혜 는 명확하다. 따르는 것, 즉 실제로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는 책상 앞에서 이론을 쓰는 데 그치지 않았다. 1930년대 중반, 나치정권이 교회마저 장악하려 하자 그는 이른바 고백교회 운동에 뛰어들었다. 히틀러를 지지하는 어용 독일 기독교인 단체에 맞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 한 운동이다. 국가가 교회를 손에 쥐려 할 때,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이 장면, 어딘가 낯설지 않은가?   함부르크 성 베드로 성당 앞 본회퍼 기념비.(위키피디아) 뉴욕행 비행기를 되돌린 남자 1939년 6월, 본회퍼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갔다. 전쟁이 코앞이었고, 미국의 지인들이 그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가려 했다. 대학의 자리도 마련되어 있었다. 살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되어 그는 배를 타고 독일로 돌아왔다. 스스로. 자발적으로. 정신이 있는 사람이 맞나 싶겠지만, 그가 지인 라인홀드 니버(1892~1971)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었다. 내 동족이 이 전쟁의 시련을 겪는 동안 내가 독일에 없다면, 나는 전후 독일의 재건에 참여할 자격이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도망가면 나중에 뭔 낯짝으로 돌아오냐 는 뜻이다. 문장 하나가 그의 전부를 설명한다. 지식인의 책임이란 이런 것이다. 책 속에 있지 않고, 삶 속에 있다.   본회퍼의 공부방.(위키피디아) 신학자가 암살 모의에 가담했을 때 독일로 돌아온 본회퍼는 이후 더 깊은 저항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매형 한스 폰 도나니(Hans von Dohnanyi, 1902~1945)를 통해 독일 군사방첩대 내부의 반히틀러 저항조직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히틀러 암살 계획에 연루되었다. 신학자가 암살 계획에 관여한다고? 당시 사람들도 같은 반응이었을 것이다. 본회퍼 자신도 이것이 얼마나 큰 윤리적 딜레마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는 이를 죄책의 공유 라는 개념으로 스스로 정리했다. 때로는 악을 막기 위해 도덕적으로 깨끗한 손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 방관함으로써 죄 없는 척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죄라는 논리다. 1943년 4월, 그는 체포되어 베를린 테겔 군사교도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관련성이 드러나며 더 가혹한 처우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1945년 4월 9일 새벽, 교수대에 올랐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20세기 순교자 갤러리. 왼쪽부터 러시아의 엘리자베스 수녀,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오스카 로메로, 본회퍼.(위키피디아) 감옥에서 쓴 편지들, 그리고 시대를 꿰뚫는 언어 옥중에서 그가 쓴 편지와 글들은 사망 후에 『저항과 복종』(1951년 출간)이라는 책으로 묶였다. 이 책에는 후세 신학과 사상에 거대한 파문을 던진 개념들이 담겨 있다. 세상이 성숙해졌다. 인류는 더 이상 신을 문제 해결사로 찾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는 선언이다. 그렇다면 그런 세상에서 교회와 신앙은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가? 그는 타자를 위한 존재 로서의 교회를 제시했다. 자기 조직의 유지와 확장에 골몰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의 편에 서는 교회. 이 개념은 이후 1960~70년대 남미의 해방신학, 미국의 흑인 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안병무(1922~1996), 서남동(1918~1984) 등 한국 민중신학의 선구자들이 본회퍼의 문제의식을 직접 흡수해 한국 현실에 맞게 재해석했다.   에디스 브렉볼트의 조각 작품. 본회퍼의 명언 시련. 세상 그 누구도 진실을 바꿀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진실을 찾고, 발견하고, 섬기는 것뿐이다. 진실은 어디에나 있다 가 새겨져 있다.(위키피디아)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에서 열린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한 인사들. 왼쪽부터 이우정, 안병무, 함석헌, 이해동.(함석헌기념사업회) 한국에서 본회퍼를 읽는다는 것 이 지점에서 우리는 솔직해져야 한다. 한국은 1970~80년대 군사독재 시절, 수많은 신앙인들이 박정희(1917~1979), 전두환(1931~2021) 정권에 맞서 거리로 나섰다. 김재준(1901~1987), 함석헌(1901~1989) 같은 이들이 그 중심에 있었다. 그들이 걸었던 길은 본회퍼가 걸었던 길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2024년 12월, 윤석열(1960~)의 갑작스러운 비상계엄 선포와 그 뒤를 이은 탄핵 정국은 많은 이들에게 아, 역사는 반복되는구나 라는 쓰라린 교훈을 안겨주었다. 민주주의란 한 번 쟁취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세대가 지켜나가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 사건이었다. 이 상황에 본회퍼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교회는 어느 편에 서 있는가? 지식인은 특권을 지키기 위해 침묵하는가, 아니면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방관이 공모가 되는 순간을 우리는 알아채고 있는가? 권력이 교회를 포섭하려 할 때, 교회가 권력의 언어를 빌려 신도들을 동원할 때, 본회퍼는 그것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다. 배교 라고.   본회퍼.(Bonhoeffer: Respecting, Receiving, and Relating in a Polarized Age  – Radix Magazine) 마지막 아침, 그리고 남겨진 말들 처형 당일 아침, 수용소 군의관이었던 H. 피셔-휠레스는 본회퍼의 마지막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한 뒤, 용감하고 침착하게 교수대로 걸어갔다. 50여 년간 의사로 살았지만,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이것이 끝이지만, 나에게는 삶의 시작이다.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 그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삶을 사랑했지만, 더 큰 것을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알았다.   본회퍼.(Biography - International Bonhoeffer Society, English Language Section) 본회퍼는 박제된 성인 이 아니다 본회퍼는 편하게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그의 이름을 강단에서 멋지게 인용하면서 정작 그가 싸웠던 것들, 국가 권력의 횡포, 교회의 어용화, 지식인의 침묵에 눈을 감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그가 경고한 싸구려 은혜 의 현대판이 아닐까. 오늘 한국에서 본회퍼를 읽는다는 것은, 그저 훌륭한 신학자의 전기를 읽는 것이 아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라는 불편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일이다. 1945년 4월 9일 새벽, 플로센뷔르크의 그 교수대 앞에 섰을 때, 그는 아마 두려웠을 것이다. 서른아홉의 젊은 남자가 두렵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는 걸어갔다. 그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 전부 가, 8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등을 떠밀고 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 올바른 행동을 하라. 우리가 어떻게 할지를 선택할 때, 우리는 미래를 빚고 있다. -디트리히 본회퍼   기타를 연주하는 본회퍼.(Biography - International Bonhoeffer Society, English Language S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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